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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7. 교회, 세상의 이웃 - 3. 지금 이곳에서 이웃이 되다. 이응도 목사 201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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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7.

 

본 문 : 누가복음 1025-37절 말씀

제 목 : 교회, 세상의 이웃 - 3. 지금 이곳에서 이웃이 되다.

 

저희 교회 성도 가운데 필라델피아 지역 한인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인지 교회 일에는 그리 열심이지 않습니다. 가끔 사업체에 심방을 할 때면 저는 그분에게서 필라델피아와 주변의 한인 단체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몇 년 전에 그 분이 제게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주셨습니다. 그날도 한동안 교회 출석을 하지 못한 그 분의 가게에 들렀습니다. 마침 그때 한인회에 좋지 못한 일이 있었고, 그 성도는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워낙 말씀을 거칠게 하는 분이어서 대놓고 여러 사람들의 잘못을 설명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알고 있는 몇 분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말로 목사님들의 실수와 잘못들을 비판하다보니 좀 미안했던 것 같습니다.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 그래도 그분들은 필라델피아 사람들이니까...라는 말을 했습니다. 갑자기 필라델피아 사람이기 때문에 대충 용서가 된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제게는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필라델피아 사람이니까....라는 말의 의미가 뭐냐고 말입니다. 그 분은 꽤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오랜 이민 생활의 경험으로 볼 때 필라델피아와 주변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들은 딱 두 가지로 갈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목사들입니다. 그런 목사들은 이 지역에서 이민 목회를 해도 늘 마음은 한국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큰 교회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이 지역의 이민 교회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필라델피아 사람으로 살아가는 목사들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으로 가고 싶어도 불러주지 않아서 못가기도 하고, 정말 이민 목회에 사명을 가지고 삶을 바쳐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목사들은 분명히 이 지역에 깊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고, 따라서 필라델피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인회와 관련해서 실수를 했던 그 목사님은 이 지역에 30년 이상 살아온 분이고 필라델피아 한인회를 조직할 때부터 오랫동안 관여해 왔다고 했습니다. 많은 잘못이 있고 원망도 듣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이곳을 떠나지도, 떠날 수도 없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물론 목회도 어려운 상황이고 사람들의 인심도 많이 잃었지만 한인회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은 큰 교회, 잘난 목사님들보다는 필라델피아에 뼈를 묻을 바로 그런 목사님들과 계속 일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야기의 끝에 제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떤가요? 필라델피아 사람인가요? 아니면 한국으로 갈 사람인가요?” 그분, 저희 교회 교인으로 등록한 그 성도가 담임 목사인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필라 사람 아니예요. 필라 사람이 되려면 필라를 떠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필요해요. 그런데 목사님, 솔직하게 말씀해보세요. 여기서 목회 성공하시면 한국으로 가실 거 아닌가요?”

 

1.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두 단어

 

물론 그 분의 생각이 옳은 것도 아니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민 교회와 목회자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교회와 목회자의 시대성과 지역성, 즉 복음의 현장성에 관한 것입니다.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다양성혹은 다원화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조류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관계 중심의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실험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셀교회 등이 대안으로 나오는가 하면 온라인에서 형성된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리고 우리 주님 오시는 날까지 교회는 지역성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 교회가 존재하는 지역과 깊은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지역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가 되며 지역의 아픔이 교회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천국을 말하고 신앙을 말하고 구원을 말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역의 문제와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성도로 모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아픔과 고통, 상처와 눈물에 무관심한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교회와 성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와 교회는 그 지역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고 그들을 섬겨야 하고 그들과 소통하며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한 지역성과 시대성을 다양한 관계를 통해 획득하게 될 때 바로 그곳에 선교의 현장이 되고 복음이 뿌리는 내리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그 성도의 가게에 들러서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직도 제가 필라 사람이 덜 되었나요?” 그 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하하... 이제 절반 넘었습니다. 거의 다되어가는 것 같네요.”

 

필라 사람 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15년간 살고 있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좋은 이웃되는 일도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나의 이웃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슴과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좋은 이웃으로 이 지역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들의 마음에 고인 눈물과 삶에 생긴 상처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눈물 흘리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며 대답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2.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배하는 일이 직업인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말씀을 연구하며 경건과 거룩을 훈련하는 일이 직업인 또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질문과 예수님이 대답으로 들려주신 이야기에 의하면 그들 중 그 누구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강도만난 삶을 사는 연약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선한 이웃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경건과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족을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예배와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우리 교회는 참 열심있는 교회입니다. 지난 수요일 손영준 목사님이 포도나무 헌신 예배 강사로 오셨다가 저와 말씀을 나누는 중에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이목사, 참 용감하네... 어떻게 매주 목장을 모이면서 또 매주 포도나무를 같이 하지? 목장 하나만 하기도 힘이 들테고.... 포도나무 소그룹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그러면 도대체 성도들이 일주일에 몇 번 모이는거야?” 그래서 제가 저희 교회의 소그룹에 대해 설명을 좀 드렸습니다. 우리는 목장으로 모이고 포도나무로 모입니다. 그 중에는 책나무로 모이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화요일과 금요일에 두 번씩이나 탁구를 치러 오는 성도들도 있고, 주일에는 기타와 플롯을 베우는 팀도 있습니다. 조만간에 영화를 함께 보고 토론하면서 현대 문화에 관한 안목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팀도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많이 모이고 열심히 하고 서로 즐거운 모임을 만들어가니까 좋습니까? , 여러분이 제게 묻는다면 저는 참 좋습니다. 제가 참 좋은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약간은 마음이 편치 않은 그 무엇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다소 위험한 경계선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3. 이것이 예배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바리새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요 거룩과 경건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 급히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바삐 강도만난 이웃을 지나치고 난 다음 과연 무엇을 할까요? (과연 소고기나 사묵을까요?) 그들은 아마도 생활처럼, 습관처럼,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예배할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의 종교적인 삶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을 암송하며 경건과 거룩을 연습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 그 예배를 받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약의 여러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있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예배도 있습니다. 어떤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실까요?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1-17)

 

예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자의 삶이 중요합니다. 시편 51편에서는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돌이킴, 참된 회개가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51:16)

 

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키셨을까요? 그들은 모두 예배 전문가들, 말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대로 예배하고 순종하고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그들의 옆에 존재하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웃을 위해 공평과 인애와 정직의 삶을 살지 않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이웃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적 행위로서의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4. ‘가서너도 그와 같이

 

반면 시편 4:550:14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고백합니다. 그 제사는 감사로 드리는 제사이며 의로운 삶을 바탕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편 4: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편 50:14)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특히 호세아 6:6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사와 경건을 직업으로 삼는 당시 종교인들에게 반드시 들려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이 순간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실천하는 성도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내가 나중에 제사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지금 내 곁에 신음하며 누운 사람을 지나쳐가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 나의 삶의 터전에서 공평과 인애와 자비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터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그 무엇을 제물로 삼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제물로 드려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가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하나님께 장차 예배하기 위해 현재 네 옆에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자신도 강도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이웃을 섬기고 헌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는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서로에 대해 좋은 이웃입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좋은 이웃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구원의 놀라운 은혜가 내 일상의 삶을 통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습니까? 오늘도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인사하고 이렇게 약속해 봅시다.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 “지금 당신의 선한 이웃으로 살겠습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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