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29. 정사 예배 / 세상의 이웃-8.구레네 시몬의 이웃 | 이응도 목사 | 2013-04-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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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누가복음 10장 33-37절 말씀 제 목 : 교회, 세상의 이웃 - 8. 구레네 시몬의 이웃
어제 새벽 기도회 말씀을 전하고 난 다음 저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 하나가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어제와 오늘 저를 사로잡고 있던 고민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구레네 시몬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2달 동안 주일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과 내용이 무엇이고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고민과 질문에 대답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구레네 시몬일 것입니다. 그의 등장은 좀 뜬금없습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일까요?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에 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해 연민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고, 성경은 그에 대해 매우 건조하게 설명합니다. 구레네 시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마 27:32)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 15:21-22)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6) 이 세 성경을 종합해서 볼 때, 구레네 시몬은 자발적인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도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병정들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억지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 구레네에서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막 들어오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유대교인이었고, 유월절을 지키러 온 것이라 설명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던 사람이며, 그의 선택이 아닌 병정들의 선택에 의해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따랐던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고 흩어지고 난 뒤였습니다. 그 누구도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르거나 돕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등장시키고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2. 누가 선한 이웃인가? 저는 여기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먼저 보여드린 The Passion of Christ 영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구레네 시몬에게는 그의 길이,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과 계획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시몬의 길이 교차됩니다. 그들은 각자의 길목에서 서로를 만났습니다. 질문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끌어와 보십시오. 이들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이고,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누가 강도를 만나 쓰러지고 누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며, 누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다가서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를 돕는 사람입니까? 예, 답은 쉽습니다. 지금 돕고 있는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요, 도움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억지였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 있었던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깁니다. 구레네 시몬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영적인 유익을 얻고 구원을 얻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누구를 구원하고 누가 누구를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합니까? 결과적으로 영적 유익을 얻는 사람은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만남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이요, 누가 사마리아인입니까? 구레네 시몬이 얻은 영적 유익은 로마서 16:13 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성경 학자들은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나왔던 ‘알렉산더와 루포’가 곧 로마서 16:13의 루포와 동일 인물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었던 루포는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알고 있을 만큼 신실한 일군이었고, 그의 어머니이자 구레네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이 ‘곧 나의 어머니’라 부를 만큼 신뢰받는 성도였습니다. 아마도 아직 사도들이 들어가지 못했던 로마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레네 시몬의 다른 아들 알렉산더는 어찌되었을까요? 성경은 그에 대해 더 이상 소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학자들이 밝힌 것이 있습니다. 1941년에 Nahman Avigad라는 고고학자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탐색하던 중에 기드론 골짜기에서 12명이 함께 묻힌 무덤을 발견합니다. 그 무덤 상자 중 하나는 덮개에 ‘구레네에서 온 알렉산더’라고 되어 있고, 상자 안쪽에는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시몬의 아들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가 한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 교회의 기둥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가서 세계 교회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3. 영적 현실을 깨닫다.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보여줍니다. 구레네 시몬, 그는 인생의 길목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깨닫게 되는 영적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이 알고 보니, 깨닫고 보니 강도를 만난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와 악으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없이는,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없이는, 지금 내 앞에서 비틀거리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이 죄와 악의 강도를 만난 인생에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그의 가정은 원수의 세상에서 그들을 선한 이웃으로 만나주신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도운 줄 알았는데, 예수가 나를 사랑한 것이요, 내가 예수의 이웃인 줄 알았는데, 예수가 먼저 나의 이웃이 되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설교의 서두에서 보았던 영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영상 속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못질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를 조롱하는 사람입니까? 구경꾼입니까? 아니면 구레네 시몬이 되어,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소원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셨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자리와 역할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 힘이 든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몇 주 전에 네 가지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제시하는 인생의 네 가지 역할이 있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습니다. 강도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관자와 선한 이웃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누구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4. 십자가를 지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함께 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하면 주님의 고통이 덜어지고, 하나님이 아들로서의 영광을 좀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리지 못했을까요? 아니 그가 인생의 길목에서 만난 예수님을 결국 외면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가 중단될까요? 그가 없이는 예수님이 구원의 하나님으로서의 사역을 못하는 것일까요? 내가 나의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그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성도와 교회의 삶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결단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내가 없으면, 내가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내가 그 고난에 동참하고 헌신하고 수고하지 않으면 우리 주님의 구원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내가 주님이 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니까, 내가 강도 만난 예수님을 도우니까,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지금 살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과 우리의 만남에서 내가 헌신하고 수고하여 우리 주님이 나 때문에 유익을 얻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혹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인생의 교차로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발견하고, 내가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여 내가 주님을 구하고 유익하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나를 희생과 봉사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고, 주님은 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졌던 십자가는 원래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성경은 그 이후의 변화된 삶에 대해 증거합니다. 예수님과 그가 만난 교차로에서 그의 삶에 변화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뜻과 욕심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 증거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들과 아내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들고 세상을 이웃으로 삼는 놀라운 사역의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십자가를 집니다. 이 십자가는 원래 누가 져야 합니까?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하니까 변화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내가 돕는다고 생각하니까 감사함이 없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고 주님이 혼자 남았을 때 그 십자가를 함께 지고 올라갔던 구레네 시몬이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그 십자가는 원래 바로 우리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신 주님의 어깨에 놓인 십자가는 이제 우리가 세상의 이웃이 되어 주님과 함께 지고 가야 할 우리 자신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구레네 시몬과 그의 가족은 세계 교회 건설을 위해 그들의 삶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바쳤습니다. 성도와 교회도 이 비밀을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닫는다면 세상의 이웃이 되어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일을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의 세상에서 강도 만난 예수님을 곳곳에서 만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 사회 속에서, 먼 선교의 현장에서 강도 만난 예수님은 우리들의 헌신과 수고를 기다립니다.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님은 그들의 얼굴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더욱 감사하며 더욱 기뻐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을 기꺼이 자원하는 담대한 믿음의 구레네 시몬, 초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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