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3. 교회, 세상의 이웃 - 1. 영생이라 묻고 관계라 대답하다. | 이응도 목사 | 2013-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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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누가복음 10:25-37 제 목 : 교회, 세상의 이웃 - 1. 영생이라 묻고 관계라 대답하다. 소위 감자탕 교회라고 불리는 독특한 교회가 있습니다. 감자탕집 2층에서 개척이 되어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빛과 소금’ 즉 광염교회입니다. 조현삼 목사님이 개척하여 지금까지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교회와 성도는 행복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관계에서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목사님이 말하는 행복한 관계의 8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이어서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연약한 것은 도와주라. 2) 필요는 채워주라. 3) 허물은 덮어주라. 4) 좋은 것은 말해주라. 5) 능력은 인정해주라. 6) 가족은 돌봐주라. 7) 이웃은 더불어 살라. 8) 원수는 없애라.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인상적이면서도 재미있는 말 한마디를 남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통하면 이웃이요 막히면 원수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많았습니다. 특히 신앙을 둘러싼 다양한 벽들이 존재했습니다. 유대 사회 자체가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각 종교적 파벌들과 정치적 집단들이 각자의 입장과 이해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늘 희생당하고 핍박받는 것은 유대 백성들이었습니다. 한편, 갈릴리 지역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던 청년 예수는 당연히 유대 사회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무엇을 말하고 누구와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정신적, 종교적 지주의 역할을 하던 바리새인들은 큰 관심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접근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눈이 비친 그들의 모습을 몇몇 장면을 통해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왜 너희들의 선생은 더러운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헌금을 하는 바리새인도 보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소득에 대해 십일조를 마치고 온갖 명목의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자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랩돈이라는 작은 헌금을 하는 한 과부를 주목하시고, 그 과부의 헌금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악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있는 한 세리를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받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장벽을 쌓다. ‘장벽’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과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을 바라본다면 뚜렷한 대척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민중들과 자신들 사이에 벽을 높이 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민중들과 다르며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그랬고, 성전에서 그랬고, 거리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유대 민중들과 자신들 사이에 담을 쌓고 자신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 놓여있던 부와 신분과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허물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은 복음과 은혜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지만 복음은 그 장벽을 넘어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에서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영생’이라는 신학적인 주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25절에는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다고 했고, 29절에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고, 또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고 했을까요? 먼저 그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험을 위한 질문입니다.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구원과 생명에 관한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 즉 바리새인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하심을 입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 바리새인의질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과 자신들 사이에 있는 분명한 장벽을 드러내고, 그 장벽을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높이 쌓으려는 것입니다. 2. 다시 장벽을 쌓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26절에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바리새인은 그가 알고 있는 말씀과 신학적 해석에 근거하여 당당하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바리새인의 대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도 이 대답을 지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8)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원래 바리새인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군중들 사이에 장벽을 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하고 보며 뭔가 이상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예수님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유대 민중들을 늘 무시했고 정죄했고 멀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이웃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가 믿고 해석하는 바로는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바리새인과 이웃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 싼 군중들의 시선에서 바리새인은 무엇인가 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은 그의 두 번째 질문의 의도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고백한 신학적 논리에 의하면 자신은 영생에서 제외되어야 하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바리새인은 자신을 방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 아니 자신이 이 사람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기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적어도 이런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그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은 참으로 위험했습니다. 도시에 살던 민중들이 삶이 어려워지면 쉽게 범죄하게 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 싫어서 유대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비적이 되어 산과 골짜기, 메마른 들판에 머무르면서 나그네들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나안 동쪽 요단강을 따라 안전한 길로 돌아오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를 이어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곧장 가서 장사를 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어느 고등학교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고, 어느 쇼핑 몰에 강도가 들었다더라는 이야기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던 장사꾼이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겨 죽었다더라는 이야기도 그리 드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하나를 가져와서 바리새인에게 들려줍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갑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 사랑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바리새인의 믿음과 신학에 의하면 그들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그 역시 나그네입니다. 그 역시 강도의 위험 앞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돕기로 결정합니다. 그를 치료하고 그 이후의 일까지 함께 책임을 집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바리새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이 질문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를 물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이웃과 담을 쌓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내 이웃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내가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헌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다릅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것처럼 피폐하고 열악한 삶을 살고 있는 이 가난한 민중들의 이웃이 되고 있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레위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강도 만난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 역시 오랫동안 율법을 가르쳐왔지만 정작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르쳤지만 강도 만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해 높고 두터운 담을 쌓아두고 비난하고 멸시하기만 했습니다. 바리새인 자신이 생각해도 아닙니다. 그 비유를 함께 듣고 있는 유대 민중들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중들이 그들의 이웃이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민중들에게 담을 쌓고 이웃되기를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종교 귀족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강도 만난 삶을 사는 민중들의 이웃이 되어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인도해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거친 광야와도 같은 인생길에서 쓰러져서 죽어가고 있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던 장벽을 허물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은 증오와 미움의 장벽 또한 허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회복하는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웃이 되셨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장벽이 아닌 다리를 놓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관계를 이 세상이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던진 질문 -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 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누가 장벽을 허물고 이웃이 되었느냐?” 4. 영생이라 묻고 관계라 대답하다.
지난 12월부터 저와 여러분은 룻기를 통해서 ‘예수, 우리의 이웃’이라는 주제로 열 번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이번 주부터는 ‘교회, 세상의 이웃’이라는 주제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첫 번째 말씀의 제목은 “영생이라 묻고 관계라 대답하다.”입니다. 바리새인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관계로 대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 영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영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무엇도 영생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까? 예, 사람의 능력으로는 아무도 영원한 생명이 이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영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이 이웃을 사랑함으로 영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 영생으로 들어가는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생의 열매에 가깝습니다. 영생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장벽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하는 다리가 되십니다. 또한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장벽이 없습니다. 신분도, 성도, 재물이나 명예도 영생얻는 것이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가진 작은 차이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조금 더 의롭게 산들, 내가 조금 더 부자로 산들, 내가 조금 더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들 도대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앞에서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은 사람의 삶의 증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라!”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관계의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순종했습니다. 그 또한 유대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요, 그 또한 강도의 위험 속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받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러한 선택과 삶을 영생 얻은 자의 삶의 증거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조현삼 목사님의 관계 복음의 결론이 기억나십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 통하면 이웃이요, 막히면 원수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잘 통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가로 막는 장벽은 없습니까? 그 장벽은 때로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숨어있기도 하고, 때로 교만으로 가장하기도 하고, 때로 질투와 시기의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때로 죄책감과 열등감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타나고, 때로 무관심과 냉정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서로의 선한 이웃됨을 가로막는 장벽, 우리를 서로에 대해 원수되게 하는 장벽은 없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함께 세상의 이웃이 되어 복음으로 강도 만난 세상을 섬기는 일을 가로막는 장벽은 없습니까? 나도 어렵고, 나도 힘들고, 나도 가난하고, 나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끼리나 좀 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민 교회는 뭔가 내게 유익을 주고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야지 왜 내가 세상을 섬기느냐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가서 너도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라!”고 권면하십니다. 그것이 영생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영생 얻은 성도라면 이 말씀이 동력이 되어 새로운 삶을 결단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서로를 축복하며 또 서로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면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렇게 축복하고 이렇게 약속합니다. “당신의 나의 참 좋은 이웃입니다. 나도 당신의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이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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