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3. 교회, 세상의 이웃 - 5. “네 가지 얼굴” | 이응도 목사 | 2013-03-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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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누가복음 10장 25-37절 말씀 제 목 : 교회, 세상의 이웃 - 5. “네 가지 얼굴”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곱 개의 비유를 차례로 소개합니다. 그 중 첫 번째 비유는 소위 ‘마음 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마음 밭이 있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과 옥토입니다. 농부가 각각의 밭에 씨를 뿌렸지만 길가 밭처럼 아예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돌에 뿌리가 막혀서 말라버리기도 하고, 가시밭처럼 먼저 심겨진 가시들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들고 ‘나는 무슨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일까...?’ 하고 고민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은 아니고.... 뭐 대단하지는 않아도 옥토일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딱 그 정도로만 이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이 비유가 가진 본래의 능력을 내 삶에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나머지 여섯 개의 천국 비유의 배경이 됩니다. 다른 비유들은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로 시작하지만, 이 비유는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에서 주목하는 것은 씨가 아닌 씨가 뿌려진 밭, 즉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네 가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은 네 종류의 사람들의 각각 다른 마음일 수 있습니다. 아예 복음을 거부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믿는 척 만하는 사람도 있고, 내 안에 먼저 심겨진 사상이나 욕심들이 너무 많아서 복음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네 번째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 안믿는 사람으로 갈라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한 가지 마음만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옥토같은 마음으로 살지만, 또 어떤 때는 마음과 귀를 아예 닫고 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잘 순종하지만 어떤 때는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이 꿀처럼 달다가도 또 어떤 때는 내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성품, 나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말씀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의 밭은 각각 다른 네 종류의 사람이 아닌 나 한 사람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네 가지 마음 밭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는 여러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은혜 받았을 때, 영적으로 건강할 때, 내가 지극히 동감하는 말씀을 만났을 때, 그 말씀이 나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처럼 느낄 때 나는 마치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상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말씀을 거절합니다. 그 말씀은 내 말씀이 아니라고 외면합니다. 어떤 때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도입니다. 내 마음의 밭에는 고르게 흙이 뿌려져 있고, 복음의 씨가 쉽게 뿌리를 내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 성격 있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이 돌덩이들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복음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보나 나의 성품과 기질과 상처와 가치관을 지키기로 마음먹습니다. 혹은 이미 내 삶에는 먼저 심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미래가 늘 불안한 것 같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염려스럽습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고,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재정을 염려합니다. 안정된 재정이 안정된 삶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달라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좋은 성도이자 충성된 일군입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참 연약하고 또 악합니다. 나 한 사람 안에 여러 가지 마음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1. 그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저의 이런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도 같은 고민을 하십니까? 그러나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약하고 비겁한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살겠다고 아내를 두 번 버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뤄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하갈이라는 첩을 두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낳은 여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이삭을 낳은 후에 매몰차게 광야로 내몰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 중 한 사람인 야곱은 어떻습니까? 과연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을 들을 만한 사람일까요?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성품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새 나라의 지도자로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는 어쩌면 인생의 실패자가 아닐까요? 베드로는 어떠하며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우리가 배웠고, 그들의 수고와 눈물의 유산은 우리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들에게 가끔 뜻밖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들의 연약한 모습들을 잊지 않고 우리들에게 전했습니다.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그들 인생의 참 모습, 그들의 진짜 얼굴은 과연 무엇일까요? 거룩하고 경건한 얼굴이 그들의 참 모습일까요? 비겁하고 나약한 얼굴이 그들의 참 모습일까요? 혹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을 없을까요? 2. 비유를 통해 인생을 보다. 오늘 본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강도들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이 네 사람 중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강도는 아닐테고... 그렇다고 이렇게 멀쩡한데, 강도 만난 사람도 아닐테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아니고...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그런데 딱히 그렇다고 하기에 뭔가 양심에 걸리는 것 같고... 아마 대부분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비유는 당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그림은 분명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감당해야 할 역할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각각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 사람을 보실까요? (달라졌어요. 2012년 8월 7일 방송분 / 38초~4분 56초) 자, 여러분! 이 부부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으로 넣어 보실까요? 누가 가해자일까요? 누가 피해자일까요? 누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방관하고 있을까요?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있나요? 답은 뭘까요? 예, 이 두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피해자이며, 가해자이고, 서로에 대해 방관자이며, 서로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그렇습니다. 서로 좀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함부로 말하고 남편을 외롭게 하는 아내도,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통솔력이 부족한 남편도 다 할 말은 있습니다. 모두가 가해자니며 피해자이고 방관자이며 선한 이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성도들도 그렇고 우리들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3.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답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가지 천국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비유에 씨 뿌리는 비유를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습니다. 가라지와 함께 자라며, 겨자씨와 같고, 가루에 넣은 누룩과 같고, 밭에 감춰져 있는 보화와 같고, 값진 진주와 같으며, 좋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의 복음이 바로 옥토와 같은 사람의 마음에 떨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그 씨가 뿌려지는 밭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그렇게 부족하고 비겁하고 변덕 심하고 연약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 바리새인은 자신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영생을 얻는 삶’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그의 마음에 이미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대 강령’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가 밭과 같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 다시 그 법을 확인해도 그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돌덩이와 같은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기득권, 자신이 이미 획득한 유대주의자로서의 지식과 신분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의 삶 속에는 먼저 심겨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주신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라”는 강력한 명령인 것입니다. 4. 가면을 벗고 새얼굴로 만나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와 교회의 삶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으십니까? 우리도 가서 그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교회와 성도의 마음이 옥토와 같아야 한다고 믿으십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해야 한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새로운 얼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때로 강도의 얼굴, 때로 강도 만난 나그네의 얼굴, 때로 외면하고 지나가는 직업적 종교인들의 얼굴로 서로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혹이 우리는 “살다보면 어쩔 수가 없어...” “타고난 성품이 그런 걸 어떻해....”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 이런 말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 아픔을 남기는 행동들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변명들... 믿는 것과 다르게 살 수 밖에 없다는 다양한 변명들로 우리를 합리화하거나 방어하지는 않습니까?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마리아인으로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너무 좋지만 그 말씀대로 살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이 아닌 지나가는 사람으로 살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의 가장 큰 피해자로 스스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교회가 나를 인정해야 하고 나를 도와야 하고 나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강도를 만난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를 강도 만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으로 무장하고서, 일어서서 걷고 뛰어야 할 인생에 늘 쓰러져서 도움과 이해를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때때로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 서로를 만나며, 때때로 서로에 대해 잔혹하고 처절한 가해자로 만나며, 때때로 너 때문에 내가 상처받았다고 원망하며 쓰러져 살아갑니다. 복음이 우리의 마음에 씨 뿌려져서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것이 아니라, 새들에게 먹히고 우리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거절당하고 염려와 욕심에 치여서 자라기도 전에 시들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생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가 서로 만나야 할 생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예수님은 영생을 원하는 한 율법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원한다면 먼저 너의 얼굴에 가면을 벗어라. 가해자의 얼굴이 아닌, 피해자의 얼굴도 아닌,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도 아닌, 성도와 교회의 생얼이 되게 하여라. 구원의 은혜로 충만한 얼굴, 사랑으로 섬기는 얼굴이 되라. 이것이 내가 창조한 성도와 교회이 생얼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원수의 세상에서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이웃으로 사는 법을 아시겠습니까?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포악함과 비겁함과 이기적인 마음을 물리치고 말씀이 인도하는 용맹한 삶을 살아가시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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