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24. 교회, 세상의 이웃 - 4. 원수의 세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다. | 이응도 목사 | 2013-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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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누가복음 10장 25-37절 말씀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윌리엄 골딩의 작품으로 20세기에 발간된 최고의 영어 소설 100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청소년기 자녀들에게 읽히면 좋은 소설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두 차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암울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핵전쟁이 예상됩니다. 영국인들은 일단의 소년들을 선발하여 남태평양의 섬으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남태평양으로 가던 비행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기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까지 포함된 소년들은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게 됩니다. 그들은 먼저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습니다. 랄프라는 한 지혜로운 소년이 대표가 됩니다. 랄프는 구조될 때까지 질서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 여러 규칙들을 정합니다. 물론 아이들의 규칙이라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년들 중에는 잭이라는 대장이 되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사사건건 랄프와 대립합니다. 결국 잭은 랄프의 편에 서 있던 소년들을 자기 편으로 모으게 되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랄프는 소년들의 무리에서 추방되어 생명의 위협 속에서 쫓깁니다. 랄프가 잭의 무리들에게 잡혀서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어른들의 배가 섬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1954년 발표된 이 소설은 당시 유럽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혼란과 두려움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었던 유럽 사회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적으로도 인간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절망적인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문학을 비롯한 예술도 인류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전망하고 있었습니다. 작가인 윌리엄 골딩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제한된 등장인물을 통해서 인간이 가진 본성은 과연 무엇이고, 그런 본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희망은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해볼까요? 여러분은 만일 이런 상황 속에 빠지게 된다면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할까요? 함께 불행을 당한 모든 사람들을 서로 위로하며 구조될 때까지 평화롭게 살아갔을까요? 아니면 이 소설 속의 소년들처럼 서로 원망하며 싸우며 죽이게 될까요? 소설에서 소년들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집단적인 광기와 권력에 대한 욕구, 그리고 야만성을 잘 보여줍니다. 전쟁이라는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 그들이 탔던 비행기가 격추당하는 공포스러운 경험, 그리고 구조되지 못할 것 같다는 암울한 현실.... 그 속에서 소년들은 서로 협력하고 돕고 위로하기보다는 적을 만들고 권력을 형성하고 서로를 죽이는 일을 합니다. 서로 돕는 ‘이웃’이 되기보다는 서로 죽이는 ‘원수’가 되는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년들이 선택한 세상이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1. 원수의 세상에서 살아가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모든 비유에는 그 비유가 설정하는 특별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도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당시대의 사회적 상황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의 세상은 참혹합니다. 강도 만난 세상, 강도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불의한 자가 성공하고, 악한 권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나 삶의 결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상처받고 쓰러져 죽어갈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는 나그네요, 다른 하나는 강도들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기본 배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두 종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쓰러져 누운 사람을 외면하고 돌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배 의식을 담당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인생 자체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선택하거나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면서 사마리아인입니다. 나면서부터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혼혈 정책에 의해 피가 섞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돕습니다. 자신도 강도 만난 불행한 인생으로 살면서 더 불행한 사람의 이웃으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실 앞에 등장한 두 종류의 사람들, 강도와 강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 비유의 기본 배경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특성, 즉 강도 만난 세상을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사람들은 ‘강도 만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두 번째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 ? ‘지나가는 사람들과 돕는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비유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삶 중에 하나를 살아가고 있거나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두 가지 관계 - 원수와 이웃 여기서 우리는 잠시 누가복음에서 소개하는 ‘관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두 개의 편지를 로마의 관리였던 데오빌로에게 보냈습니다. 그 첫 번째 편지는 누가복음이요, 두 번째 편지는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첫 번째 편지인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하셨던 두 가지 대조되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원수’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두 번째 단어는 ‘이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역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두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원수를 사랑으로 섬겨서 이웃으로 만드는 사역입니다. 원수가 가득한 세상에 이웃으로 오셔서 이웃의 아름다운 관계를 전파하는 사역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는 단순하게 ‘선한 이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이웃의 관계가 누가의 두 번째 편지인 사도행전에서는 어떤 관계로 표현되었을까요?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서로를 섬기는 이웃이 되는 사람들을 특별한 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속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 원수의 세상 가운데 세우신 이웃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게 형상화된 현장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원수의 세상에서 주님이 세우신 이웃의 관계, 교회입니다. 3.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다시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이 비유의 핵심은 바리새인의 예수님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질문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소개한 파리 대왕이라는 소설에서 소년들은 지극히 제한된 시간과 공간, 제한된 수의 사람으로 구성된 한 사회를 만듭니다. 그 사회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모두가 불행에 처했으므로, 다른 표현으로 하면 모두가 강도를 만났으므로 서로를 돕고 섬겨서 함께 구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서로를 적대하고 핍박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외딴 섬에 표류하게 된 것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그 속에서 보다 많이 가지고 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구로 서로를 원수처럼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당시 유대 사회는 과연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그들의 조상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저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준 것은 ‘식민지의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식민지의 아들과 딸로 태어났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신분과 가난이 대물림됩니다. 그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불행이 겹치고 또 겹쳤습니다. 이제 그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를 섬기고 돕는 삶을 살 것인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된 것에 대한 분노와 현실적인 삶의 필요와 그 속에서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욕구로 서로를 적대하면서 살 것인가?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이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강도가 아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아!”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딱 두 가지 관계만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도 만난 세상에서 이웃이 아니면, 원수입니다. ‘원수’라는 말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예, 원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를 원수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이 사람들은 나의 이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원수입니다. 그들이 율법사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사 자신이 쓰러져 신음하는 유대 민중들에 대해 이웃이 아닌 원수의 삶을 선택하였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이웃의 삶을 선택하라! 예수님께서 당시대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비유 속의 세상을 강도 만난 원수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나도 원수로 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원수의 삶을 거부하고 이웃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먼저 원수의 삶이 아닌 이웃의 삶을 선택하는 본을 보이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웃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세상에서 이웃으로 살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웃의 삶이 무엇인지 직접 삶으로 보여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친히 이웃이 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원수의 세상에서 이웃됨을 회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다른 말로 하면 “누구든지 나처럼, 원수의 세상에서 원수로 살지 않고 이웃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원수로 살기는 참 쉽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대로 살면 됩니다. 내 욕심과 욕구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이웃으로 살기란 참 어렵습니다.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를 희생해야 합니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합니다. 때로는 손해를 받아들입니다. 때로는 나의 시간과 재정과 사람과 관계를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의 삶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자, 이웃의 삶을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십니다. 이 권면은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고, 유대 군중을 향한 것이고, 오늘날 모든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자, 설교 중에 중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서로 이웃이 되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에는 무엇으로 불린다고 했습니까? 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를 이웃 삼아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세우신 새로운 관계,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 자신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입니다. 희생할 줄 알고 헌신할 줄 알아서 교회입니다. 원수의 세상을 이웃으로 사랑할 줄 알고, 원수의 세상 속에서 이웃의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과 저, 우리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예, 우리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원수의 세상에서 이웃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원수를 섬겨서 이웃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합니까? 바로 교회, 여러분과 저,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도 위험하고, 나도 힘들고, 나도 두렵지만... 나는 담대하게 나를 부인합니다. 나도 가진 것 없고, 나도 연약하지만 담대하게 나의 시간과 재정과 삶을 희생합니다. 원수된 세상에서 이웃됨의 참된 가치를 모르고,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우리를 이웃 삼아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이웃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아주 간단한 원리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자, 오늘도 손을 잡고 옆 사람을 보십시오. 옆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혹 부부끼리 손을 잡은 분들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보십시오. 원수입니까? 이웃입니까? 여러분 옆에 앉은 성도들은 여러분의 원수입니까? 이웃입니까? 이웃입니까? 정말입니까? 가장 가까운 이웃, 한 가정을 섬기도록 허락하셨고, 한 교회를 섬기도록 허락하신 참되고 좋은 이웃이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원수의 세상에서 하나님이 맺어주신 참 좋은 이웃입니다. 우리 서로에 대해 인사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이웃입니다. 내가 당신의 선한 이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웃 삼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웃입니다. 원수된 세상에서 이웃으로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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