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17. 교회, 세상의 이웃 - 6. 끝까지 사랑하다. | 이응도 목사 | 2013-03-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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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말씀 제 목 : 교회, 세상의 이웃 - 6. 끝까지 사랑하다. 여러분은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하면 어떤 음악을 듣습니까? 사실 저는 클래식에는 문외한입니다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으면서 몬순의 장대비가 쏟아지는 하이웨이를 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음악가라고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밖에 모르는 제가 당시에 라흐마니노프의 CD를 가지고 여행을 한 이유는 한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호르비츠를 위하여’라는 영화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반 3악장이 감동적으로 소개됩니다. 그 영화를 통해서 가끔 비바람이 불 때, 혹은 날씨가 눈부시게 쾌청할 때 아무 음악이나 다 좋지만, 클래식도 참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시애틀에서 있었던 이민교회 성장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몇몇 목사님과 차를 같이 타고 다녔습니다. 그 목사님들과 제가 서로가 딱 맞아 떨어진 취향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운전하면서 듣는 음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시애틀 날씨가 좀 흐리고 우울합니다. 그래서인지 고 김광석의 노래가 정말 분위기에 맞았습니다. 삼나무가 우거진 안개 자욱한 숲길을 달리면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서른 즈음에’ ‘흐린 가을 하늘엔 편지를 써’ ‘이등병의 편지’.... 이런 노래를 목사들이 다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왜 목사들이 찬양을 듣지 않았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때로 유행가가 마음에 닿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노래들을 듣고 따라 부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랑이란 참 어려운 일이구나...’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일, 한번 약속한 사랑을 변함없이 지키는 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일, 낙심과 실망을 이기고 사랑에 성공하는 일은 여러분에게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꼭 남녀만의 사랑만을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편적인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사랑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실패하고 있습니까? 사랑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미 사랑에 다치고 멍들어서 이제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딱딱하고 굳은 방어막 속에 살고 계십니까? 김광석의 노래뿐만 아니라 소위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니 여러분이 자주 듣거나 중얼거리는 노래를 떠올려 보십시오. 대부분 유행가는 딱 두가지로 갈라집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것과 ‘사랑이 변하고 말았네요.’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너무 사랑해요’와 ‘사랑 때문에 아파요’가 유행가의 주제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정말 간절한 것이면서 항상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 1. 원수까지 사랑하라니.... 결국 ‘사랑’이라는 주제는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버릴 수 없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모든 민족, 모든 문화에서 사랑은 참 간절하고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비슷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 과연 이런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사실 지난 가을부터 계속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설교에서 우리는 참 많은 시간 이웃과 원수의 개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결국 원수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내게 대단한 악을 행하고 원한을 남긴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내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나그네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저 지나갈 때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을 원수로 대하고 있고 또한 원수의 입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내가 가슴으로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이미 원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원수는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내게 얼마나 큰 악을 행했는가로 원수됨의 정도를 판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어떤 악을 행했건 내가 그를 이웃으로 섬기기로 결정하는 순간 원수의 관계는 사라지고 복음 안에서 해방된 새로운 관계, 이웃이 됩니다. 관계의 열쇠가 상대방이 내게 얼마나 잘못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그를 아픈 가슴으로 품는가?” 즉,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원수요, 내가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가 이웃되는 삶을 우리에게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2. Beyond Borders 제가 몇 년 전에 ‘Beyond Borders’(사진 1)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제목은 안젤리나 졸리라는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의 제목입니다. 한국어로는 ‘머나먼 사랑’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어떤 사람이 영화 제목을 잘못 정했다는 글을 썼더군요. ‘Beyond Borders’가 아니라 ‘The Power of Love’라고 해야 한다는 거죠. 실제로 안젤리나 졸리라는 여배우는 이 영화를 찍고 난 다음 삶이 완전히 변합니다. 이전에는 화려하고 방만한 여배우로 살았지만 이 영화를 찍은 후 세계 평화와 인류애를 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여배우도, 영화도 좋아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영화의 제목입니다. ‘Beyond Borders’라는 제목은 ‘The Power of Love’ 따위의 제목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선합니다. 영화의 시작은 영국 귀족들의 자선 사업 파티장입니다. 물건을 사고팔면서 기금을 마련해서 이디오피아의 난민을 돕기 위한 행사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파티를 망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칼라한 박사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국경 없는 의사회’의 회원입니다. 그는 파티장에 이디오피아에서 온 한 소년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구호사업을 하는 귀족들의 위선을 질타합니다. 그 파티장에 있던 영국의 귀족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자신의 삶의 바운드리 안에서 저기 국경 너머에 있는 난민들에게 동정을 보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 영국까지 왔던 이디오피아의 소년은 안전한 곳에서 장벽을 넘지 않는 편안한 사랑을 하겠다는 영국 귀족들의 외면을 당하고 죽고 맙니다. 그 파티를 주관했던 자선 단체장의 며느리였던 ‘사라’는 충격을 받고 자신의 저금을 털어 아프리카로 날아갑니다. 직접 그곳에서 본 삶의 현장은 참혹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고 안전한 사랑만 추구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녀는 국경을 넘어서고, 자기 안에 있는 장벽을 넘어섭니다. 사랑은 원래 위험한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을 대상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되셨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의 위험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과 나 사이에 있는 넘지 못할 것 같았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벽을 넘어서면 이웃이요, 벽이 남아 있으면 원수입니다. 내 안에 벽을 남겨두고 원수를 사랑하겠노라고 적당한 노력과 적당한 땀을 흘리는 것은 영적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아프리카 난민을 향한 영국인들의 사랑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며, 선교지역을 향한 교회의 사랑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며, 교회 안에서 우리 서로를 향한 서로의 사랑에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벽을 허물지 못하면 나는 이웃으로 성도와 교회를 만날 수 없습니다. 3. “끝까지 사랑하시다.”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음 중 맞는 말과 틀린 말을 골라보십시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웃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원수입니다.” “우리는 서로 원수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문장들 중에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말씀드린 대로 사람은 늘 사랑을 원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늘 사랑하는 일에 늘 실패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을 원하고 서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또 사랑하는 일에 지속적으로 실패를 맛봅니다. 우리는 서로를 참 좋은 이웃으로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성도들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그들을 이웃으로 섬기는 일에 쉽게 실패합니다. 이웃이 아니면 뭘까요? 예, 원수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이웃이 아닌 모든 사람은 원수된 세상의 편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원수입니까? 이웃으로 서로를 섬기지 못하므로 우리는 원수적 관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하나된 성도와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던진 6개의 질문은 모두 ‘Yes!’라고 하셔도 정답이요, ‘No!’라고 하셔도 정답입니다. Yes 혹은 No를 정답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과연 우리가 어떻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합니다.’와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이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원수가 아닙니다.’에 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중에서 33절부터 35절까지를 봅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3-35)
답을 얻으셨습니까? 아직 못얻으셨다면 저는 여러분께 성경 구절을 몇 개 제공하려 합니다. 다시 답을 찾아보십시오. 먼저 요한복음 13:1을 봅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또 고전 13:4-7을 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자, 답을 발견하셨습니까? 4. 나를 책임지시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은 책임지시는 사랑입니다. 어디까지 책임지실까요?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자격과 우리의 행동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자격,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결단이 우리에 대한 책임을 결정짓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의 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사랑의 장벽을 넘어섭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다고 여겼던 내 안에 있는 모든 이유들을 극복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고전 13:7) 예수님은 참으로 먼 거리를 넘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거리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수많은 이유로 만들어진 거리입니다. 하늘 무한 끝에서 땅 끝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랑으로 참으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비유에서는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스스로 다가와서 그를 구하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더 들 수도 있는 부비까지 책임을 집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것은 시간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끝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시간을 넘어서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4에서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라는 말로 설명되었습니다. ‘언제나’라는 말의 의미는 그 사랑의 한계가 시간을 넘어선다는 말입니다.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책임을 집니다. 시간을 넘어서는 책임지는 사랑이 이웃을 향한 참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어떤 장벽도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싫어해도 주님의 나에 대한 사랑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그 사랑은 expiration date가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사랑하시되 부패하지 않는 사랑, 시간과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받은 너희들, 가서 너희도 이렇게 사랑하라! 너희도 이렇게 세상을 이웃으로 삼고 끝까지 사랑하라” 사랑이 없는 세상, 사랑이 어렵다고 말하는 세상, 사랑에 굶주리고 목마른 세상에 하늘의 사랑을 보여주고 공급할 수 있는 초대교회와 가정과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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