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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 우리들의 기도 -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미디어선교팀 201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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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5.

 

본 문 : 마태복음 610절 말씀

제 목 : 우리들의 기도 -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저는 어릴 적부터 저의 이름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외모도 남다른데다가 이름마저 특이해서 좋지 않은 별명이 너무 많았습니다. 키와 머리와 눈이 워낙 커서 신체 관련한 별명들이 많았었는데, 이름까지 응도여서, ‘응가’, ‘도선생’, ‘강도’, 심지어 똥도라고 부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께 왜 우리 형제 이름을 집안의 항열을 따르지 않고 ()’자 돌림으로 지으셨는지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천천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합천 삼가에 있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장손이 예수 믿는 것이 못마땅하셨던 할아버지는 성경을 찢기도 하시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삼가에 있는 교회에 나가서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이 좋았던 아버지는 청소년기에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첫 아들을 낳자 아버지는 너무 기뻤습니다. 아들이 예수 믿는 일로 고통을 당했던 자신과 달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항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의 응천’(應天)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2년 뒤 둘째를 낳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의 응진’(應眞)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2년 뒤 셋째도 아들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순종하는 아들들의 이름을 짓고 나니 딱히 다음에 뭐라 지을 이름이 없었습니다.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라고 응도(應道)’라고 지었습니다. 넷째를 낳았는데,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당연하게 ’()자로 시작되는 여자 아이의 이름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한 이름이 응희’(應姬)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들의 이름을 ’()자 돌림으로 하는 것이 못마땅하셨던 어머니는 딸 이름까지 ’()자로 돌리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던 아버지는 결국 응희’(應姬)와 가까운 소리가 아는 은희’(恩姬)라는 이름으로 양보하셨습니다.

이름으로 시작된 나쁜 어감의 별명들은 대학 시절까지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미팅에 나가서 이름을 소개할 때 몇 번이고 이름을 다시 묻거나 웃어버리는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이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다음부터 저는 제 이름에 대해 더 이상 불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목사가 되었다고 꿈을 키워왔던 저는 아버지가 어떻게 내가 태어나자마자 목사가 될 사람으로 제 이름을 지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친구들은 제 이름을 가지고 놀리거나 웃어도, 나쁜 어감의 별명들이 따라 다녀도 저 스스로는 제가 살아가야 할 삶과 이름이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을 이해할 때 서두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와 마지막의 대개 나라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을 제외하면 하나님께 대한 기도 3, 교회에 대한 기도 3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세히 묵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세 개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그의 나라그의 뜻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에 대한 것은 일용할 양식죄와 용서시험과 인도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 첫 번째 기도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는 이 기도는 뭔가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해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마치 주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도대체 누가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지가 애매합니다. 3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만일 그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 아니실까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까? 둘째,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합니까? 성도로서의 나 자신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그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줘야 합니까? 마지막으로 왜 하필이면 이름일까요?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함께 답을 찾아 봅시다.

 

2. 거룩하게 되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거룩함을 닮아가는 성도의 성품을 성경은 경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경건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닮아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말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그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다르게 구별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그 무엇과도 다른 하나님의 영광이 인정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은 기도의 시작에서 벌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여기서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면서 이 세상의 어느 존재와 다를 수 밖에 없는 구별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속성과 존재가 거룩하신 분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아무리 욕되게 하려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권위와 존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가 아무리 위엄을 지키려고 해도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이 쓴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북유럽에 오랫동안 전래되어오던 이야기를 각색한 이 소설은 왕자였던 에드워드 6세와 거지였던 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왕자였던 에드워드 6세가 호기심으로 톰과 옷을 바꿔 입었다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왕이 되지 못할 뻔했던 일을 풍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 참여 소설을 쓰기 좋아했던 마크 트웨인이 노리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왕의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왕도 거지와 같고, 백성들이 인정하고 권력을 부여하면 거지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위와 존경은 그렇습니다. 권위와 존경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지고 사람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와 속성이 거룩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과 구별되십니다. 사람에 의해 거룩하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 속에서 택함 받은 성도와 교회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3. 누가 할 것인가?

 

, 그렇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이 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까요?

 

때로 성도와 교회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하고 더럽히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민수기 2012절에는 이스리엘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했던 모세와 아론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뜻이 드러납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20:12) 이 말씀은 광야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 하자 모세가 분노하여 바위를 쳤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 모세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 더 가까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와 교회의 삶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 악함이나 욕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만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순간을 참지 못하여 자신의 성품을 드러낸 것을 하나님은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나의 성품이나 기질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나타나시도록 일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참 고맙습니다. 교회의 규모나 역량에 비해서 참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칭찬해드리고 싶고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자주, 너무 쉽게 우리는 오류에 빠집니다. 교회의 여러 사역이나 일에 사람이 보이는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이 그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해 나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성취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만족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 5경 중 하나인 민수기는 모세의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라고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기록할 때 모세가 얼마나 아팠을까요? 바로 그 때 나의 연약함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용했더라면, 악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고 분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했더라면.... 나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나타냈더라면.... 아마도 가슴을 치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 저를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증거될 것입니다. 에스겔 36:23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6:23) 하나님의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이 땅에 세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 이스라엘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나라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과 영광을 회복하시겠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다.

 

여러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하는 줄 아시겠습니까? ,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거룩함을 잃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 가운데 성도와 교회의 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삼손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 교회로 말미암아, 성도로 말미암아, 목회자와 직분자로 말미암아 참으로 참담하게 불리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사랑과 은혜로 부르시고 택하신 성도와 교회로 말미암아 더럽혀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러했고, 예수님 시대의 현실이 그러했고,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그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아버지라 부를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가장 먼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삶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하나님께 영광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결국 이 기도는 하나님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성도와 교회라는 이름에 맞게 살겠다는 우리 자신을 향한 기도이며 우리들이 결단의 기도인 것입니다.

 

요즘도 저는 이응도라는 이름을 좋아합니다. 독특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마음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제가 길에 대해서 민감하고 생각이 많은 것도 길과 관련된 이름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저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이 이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제게 가장 큰 유익이며, 저의 이름에 맞는 삶을 살 때 이름을 주신 아버지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이름을 통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내게 주신 이름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응도라는 이름 뿐만 아니라 성도며 교회며 목사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또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주어진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 때 그 이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날마다 저의 이름과 함께 삶을 묵상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확인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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