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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8. 우리들의 기도 - 3. 우리들의 아버지(2) 미디어선교팀 201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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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28.

 

본 문 : 마태복음 69

제 목 : 우리들의 기도 - 3. 우리들의 아버지 (2)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세 성도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 성도를 여러분에게 과감하게 공개하려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첫 번째 성도는 바로 이 성도입니다.(사진 1)



아시다시피 이제 세 살 반 제 딸 승하입니다. 아직 우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 성도는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할 때나 외출을 할 때 둘째 오빠인 성일이가 제게 접근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빠야!” 그리고 엄마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성일이 엄마지!” 승하는 성일이 오빠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일단 자신의 주권을 선언하고 봅니다. “내 꺼야!” 그리고 떼를 쓰고 울면 그만입니다. 막내인 승하가 의 개념에서 우리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문제가 되는 성도는 역시 성일이입니다.(사진2)


 

성일이는 둘째가 보이는 전형적인 성품을 다소 가지고 있습니다. 승하가 아빠와 함께 있을 때는 내 아빠!”를 주장하다가 아빠가 없이 엄마와 있을 때는 내 엄마!”를 주장하는데 대해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여유도 있고 이해도 하지만 형에 대해서도, 동생에 대해서도 자신은 늘 자신의 것을 빼앗기거나 모자라게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고집도 셌었고, 잘 울기도 했습니다. 성일이가 요즘 마음과 삶에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성장입니다. ‘아하.... 승하가 내 아빠야...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아빠가 승하 아빠만 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하의 주장에 대해 요즘은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또 하나는 저희 부부가 성일이를 많이 신경 씁니다. 많이 표현해주고 많이 격려해줍니다. 사랑과 관심의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그래서 승하만의 아빠 엄마가 아니라 성일이 자신의 엄마 아빠이며 세 남매의 부모님을 잘 알 수 있도록 계속 표현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 성장할 것이고, 더 많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적 성도는 바로 이 녀석입니다. 성일이가 태어났을 때 가일이의 반응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 3) 동생의 존재가 좋으면서도 한편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가일이는 항상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아빠, 왜 성일이는 내가 가지는 것마다 다 가지려고 해! 왜 나는 항상 뺏기는 거야!“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지금 성일이가 승하에 대해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가일이는 불과 1-2년 전만 해도 성일이와 승하가 각각 엄마와 아빠 품에 안겨 있으면, 가끔 슬픈 표정으로 다가와서 동생들을 강제로 떼어놓고 자신이 슬며시 안기기도 했습니다. 동생들이 떼를 쓰고 울어도 원래 엄마 아빠의 품은 내 것이었어!“라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들은 척 만 척 안겨 있다가 헤~ 웃으면서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한 이 녀석이 요즘 사춘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지식의 성장이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면서도 적당한 거리 유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자아가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자기를 만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가일이는 엄마와 좀 다퉜습니다. 엄마는 가일이에게 동생들을 돌볼 것을 기대했는데 가일이는 자기 일을 한다고 바빴던 모양입니다. 엄마 아빠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당연히 동생들을 돌봐야 하지 않느냐는 엄마의 요청에 가일이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졌고,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즐기는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성장의 측면에서 이것은 당연하면서도 대견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형제들을 자아(self)’가 확장된 우리로 여기고 희생하고 책임지는 일을 하기에는 어립니다. 더 성숙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러분! 왜 초대교회의 이 세 성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이해하고 고백하는데 문제가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세 성도는 말이지요, 분명히 저의 세 자녀입니다. 저희들도, 저와 아내도 서로의 부모됨과 자녀됨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 녀석은 서로가 형제되었다는 의미를 아직 잘 모릅니다.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려고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험한 세상에서 서로 형제되고 자매되었다는 것의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는 하되 그 사랑을 나누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여기서 방점이 어디에 찍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입니까? ‘우리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우리는 대부분 이 고백을 할 때 먼저 아버지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에는 보편적인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모두의 아버지라는 데 대해 얼마나 큰 강조점을 두고 계십니까?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 내용에 대해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번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본 주기도문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을 이해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말씀에는 공동체의 기본적인 뜻과 서로 연결하여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공동체됨을 방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요소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2. “나만의 아버지

 

가장 먼저 우리의 공동체됨을 방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요소는 나만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고백하려는 태도입니다. 분명 믿음은 있습니다. 다만 다른 성도에게 관심이 없고 이웃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에게 맞춰야 하고 하나님조차 자신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과 기도가 얼마나 합당한지, 얼마나 건강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꺼야!”를 외치고 달라고만 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반드시 줄 것이고 교회도 그 말을 들어줘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앙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승하는 아직 잘 나눌 줄 모르고 여전히 아빠를 독점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승하를 누구도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 승하가 어리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성장할 것이고, 곧 자신의 그런 고집이나 욕심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승하가 성일이의 나이가 되고 가일이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승하를 꾸짖어도 됩니다. 아빠인 제가 책임을 지고 가족이 무엇인지, ‘아닌 우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도 도와주셔야 합니다. 저의 딸이지만 또한 우리들 모두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적 나이는 얼마만큼 되십니까? 승하의 나이에 머물러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 모든 사람이 여러분의 만족을 위해 섬기고 돕는 신앙생활을 하셔도 비난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승하보다 더 성숙한 신앙적 나이를 가지고 계신다면, 이제 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성장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뜻이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3. “더 많이 주세요!”

 

일반적으로 둘째 콤플렉스라고 불리는 증상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둘째가 그런 성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둘째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증상은 좀 더 경쟁적이고 좀 더 욕심이 많습니다. 첫째에게는 집중된 사랑을 쏟았지만 둘째에게는 이미 익숙한 사랑을 줍니다. 둘째는 나면서부터 첫째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심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일이가 가장 잘 쓰는 말 중 하나는 아빠, 더 줘!”입니다. 더 많이 달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형보다, 동생보다라는 말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을 크게 빼앗아가는 감정이 있습니다. 비교에서 오는 박탈감입니다. 교회의 공동체성을 깨뜨리는 요소이면서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그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불만을 터뜨리게 된 것이 비교에서 오는 분노였습니다. 갈릴리로 도망을 갔지만 그곳가지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 눈물 흘렸던 베드로가 마음의 평안을 잃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자기보다 더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제자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1:22-23)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를 보십시오. 117절에 복음을 전하되 순전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열심있는 여성도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경쟁적인 열심은 사도 바울과 교회의 근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합니다. , 그들의 믿음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요 빌립보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더 많은 사랑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투어 봉사하고 섬깁니다. 섬길수록 기쁘고 나눌수록 즐거워야 하는데, 섬길수록 다투고, 나눌수록 분노합니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고 더 많은 사랑과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 ? 그런 성일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성장의 과정에 필요한 정서적인 요구들입니다. 그런데 성일이가 계속 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성일이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저와 아내는 성일이의 성장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성장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이 성장해야 하고, 영성이 성장해야 하고, 관계가 성장해야 합니다. 죄송하게도 이러한 성장은 여러분의 나이와 무관합니다. 신앙의 경륜과 무관합니다. 영적으로 좋은 것을 학습하셔야 하고, 건강한 영적 경험을 하셔야 하고, 성장을 위한 훈련을 받으셔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성도들의 정서적, 영적 성장을 위해 함께 협력하고 도와야 합니다. 비교에서 오는 박탈감이나 만족이 아닌 서로 협력하여 세워지는 중에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4. “좋아하는 것만 할 거예요.”

 

여러분! 이 사진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가일이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
사진 4) 완전 떨뜨름한 표정이죠? 왜 그런지 아십니까? 지난 가을, 날이 워낙 청명해서 가족들이 다 함께 Peace Valley Park에 가자고 했습니다. 가일이는 싫다고 했습니다. 가족들하고 Park에 가서 뭘 하냐는 겁니다. 재미없다는 거죠. 억지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진을 찍어준다고 했더니 표정이 저렇습니다. 그런데 가일이는 요즘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가까운 Park에 가서 운동하고 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와 어울리기 좋아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합니다. 자기 만족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하기 힘든 일을 피할 줄 알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할 줄 압니다. 자기 판단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좀더 논리적이고 좀더 이기적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가끔 어이가 없게도 성일이와 승하의 양육에 대해 부모에게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아빠, 그렇게 하면 애들을 너무 spoil 시키는 거 아냐?” 기가 막힙니다.

 

저는 가일이를 양육하면서 기쁨이 많았습니다. 부모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 녀석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보다는 입니다. 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는 의 적절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고 책임과 의무가 요구됩니다. 가일이는 아직은 그정도까지 성장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리고 연약한 동생들을 돌보기보다는 친구들과 같이 노는 것이 훨씬 즐겁습니다. 가족들과 산책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혼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싶습니다. 희생하고 책임지기보다 나를 즐기기에 바쁘고 분주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과 저는 한 형제요 자매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된 교회를 섬기는 지체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내면과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성장해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 아닌 를 위한 하나님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인정에 목말라 있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와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의 연약함을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내가 더 뛰어나다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습니까? 여전히 영적인 유아기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들 모두의 하나님을 부르며 날마다 기도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는 아닌 나만의 하나님을 원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실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 자녀가 우리 가정 공동체의 자랑스런 지체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라는 고백에 맞는 사랑과 헌신이 있는 형제들이 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될까요? 시간이 지나니까 되던가요? 몸이 크니까 마음도 함께 성장하던가요? 세월이 지나니까 저절로 되던가요? 예수를 오래 믿으니까 저절로 되던가요? 부모의 기쁨이 되는 좋은 형제들이 되기 위해서는 역할을 학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고 그리하여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서로를 책임지는 지체들로 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하나를 보여드리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사진 5)


 

아비된 저는 저의 세 자녀가 이렇게 함께 앉아 웃고 있는 것만 봐도 마음이 설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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