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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 교회 세상의 이웃 - 10. 복음을 타고 세상을 넘다. 이응도 목사 201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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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7.

 

  : 누가복음 10 25-37

  : 교회, 세상의 이웃 ? 10. 복음을 타고 세상을 넘다.

 

            현대 심리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하고도 악한 본성을 연구했던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스탠포드 감옥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이라는 것입니다. 1971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였던 Philip Zimbardo 교도소의 생활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는 신문에 광고를 내서 실험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전과가 없고, 정신 상태가 양호한 사람 24명을 선발하여 임의적으로 집단으로 나눕니다. 9명에게는 교도관을 역할을, 15명에게는 죄수의 역할을 맡깁니다.

             연구팀은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건물의 복도에 실제 감옥과 같은 세트를 지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눈을 가린 그곳으로 갔고, 실험 기간 동안에 모든 참가자는 공간을 벗어날 없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번째 날이 지나갔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상황을 즐기는 같았습니다.

 

            번째 날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수 역할을 하던 참가자들이 불만을 표현하고 집단행동을 시작했습니다. 모자를 벗어버리고 죄수복에 달려 있던 숫자를 뜯어버렸습니다. 교도관 역할을 하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가 하면 감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을 시작한 하루 만에 교도소 폭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에 실험자들은 놀라면서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실험자들을 놀라게 것은 교도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변화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폭동 진압에 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교도관의 역할을 하게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임의로 뽑혀서 교도관과 죄수의 역할을 나눠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변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죄수들을 신속하고 강력하게 응징하기 시작했습니다. 소화기를 가져와서 말썽을 일으키는 죄수들에게 뿌려댔습니다. 죄수들이 진정되자 문을 부수고 감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생필품과 침대와 담요 등을 압수했습니다. 알몸으로 그들을 감방 안에 넣었습니다.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은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에게 체벌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 연구자들을 경악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선택한 체벌의 방법이 나치가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용소에서 사용했던 방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그런 일을 알지도 못했고 배우지도 않았던 그들이 교도관과 죄수라는 일정한 역할을 실험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치라고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했던 권력 집단과 동일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험은 점점 걷잡을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9명의 교도관들은 매우 지능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죄수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대소변을 감방 안에서 양동이를 사용하도록 합니다. 모든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구타와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명의 죄수 역할을 했던 청년들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실험자들은 실험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도관 역할을 사람들을 뽑아서 투입시켰습니다. 교도관들과 실험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죄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많고 무엇인가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면 그들을 통제할 없다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험 5일째로 접어들면서 일부 교도관이 죄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고, 고문하고 체벌까지 했습니다. 교도소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실험이 그렇게 진행되던 중에 Zimbardo 박사의 친구가 실험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돌변한 상황을 보고는 놀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도덕적으로 어떻게 이런 실험을 계속 한단 말인가?실험자들은 크게 놀라게 됩니다. 실험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어느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교도관과 같은 마음으로 죄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Zimbardo 교수는 심지어 자신도 질문을 받기까지 실험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실험은 6 만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환경에 반응합니다. 순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게 되고 부적응하면 도태된다는 이론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당시 내노라하는 심리학자들이면서 목표와 학문 정신에 투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감옥의 상황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도대체 이러는거야!라는 질문을 하기 까지 그들은 상황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6일의 실험 가운데 그들이 경험했던 심리적, 인격적 변화는 인간이 얼마나 환경과 상황을 거슬러서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기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너무 자주 발생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현상을 보십시오. 여러 학생들이 연약한 학생을 지목해서 괴롭히고 때로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어린 아이들이 이렇게 잔혹하고 악할 있을까요? 그런데 왕따를 시키는 학생들을 조사해보면 개인적으로는 순진하고 생각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저 모두가 그러니까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왕따를 당할 같으니까 먼저 왕따를 시킵니다. 그럴 누군가가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일을 과연 옳은 일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비로소 상황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신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발생합니다. 때로 이민 교회가 아주 작은 문제로 관계가 상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가 관계 속에 소용돌이 문제의 크기와 성격을 정확하게 보고 우리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문제인가? 객관적으로 질문할 있어야 합니다. 상황과 환경이 우리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지켜야 원칙은 무엇이고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은 바른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우리는 지난 가을부터 이웃이라는 주제로 20주간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룻기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각각 10회씩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룻기의 역사적 배경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상황적 배경은 유사합니다. 룻기는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기에 가족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세상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언약의 백성이라 믿고 있지만 삶에서의 그들의 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언약이 아닌 세상이었습니다. 상황과 필요가 그들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들의 선택과 삶은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대적인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적인 흐름을 깨뜨리는 사람,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로 룻의 결정입니다. 이방 여인 룻은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시대가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룻기 1 16-17절의 말씀은 그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16-17) 성경은 룻의 선택에서부터 언약의 역사를 새롭기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입니다. 비유는 비유의 배경과 비유의 내용을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의 배경이 되는 유대 사회는 그들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조차 원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비유 속에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원수로 대합니다. 비유의 배경이 되면서 또한 내용이 되는 유대사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거나 예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심지어 강도조차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원수된 세상에 순응하여 원수로서의 삶을 실습하며 살고 있습니다. 비유 속에 사람들이 그러하고, 메시야를 시험에 빠뜨리려고 질문하는 비유 밖의 세상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다가온 메시야를 강도질하게 것입니다. 비유의 배경이 되는 세상과 비유의 내용에서의 세상은 같습니다. 원수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속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수의 세상에서 세상을 따라 원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으로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인이요, 자신을 원수로 대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가서 너도 원수의 세상에서 이웃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라. 권면하십니다. 세상을 따라 살면 서로에게 원수로 살지만 말씀을 따라 살면 서로에게 참된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용기를 냅시다.

 

            저는 지난 4-5개월 이웃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고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에 대해, 또한 세상에 대해 선하고 좋은 이웃으로 살지 못하는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할까요? 말씀이 부족할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한가지 제가 주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와 교회가 말씀과 믿음은 있는데 믿음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담대하게 믿음과 말씀을 삶에 적용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장 앞에서 손해가 되는 같고, 어려움을 당하는 같아도 결국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가운데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믿음, 믿음에 용기를 더하여 우리의 삶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의 세상에서 서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좋은 이웃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삶을 위해 용기를 내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을 선택하고 복음의 인도함을 받기로 결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손해 보는 일인줄 알면서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 알면서도,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이 부족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고 순종할 있는 용기를 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는 믿되 세상에서 절대 손해보는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것은 앞을 바라보면서 뒷걸음질 치는 것과 같습니다.

 

            원수의 세상을 살면서 믿음은 때로 용기로 해석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타고 세상을 멀리 넘어설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4. 원수의 세상은 선한 이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로서 선한 사미리아인 비유에 대한 묵상을 마치려고 합니다. 마치면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비유 속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가서 그와 같이 행하는 사람입니다. 선하고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하고, 우리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유에서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요? 세상은 예수님 앞에 강도 만나 누워 있습니다. 강도로 살아가는 사람도,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도 결국은 원수의 세상에서 서로에 대해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서로에게 가해자이면서 서로에게 피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참된 삶의 가치를 보여주고 알려주고 경험하게 주어야 사명이 예수님에게 있고,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있고, 성도와 교회 바로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을 강도로 대하고, 지나가는 비겁한 사람이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함에 휩쓸려 살아가는 강도만난 사람으로 여기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신 주님을 본받아 그들의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의 세상은 오늘도 선한 이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강도인 알고, 제사장과 레위인인줄 알지만 세상의 악함이 결국 그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결정하고 주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인도하는 삶을 보여주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어야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세상은 선한 이웃에 목말라 있습니다. 복음의 인도함을 따라 세상의 위협을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을 얻는 용기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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