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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1. 우리들의 기도 - 2. 우리들의 아버지(1) 이응도 목사 201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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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21.

 

  : 마태복음 6 9 말씀

  : 우리들의 기도 - 2. 우리들의 아버지(1)

 

            가끔씩 우리 교회 성도들이 찾아와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상담을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이건 이래야 되는 아닙니까?” “ 성도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심하면 이런 말도 합니다. 그런 사람도 구원을 받을 있나요?이렇게 하는 교회가 아니지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땅에 던져놓으신 교회라고 하는 개념은 초대교회부터 지속적으로 실패했다고 있습니다. 교회 땅에 심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라는 완전하고 영적인 개념이 이라는 제한적이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과연 성공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회 공동체는 번도 완전했던 적이 없습니다. 공동체이되 공동체성을 부인하고 깨뜨리는 요소를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지체로서의 성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성도(聖徒)리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할까요? 완전할 있을까요? 이름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참된 성도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었던 베드로조차, 세계 교회를 건설했던 바울조차 완전한 성도이지 못했습니다. 초대 교회 이후의 모든 성도는 성도이되 성도일 없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고민합니다. 교회에 대해 고민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는 성경이 말하고 가르치는 성도와 교회로서 보다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분,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타협하고 계십니까? 오늘은 공동체적 관점으로 주기도문을 묵상하는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신앙 고백,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선언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공동체(共同體)?

 

            저는 주기도문을 공동체적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공동체란 무엇입니까? 사전적인 의미는 생활이나 행동, 목적 따위를 같이 하는 사람 이상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학문적인 개념으로서 공동체(community) 라틴어 커뮤니타스(communitas) 어원으로 합니다. 이것은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함께 하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이 가지는 사전적, 어원적 의미를 자세히 보십시오. 공동체를 말할 가장 기본이 되는 가지를 추출해 있습니다.

 

            먼저 공동체는 확장된 자아의 개념입니다. 아닌 우리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1인칭을 사용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했어.” “내꺼야라는 말들은 어린 자녀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입니다. 모든 사고나 언어는 자기를 중심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1인칭 I 단수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자아가 확장됩니다. 1인칭이되 복수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와 함께 생활하며 같은 목적과 가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관계인 가정에서부터 목적 혹은 가치를 중심으로 우리(We)라는 개념을 발전시킵니다. 낭시라는 사회학자는 바로 바로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공동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공동체로서 우리 함께 있고,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이루기 위함이 아니며, 무엇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 함께 있는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자체이다. 무엇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가 목적이 되고 가치가 된다. 다시 말해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되는 관계 우리 실존들의 접촉이 공동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공동체성을 결정하는 보다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적 관계, 공동체로서의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지 공동체가 이루는 어떤 성취나 행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예는 바로 가정이라는 공동체입니다. 가정 구성원 누군가가 다른 구성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가정은 구성원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습니다. 그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서 또한 가정의 quality 이루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보다 질적인 수준이 높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연약한 지체를 제외시키지 않는 것처럼, 공동체는 관계가 결정하는 것이지 업적이나 성과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향하여

 

            공동체에 대한 번째 통찰은 그것이 가치 중심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가치는 공동체의 존재의 이유가 되며 이루어야 목적이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가지고 있는 가치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서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땅에 심긴 하나님의 나라, 교회 공동체의 관계를 통해 경험되고 증거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죽지 않고 없고 경험할 없지만, 그러나 살아서 우리의 속에서 있고 증거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먼저 경험해야 하고,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경험시켜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땅에 심긴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감당할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의무와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까요? 지역 사회와 시대에 대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까요? 나와 함께 지체된 성도와 교회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을까요?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을까요? 여러분과 저는,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증거가 되어 세상이 보고 경험하고 탐낼만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답에 자신이 없으시지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실패해왔습니다. 완전한 교회와 성도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연약하기 짝이 없었고, 최초의 교회인 제자들도 완전한 목회자인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모든 초대교회는 문제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 실현불가능한 목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땅의 사람들에게 심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 ? 서로 어울리나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개념은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고, 계속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지향성, 지상의 공동체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헌신은 패배한 것입니까? 실패하는 우리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입니까? 완전하지 않으므로, 부족함과 연약함이 드러나므로 교회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성도는 이상 성도가 아닌 것입니까?

 

            재미있게도 땅에 최초의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은 교회의 부족함과 제자들의 연약함에 대해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 꾸짖으시고 때로 격려하면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제자들 가운데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처절한 실패로 보이는 십자가 사건 이후 갈갈이 찢어진 제자들의 마음을 찢긴 손으로 어루만져주십니다. 스스로 실망하고 낙심해서 갈릴리 바다로 도망간 제자들은 주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 주님의 대한 몹쓸 사랑 때문에 수치심으로 모르는 베드로에게 다시 사랑을 물으시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자라고 부족한 교회를 과감하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교회를 위해 박히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교회의 현재성, 불완전한 땅에 심긴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찾은 답은 지향성 있습니다. 2 19-2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19-22)

 

            19절과 20절에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우리는 성도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일은 우리 주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21-22절에서 지상 교회와 성도의 불완전성을 봅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여전히 모자랍니다. 어떻게 차이를 극복할 있을까요? 바울은 지향성 통해 설명합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느니라 구절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는 지상에서의 불완전한 교회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은 땅에 있는 동안 지어져가고 있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불완전합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교회가 아니며 성도가 아닐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이며 교회이며 성도입니다.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성장하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지상의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우리들의 하나님, 공동체의 존재 근거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해버리면, 그래서 괜찮다,,,, 말해버리면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요? 지향성이라는 것은 0에서 시작해서 100 목표라고 1 지향성 가운데 있고, 99 지향성 가운데 있는데 너무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에 대해 2:21-22 답을 제시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2)

 

            절에서 안에서라는 말을 4 반복합니다. 먼저 21절에 그의 안에서 20절에서의 모퉁이 되신 예수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2절로 넘어가면 성령 안에서 말합니다. 마지막에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한번 합니다.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지어져 갑니다. 그런데 22절에 중요한 말이 등장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지어져 가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지어져 가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지어져 가는 것은 맞는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이 안된다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동체로 성장할 있을까요? 답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가장 먼저 고백하게 합니다. 어떤 고백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성도로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이 바로 나와 너와 너와 , 우리들 모두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인데 너의 하나님이 아닌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일부의 하나님인데 그들의 하나님이 아닌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위에 있는 교회와 성도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헌신히고 희생할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기쁘게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웃을 외면하고 멸시하고 핍박할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섬기며 그를 위해 희생할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희생과 헌신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이웃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함께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 되는 세상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며 안에서 서로 연결하고 함께 지어져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증거할 있는 공동체가 되는 ?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자 이유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지상 명령입니다. 다음 주에는 명령이 우리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 안에 있는 요소들을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져가는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과 삶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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