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7. 예수, 우리의 이웃 – 10. 베레스에서 다윗까지 | 이응도 목사 | 2013-0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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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룻기 4장 18~22절 말씀 제 목 : 예수, 우리의 이웃 - 10. 베레스에서 다윗까지 포도나무를 통해서 ‘Shepherd Life’를 공부하셨던 성도 여러분들은 아마도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하나를 얻으셨을 겁니다. 그것은 성경이 족보에 관련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곳곳에 믿음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또한 ‘베레스에서 다윗까지’ 10대에 이르는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족보일 수 있고, 또 마태복음에서 다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읽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룻기라고 하는 이방 여인의 이름을 딴 유일한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이 족보를 삽입한 것을 보면 어떤 의미가 숨어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룻기라고 하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 한 가정의 역사이면서 한 이방 여인의 믿음과 선택을 기록한 이 성경의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는 족보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경 공부가 좀 될 것 같습니다. 1. 왜 베레스부터일까? 여러분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를 다 아실 것입니다. 어떻게 시작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족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계정개역 성경에서는 ‘계보’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다음 2절부터 어떻게 족보가 시작될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입니다. 여기서 성경 기록의 특이점을 잘 살펴보십시오. 왜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낳았다고 했는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라고 기술했을까요?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했기 때문에 야곱 외에도 다른 아들들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 중에 유다의 형제들의 자손도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한편 이렇게 기록한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유다는 원래 장손이 아닌 넷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르우벤이라는 장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 야곱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실수를 합니다. 야곱의 아내 중 하나였던 빌하와 통간을 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르우벤의 장자권을 뺏습니다. 그렇다면 둘째와 셋째 아들이 장자권을 계승해야 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이 일가를 이루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겜 족속과 큰 갈등을 일으킵니다. 역시 아버지에게 큰 해를 끼칩니다. 자신들의 여동생을 상하게 한 세겜 족속을 잔인하고 악한 방법으로 복수했고, 야곱은 그 지역 많은 족속의 공적이 되어 지역을 떠나야했습니다. 야곱은 그들의 장자권 또한 빼앗습니다. 넷째였던 유다가 결국 장자권을 상속하게 되고, 오늘날 유대인의 조상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만 보아도 족보가 그저 족보가 아닌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다와 그 아들 베레스 사이에도 설명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다말에게서....”라고 기록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37장은 요셉이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팔려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39장 1절에 다시 보디발의 집이 등장하고 요셉에 그 집에 팔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38장은 무엇에 대한 기록일까요? 창세기 38장은 유대인의 조상이 되는 유다의 독특한 가족력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요셉을 판 후에 가족들을 떠나 독립합니다. 가나안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아들들을 낳습니다. 엘이 장성하여 다말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런데 엘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을 죽이십니다. 엘이 죽자 유다는 오난에게 다말과 결혼하여 자손을 이어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오난은 자신이 형수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아봐야 형의 족보를 잇게 될 것이라 생각해서 다말과 동침하되 씨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난 또한 악하게 여겨 죽이십니다. 유다는 당황합니다. 이 며느리가 들어와서 두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셋째까지 죽을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다말을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명분은 셀라가 클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갑니다. 셀라가 장성했지만 유다는 다말을 불러오지 않습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유다가 슬픔에 빠져서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양털을 깎기 위해 다말이 살던 곳으로 가게 됩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다말은 마치 몸을 파는 여인인 것처럼 꾸미고 길가에서 유다를 유혹합니다. 유다는 징표를 주고 다말과 동침하게 되고, 다말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 3절에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기록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의 아내는 ‘수아의 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말의 이름은 이렇게 유다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족보의 시작인 ‘베레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룻기의 족보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가 아닌, 베레스에서부터 족보를 시작하는 것일까요? 또 왜 다윗까지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숨겨진 이야기들 룻기는 사사의 시대를 한 가정사를 통해서 요약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정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17:6과 21:25에 반복하여 사사의 시대를 정리하기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약속의 땅을 떠나서 모압으로 옮겨갔고,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은 기업을 무를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시대에 룻이라고 하는 한 이방의 여인과 보아스라는 한 신실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다윗의 가문으로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족보가 다윗으로 끝났다는 것은 이 책이 사사의 시대에서 왕국의 시대로의 변화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시대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다스리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한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에는 몇가지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18-22) 그리고 같은 족보가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3-6) 룻기는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에는 마태복음에서는 드러나는 숨겨진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 명의 여인들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와 ‘살몬은 라합에게서’와 ‘보아스는 룻에게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와 다말의 관계는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라합은 누구일까요? 예, 여리고성의 기생으로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던 여인입니다. 성경은 유대 정탐군 중에서 살몬이라는 사람이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과 결혼하여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았습니다. 룻기 4장에서 왜 베레스에서 다윗까지를 기록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베레스는 야곱의 장자권을 이어받은 유다의 장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끄러운 장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유다의 삶의 결과가 바로 베레스였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방의 여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과 그들을 아내로 맞이했던 살몬과 보아스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뀌고 인류의 역사가 바뀝니다. 여기서 하나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사의 시대가 약 400년 정도 됩니다. 살몬은 사사 시대의 시작에 있었던 사람인데, 보아스는 사사 시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이에 많은 생략된 계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살몬, 정탐꾼으로 이스라엘의 가나한 정복을 이끌었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의 아내가 되었던 라합 역시 성문에서 여곽을 하는 여인이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듣고 마음을 열었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뒤 바로 어둠의 시대에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보아스에게로 계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사사 시대의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 살았을 것입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룻의 동서 오르바와 같이,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엘리멜렉의 친족과 같이 성경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주목하지 않으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때를 따라 믿음의 사람들은 유다와 베레스로 시작된 그 계보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물꼬를 바꿔놓습니다. 결국 그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시작된 그 계보가 영광으로 끝나도록 하나님의 뜻의 물줄기를 그들의 족보에 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결국 이 족보는 우리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조차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명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처음에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를 잇는 주인공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속의 계승자였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들을 차례로 소개하신 다음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그래, 이것이 이 사람들의 일생이란다. 어떤 인생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떤 인생은 참으로 슬프고 어떤 인생은 부끄럽단다. 그런데 어떤 인생은 참 가치있고 보람되구나. 그래, 너희들은 어떻게 살테냐?” 여러분! ‘베레스에서 다윗까지’의 족보를 하나의 인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기를 원하실까요? 어떤 사람은 언약을 계승하고 있지만 참 수치스럽게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마다 믿음이 사람들이 있어서 새로운 영광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의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베레스가 아닌 다윗, 슬픔이 아닌 기쁨, 수치가 아닌 영광을 주시려고 오늘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 있고, 사랑에 있습니다. 이 족보를 하나의 인생으로 볼 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이 이르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4. 공동체적 관점에서 본 족보 마지막으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이 족보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 족보에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고, 유명한 것도 좋은 일로 유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지 못한 일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사람이 모여 다윗의 계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뛰어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도 언약을 계승합니다. 부끄럽고 추한 역사도 계보에 있습니다.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사람도 언약을 계승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좀 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품은 성도와 교회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지만 한편,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유다는 베레스의 아버지였고,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도 조상이 되며, 모압 여인 룻도 조상이 됩니다. 그들 모두가 함께 다윗의 가문을 만들어가고 예수의 조상이 됩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족보의 계승자이며 조상입니다. 자랑스러운 언약의 계승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부끄러운 언약의 계승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을 계승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지금 좀 연약하게 보여도 그를 통해서도 언약은 계승되며 언젠가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렇게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계보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 좋은 계보의 계승자가 되려는 아름다운 노력을 계속하고, 서로의 연약함에 대해서 관대하여 좀 더 기다리고 좀 더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으로 요약될까요? 오늘도 서로 축복하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좌우에 있는 성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축복합시다. “자랑스러운 믿음의 전승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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