13.1.20. 예수, 우리의 이웃 – 9. “믿음의 삼겹줄이 됩시다.” | 이응도 목사 | 2013-0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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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룻기 3:1-6 제 목 : 예수, 우리의 이웃 ? 9. “믿음의 삼겹줄이 됩시다.” 제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어릴 적 이야기를 어머니께서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지금 승하만 하던 때, 2-3살 쯤 되던 때였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섬기시던 교회가 경남 삼천포에 있는 벌리동 교회였습니다. 동네 앞에 바다로 흘러가는 큰 개울이 있었는데, 온 동네 아낙네들이 다 나와서 빨래도 하고 여름에는 아이들이 멱을 감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저희 형제 셋을 데리고 빨래를 하러 나가셨습니다. 네 살 차이가 나는 큰 형, 두 살 차이가 나는 작은 형, 그리고 제가 함께 개울가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큰 형 나이의 개구쟁이 하나도 개울가에 엄마를 따라 놀러왔습니다. 그 아이와 큰 형이 시비가 붙었습니다. 사실 ‘목사 아들’이라는 직분 아닌 직분은 어릴 적부터 참 제대로 감당하기가 힘든 직분입니다. 교회에서나 밖에서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목사집의 큰 아들 행세를 해야 했던 큰 형은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시원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덩달아 작은 형도 울먹거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금 전에 저희 형과 싸웠던 꼬마가 뒤통수를 붙들고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뒤에는 아직 세상 물정도 눈치도 몰랐던 두 살 용사 이응도 어린이가 굴러다니는 깡통 하나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가끔 어머니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 일을 잘 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께서는 목회자의 자녀로 자라는 저희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풍족하게 키우지도 못하면서 주변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많이 불편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희 삼형제와 여동생을 불러 놓고 서로 평생을 의지하면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어머니도 큰 집안에 무남독녀 외동딸이셨고, 아버님도 1남 1녀이 장손이셨기 때문에 의지할 형제가 없어서 참 외로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제가 했던 ‘깡통 복수’를 말씀하시면서 참 곤란했지만 믿음직하고 대견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형제들은 서로 돕는 것이라구요.... 오늘날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수정하고 고치고 개혁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합니다. 문제 많고 아픔 많은 것이 교회이지만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서 성도와 성도가 만나고 한 형제, 자매됨을 확인하고 서로를 돕고 서로를 세워가기 때문입니다. 1. 삼겹줄 원리 솔로몬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전도서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전합니다. 그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사 4:7-12) 여러분! 솔로면의 이 권면에 동의하십니까? 정말입니까? 정말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낫고 두 사람보다 세 사람이 나을까요? 사람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따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섭리에 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순종하는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섬깁니다. 세우고 존중합니다. 창조 섭리에 반하는 죄의 원리에 따르는 사람은 서로를 해칩니다. 헐뜯습니다. 비난하고 무너뜨립니다. 자,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고, 세 사람이 두 사람보다 낫다는 솔로몬의 권면에 동의하십니까? 아니, 동의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대답하기 힘드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서로 세우고 사랑하고 섬깁니까? 해치고 아프게 하고 무너뜨립니까?” 저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 교회적 관계가 솔로몬의 전도서에서의 권면이 건강한 상식으로 통용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교회로 만나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섬겨서 든든한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지고 세상을 죄와 악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든든한 삼겹 동아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세 사람의 선택 오늘 우리가 말씀은 과연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섬기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삼겹 동아줄이 될 수 있는지를 아주 좋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사람을 주목합니다. 이미 우리는 룻이 얼마나 선한 선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8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나오미에 대해 참으로 선한 이웃이 되었던 룻의 헌신과 사랑을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나의 삶을 드려서 헌신하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닮은 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늘 이기적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마음은 나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룻은 예수님의 마음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3:10에서 보아스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번 룻의 선함을 확인하십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 3:10) 더욱이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룻의 나오미에 대한 선한 마음과 행동이 점점 더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선한 마음을 품었다가 나중에 지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우리는 쉽게 지치고 포기하고 낙심합니다. 선한 마음을 품었다고 피곤한 마음으로 포기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룻의 이러한 선택에 주목하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또 한 사람, 이번에는 성경이 나오미의 선택을 주목합니다. 룻기 3장 1절을 봅시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 3:1) 나오미는 룻을 위하여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룻이 평생 여종처럼 자신을 섬겨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나오미는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인정하는 것은 “내가 너를 위하고 너를 복되게 하겠다”는 나오미의 의지입니다. 룻이 시집을 가버리면 나오미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구걸과 동냥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결심합니다. 자신이 필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룻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 마음은 룻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으로 룻을 인도합니다. 룻의 믿음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을 나오미가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며느리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한 나오미 또한 그 시대에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은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대에 한 이방 여인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 보아스가 있습니다. 11-13절을 봅시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룻 3:11-13) 이 3절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인격과 성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먼저 그는 룻을 좋은 며느리, 현숙한 여인이라 칭찬합니다. 존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이방의 젊은 여인이라 멸시하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만나던 때부터 철저하게 룻을 존중하고 인정합니다. 조금만 많이 가지면, 조금만 알면, 조금만 먼저 무엇인가를 하면 자랑하고 무시하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또한 보아스는 룻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룻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주, 흔히 다른 사람의 수치를 드러내고 그것으로 즐기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만지작거리면서 놀리기도 하고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가진 모든 연약함은 우리에게 허락된 교회적 관계 속에서 보호받고 인정받아야 할 대상입니디. 놀림과 조롱, 수치와 고통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침상으로 들어온 젊은 여인 룻을 놀리거나 성적인 유희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보호해줍니다. 왜냐하면 룻 또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룻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지금 보아스는 본문에서 ‘책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보아스는 룻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더 가까운 친척도 이 두 여인을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책임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때로 책임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손해를 봐야 하고, 더 많은 희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책임지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말씀이 내게 다가올 때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당당히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책임지는 사람에 주목하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어두웠던 사사의 시대에 사용하셨던 세 겹의 줄이 보이십니까?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 이 세 사람의 선택은 두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서로를 향해 있고,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던 사사의 시대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만났습니다. 그들의 서로를 위한 선택이 하나의 동아줄로 엮일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대를 이끌고 가는 튼튼한 동아줄이 됩니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기로 결정하고 선한 이웃의 삶을 사는 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이 세 사람의 서로에 대한 신실함과 선함은 이스라엘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복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룻기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될 때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의 뜻이 흐르는 통로가 되고 길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할 때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복음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과 복음이 서로에게, 세상에 대해 역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면 복음의 통로가 되고 도구가 되지만,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활동을 가로 막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룻기 1장에 등장하는 오르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룻기 4장에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에게 보아스보다 가까웠던 친척이 등장합니다. 그는 책임지는 일을 회피합니다. 그 두 사람이 성경에 다시 등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 사람을 기록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서로에 대한 선한 이웃됨을 사용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말씀과 법에 대한 순종을 사용하시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에 대해 책임지려는 마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마음, 이 사랑, 이 순종, 이 책임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4. 서로가 함께! 성경이 가징 많이 사용하는 부사 중에 ‘서로’라는 말과 ‘함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는 성경에서 248회 사용되었고, ‘함께’는 무려 1359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적 원리가 바로 이 두 부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서로가 함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의 편지에서 참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말들을 다음과 같이 여러 편지를 통해서 사용했습니다. 여러 초대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서로 받으라” “서로 세우라” “서로 위로하라” “서로 나누라” “서로 안아주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고맙게 여기라” “서로 낮추라” “서로 영향을 주라” “서로 기쁘게 하라” “서로 무릎을 꿇어라” “서로 귀를 기울이라” “서로 동기를 부여하라” “서로 필요한 사람이 되라” “서로 열린 마음을 가지라” “서로 솔선하라” “서로 권리를 포기하라” “서로 귀하게 여기라” “서로 웃어라” “서로 신뢰하라” “서로 하나가 되라” “서로 유익한 사람이 되라” “서로 깨어 있어라” “서로 치료하라” “서로 양보하라” “서로 활력을 주라” 사도 바울은 교회가 이렇게 서로가 함께 하나님의 법의 세우고 서로 함께 협력해 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증거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 하나의 드라마로 우리들에게 나타납니다. 바로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가 서로 받아주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나누고, 안아주고, 용서하고 고맙게 여기고, 서로 함께 영향을 주고, 기쁘게 하고, 서로 유익한 사람이 되고, 서로 필요한 사람이 되고..... 바로 그때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법이 살아나고, 영광의 가문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이 세 사람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양심과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때 어둠의 시대에 말씀의 빛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든든한 삼겹 동아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을 옆과 앞뒤에 있는 세 사람 씩 짝을 지읍시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좌우로 두 번씩 인사합시다. 구호는 “믿음의 삼겹줄이 됩시다.”입니다. “삼겹살이 됩시다”가 아닙니다. “삽겹살을 듭시다”도 아닙니다. “믿음의 삼겹줄이 됩시다.” “사랑의 삼겹줄이 됩시다.” “섬김의 삼겹줄이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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