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10. 교회, 세상의 이웃 - 2. 내가 변해야 됩니다. | 이응도 목사 | 2013-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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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누가복음 10장 25-37절 제 목 : 교회, 세상의 이웃 - 2. 내가 변해야 됩니다. 얼마 전에 인디언 원주민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황성기 선교사님으로부터 기도를 부탁하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지난 해 직접 현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인디언 보호구역에서의 원주민 사역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황선교사님은 보호 구역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선교사님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리조나 광야의 모래바람, 쓰러져가는 인디언 원주민 교회당, 끝이 보이지 않는 거친 비포장 도로... 뭐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기도를 부탁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함께 인디언 사역을 하는 Indian Bible College와 스탭들 때문이었습니다. Indian Bible College는 195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백인으로서 인디언 선교를 하는데 한계를 느낀 선교사들이 원주민 지도자를 양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선교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는데 동의하여 세운 신학교입니다. 지금은 약 20명 정도가 동역하며 인디언 원주민 사역자를 양성하고 원주민 교회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가 주장하는 선교학의 모델은 ‘성육신 선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오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인디언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삶이 되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학교를 섬기는 Staff들이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원칙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백인 우월주의’입니다. 그것은 지난 50년 간 수많은 미국 교회가 신학교를 후원하고 원주민 사역자를 양성하는 일을 도왔지만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우월의식, 인디언들에 대한 멸시와 비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속에 있는 미국 교회가 인디언의 역사에 대해 인정해야 할 부채를 외면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생활 습관, 문화적인 후진성, 생활에 젖어 있는 무속신앙 등을 지적하며 신학생들을 인디언의 얼굴을 한 백인으로 만들어내려 합니다. 그 결과, 믿음과 사명감으로 신학을 시작했지만 실망과 분노로 포기하는 신학생들이 많습니다. 학교를 나간 그들은 원주민들의 무속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된 이단에 빠지기도 하고, 과거의 무질서한 생활로 돌아가기도 하고, 백인 중신의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선교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황선교사님은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자신들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동료 선교사들에 대해 점점 지쳐간다고 말합니다. 인디언 원주민들과 그들의 교회가 비성경적이며 건강한 신학 위에 있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원주민 교회가 왜 신학교와 거리를 두는지, 신학교가 오랫동안 헌신하고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원주민 선교지도자가 양성되지 않는지, 왜 많은 원주민 신학생들이 중간에 실망과 분노를 가지고 학업을 포기하는지, 결과적으로 왜 선교가 안되는지에 대한 갚은 고민과 반성이 없는 현실을 아파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보이십니까? 황선교사님과 함께 일하는 신학교의 Staff들은 모두 선교를 위해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미국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안전한 삶을 내려놓고 인디언 원주민 사역에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백인 우월주의라고 하는 분명하고 명백한 비성경적인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우리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성경과 찬송가 맨 뒤편에 보시면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항상 십계명을 요약하는 두 가지 강령이 있습니다. 이 강령은 마태복음 22장 35-40절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을 때 각 정파가 와서 예수님은 시험합니다. 헤롯 당원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질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진짜 부활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그 대답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5-40)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성기에 갈릴리 지역에서 주신 말씀이라면, 마 22장의 말씀은 사역 말기 예루살렘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과 예수님의 말씀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을 요약하면서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먼저 질문이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에 대한 대답이라면, 마태복음에서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대답이 다릅니다. 눅 10장의 바리새인은 이 두 가지가 마치 분리된 것처럼, 각각 다른 내용의 두 개의 계명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은 곧 하나의 계명이라 말씀합니다. 크고 첫째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둘째는 그와 같습니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은 나에게 적용할 때 능력이 됩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리새인이 옳습니까? 예수님이 옳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각각 다른 계명입니까? 결국 하나의 계명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한 답을 이미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15편인데요, 그들은 이런 시들을 찬송으로 만들어서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으로 들어갈 때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 15편) 이 시편은 바리새인의 질문에 답을 줍니다.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하고 2절부터 대답할 때 각 절의 초점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품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디 시편 15편 뿐이겠습니까?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는 계명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시편 15편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 시편을 날마다 외우고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하고, 그들의 눈앞에 있던 이웃조차도 외면하면서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구란 말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일까요? 왜 그들은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영생을 논하고, 그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를 논하며, 진리이신 예수님께 진리를 논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보고 외우며 연구하되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이 우리의 삶에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말씀 한절 한절이 나의 삶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했지만 정작 자신들을 돌아보고 적용하고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근거는 되었을지언정 그들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3. 당신은 이웃이 된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 앞에서 영생을 묻는 이 바리새인은 무엇이라 질문하는 것이 옳습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라고 고백해 버린 이 사람, 이 바리새인이 지금 해야 하는 질문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 사람들이 내 이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지 않은 것이요, 나는 섬기고 나누며 사랑하는 이웃이 따로 있습니다.”라면서 변명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우쳐주셨군요. 말씀에 비추어보니 나는 이 사람들의 이웃이 아닙니다. 아니 한 번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웃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살았고 나는 나를 위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율법을 지켰고, 나는 강도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내 이웃들을 늘 외면하며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말씀의 홍수 속에 삽니다. 아직 제가 추억하는 것 중 하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부흥 사경회를 할 때입니다. 교단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을 초청하고 한달 전부터 벽보를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만들어진 것에다가 매직으로 글을 써서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학생들이 모여서 포스터를 그려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걷고 또 걸어서 온 동네, 옆 동네까지 전신주와 담벼락에 붙였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부흥 집회에 자리가 차고 넘쳤습니다. 적어도 80년대 초반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무리 부흥 사경회를 해도, 대단한 강사가 온다고 해도 모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의 홍수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내게 멀리 있어서 내가 순종하지 않거나 믿을 수 없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근거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나를 위해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 나는 이웃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입니까?”라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비유를 주신 후에 그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말씀은 나를 향해야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4. 말씀을 들고 주님 앞에 섭시다. 올해 여름 Indian Bible College에서 미주 한인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아메리칸 인디언 선교 비전 컨퍼런스"를 엽니다. 이번 컨퍼런스의 목적은 많은 미주 한인 교회들이 인디언 선교를 이미 시작했거나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백인 교회들이 걸어온 잘못된 길을 벗어나서 바르고 건강한 인디언 선교의 모델을 함께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성육신 선교를 주장하지만 원주민 교회와 동화되지 못했고, 원주민을 노란 얼굴을 한 백인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잘못된 길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처럼 되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처럼 되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신학이 없어서,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육신 선교를 주장했지만 말씀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인격과 관점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초대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참 안타까운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평생 믿고 연구해온 말씀을 들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그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알고 믿어온 말씀에 의하면 그는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얼마나 가슴 치며 땅을 치며 후회스러울까요? 그래서 “가서 너도 그와 같이 살아라!”라는 말씀은 이제 그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가 주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살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자신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 말씀들을 자신이 먹을 때, 자신에게 적용할 때, 자신의 변화를 위해 말씀을 사용하고 말씀대로 살기 시작할 때 말씀은 그에게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고 길이 되고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섰다고 합시다. 내가 평생 알고 믿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한 손에 들고, 또 내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한 손에 들고 있다고 합시다. 우리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주님이 우리의 한손에 들린 말씀과 다른 손에 들린 삶의 여정을 받아들고 둘을 맞춰보십니다. 잘 맞을까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은 뭔가 맞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크게 당황하고 크게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말씀과 삶의 여정을 들고 서기 전에 먼저 이 시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아닌, 돌이킬 수 없을 때가 아닌.... 아직 우리에게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말씀이 다른 그 어떤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적용되고 나에 대해 살아 있는 말씀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요, 내가 걷고 있는 길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옆에 있는 두 분과 손을 잡아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다짐을 해 봅시다. “제가 먼저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제가 먼저 변화되겠습니다.” 아멘입니까? 예,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적용될 때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날마다 변화와 성장의 삶을 사는 초대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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