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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4. 우리들의 기도 - 1. 기도의 시작 이응도 목사 201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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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14.

 

  : 마태복음 6 9-13 말씀

  : 우리들의 기도 ? 1. 기도의 시작

 

            어느 원로 목사님이 칼럼에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내용이 있더군요. 뉴욕 지역에 집회를 하던 중에 담임 목사님과 함께 한국 식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자 종업원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목사님, 이리 오시지요...” “목사님, 드리겠습니까?” “목사님, 오늘 맛있는 요리는요...종업원들은 극진하게 함께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 식당 주인이 목사님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종업원들이 목사님에게 유달리 친절할까 궁금하던 차에 직접 종업원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종업원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식당에서 오래 일하다보니 팁에 민감해진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팁을 많이 주는 손님에게 친절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여러 사람이 함께 와서 대표기도를 하고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은 대부분 팁이 아주 박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자리에 있는 목사님은 모시지만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은 쉽게 무시하거나 팁을 짜게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종업원들은 교회 손님들, 특히 목사님들과 함께 오는 손님들에게는 서로 미루고 가지 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목사님은 항상 종업원들의 팁을 따로 계산하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식사 대접을 받는 자리여서 굳이 계산을 필요가 없을 때에도 음식을 서빙해준 종업원들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많지는 않지만 팁을 따로 놓고 간다고 했습니다. 종업원은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나도 시간이 있으면 저런 목사님이 있는 교회 가고 싶어요.

 

            목사님은 칼럼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기도가 어떤 공식적인 모임이나 예배의 끝마침으로 형식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습관화된 것이라면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께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기도의 정신대로 기도하고 기도의 내용대로 살라고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부분에서 가르쳐 주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달라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략) 기도의 대목에서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________________ 정도는 되야지...라는 말에 여러분은 어떤 말을 넣고 싶으십니까? 목사님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나도 사람이 믿는 예수 믿고 싶고, 사람이 다니는 교회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주기도문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주기도문을 자신의 삶으로 기도할 있어야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기준에 적합하십니까?

 

1.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요즘 인터넷이나 카톡으로 좋은 글들을 서로 나르는 경우가 많죠? 가끔씩 근거 없는 글들도 있기는 하지만 주기도문에 관한 좋은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하지 말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하지 말라.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말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지 말라.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하지 말라.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교회에 가르쳐주셨던 기도를 습관적으로 암송하는 우리들에 대한 반성이라고 있겠습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종교 개혁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주기도문이야 말로 최대의 순교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은 주기도문이 가장 많이 드려지는 기도이면서 제대로 의미가 살아있지 않은 기도라는 자기 반성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를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회당을 출입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익혔을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은 그들의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기도의 차별성과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각각 소개됩니다. 배경이 조금 다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배경이 설명되고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신학적으로 위치시킵니다.

 

            먼저 누가복음에서는 기도에 대해 제자들의 요청이 먼저 있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고민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나도 장로님처럼, 권사님처럼 기도를 매끄럽고 폼나게 잘하고 싶다....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사실 공적으로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좋은 기도는 짧고 진솔한 기도입니다. 많은 말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을 이기시면 좋은 기도를 하실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들이 쉽게 빠지는 기도를 잘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던 같습니다. 당시 예수님보다 유명했던 요한, 자신들보다 먼저 그의 제자가 요한의 제자들이 부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나게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예수님이 번째 설교( 5:1~7:29) 편집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산상수훈, 8복이 들어 있고, 너희는 먼저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고,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는 예수님의 설교 중에 주기도문을 편집한 것입니다. 전후 문맥을 살피면 마태의 의도를 파악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되심을 설명하는 가지 장치가 있다면 하나는 이적과 기사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사건, 죽은 자를 살리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고 뛰는 사건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역입니다. 하나 예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는 것은 설교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본론이 되는 내용을 5단락으로 나눕니다. 번째 설교가 바로 유명한 산상수훈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세상에 선포한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와 윤리에 대한 대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것을 왕이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속에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있습니다. 단순히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로만 생각할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소개한대로 제자들은 다소 잘못된 동기에서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른 것을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은 그래서 이렇게 해석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3. 동기가 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어야 할까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유대 사회는 지극히 종교적인 사회였고, 기도는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먼저 누가복음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제자들의 동기가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도 하는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한 같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에는 주기도문을 전후로 이렇게 소개됩니다. 6:5-8에서는 잘못된 기도의 나옵니다. 먼저 외식하는 기도 드려서는 안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5-6) 예수님은 기도의 동기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대상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은혜롭게 들리는 기도, 그래서 내가 기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확하게 잘못된 동기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babbling)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7-8) 중언부언이란 같은 말을 의식없이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로마가 다스리던 근동지방에는 당시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그들은 마치 주문과도 같은 수많은 기도문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소박한 의지를 원하십니다. 많은 말이나 화려한 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러내는 진솔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미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해결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있어야 합니다.

 

4. 삶이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6:14-15)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에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은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자를 사하여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12)라는 기도와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니까... 나는 기도를 많이 하니까... 삶은 지극히 종교적이니까... 라는 자기 위로는 적절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 좋은 기도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삶과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가 가장 쉽게 빠지는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를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변화되었는데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래서인지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일이 많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품고 치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잘못 사용하면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관계를 깨뜨립니다. 기도 이전에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품고 용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특히 이민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는 가장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잘못된 종교성입니다. 제가 관계에 대한 말씀을 전할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Gossiping 대한 주의를 많이 드리지요. Gossip 사람을 죽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죽습니다. 마음과 입술로 하나님께 기도할 없습니다.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죽입니다.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을 듣고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뀝니다. Gossip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관계 속에서 Gossip 줄일 있는 가장 지혜로운 길은 이상 듣지 않기로,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번째 Gossip Gossip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매장해서 죽입니다. 그런지,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땅에 묻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눌 가장 건강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심깁니다. 그런데 신앙 공동체가 Gossip 정죄를 나눕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힙니다. 사람과의 소통도 막힙니다. 분열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Gossip 가장 경계해야 죄악입니다. 서로를 품고 용서하고 용납할 있는 믿음과 사랑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비로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으로 세우는 공동체, 서로를 기도로 살리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의 서두에 드린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________________ 정도는 되야지...라는 말에 답을 찾으셨습니까? 잠시 시간을 드릴테니까 자신의 말을 만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과연 예수를 믿고 싶어할까요? 내가 다니는 교회 다니고 싶어할까요? 신앙에 관심을 가질까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_________________ 정도는 되어야겠다.여러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내면의 동기가 변하고 소원이 변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이 변회되어야 합니다. 땅을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윤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신분과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으로 서로를 만나는 복된 초대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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