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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6. 우리들의 기도 - 7. 나라이 임하옵시며(3) 미디어선교팀 201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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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마태복음 69-10
제 목 : 우리들의 기도 ? 7. 나라이 임하옵시며(3)

    

여러분은 혹시 이 사진이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 탕자 비유로 몇 주간 말씀을 나눈 적이 있고, 이 그림을 사용했었습니다. 램브란트라는 작가가 1662, 신앙을 회복하고 그린 그림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에서 큰 은혜를 받고 탕자의 귀향이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림의 몇 부분은 깊이 묵상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만지시는 아버지, 아들의 있는 그대로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모습니다. 아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확인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오랜 그리움으로 아들을 기다려온 세월이 숨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감은 눈으로 아들을 느끼고 품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주목한 것은 아버지의 두 손이었습니다. 아들의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두 손은 각각 그 크기가 다릅니다. 한 손은 아버지의 투박한 손이요,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따뜻한 손입니다.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사랑을 이 두 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때로 아버지의 든든하고 깊은 사랑이 필요하고 때로 어머니의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돌아온 아들의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부족함 없는 사랑으로 품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두 손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우웬은 아들의 머리와 발을 주목합니다. 아들은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들의 삶의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벗은 발도 보여줍니다. 아들은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더럽고 추한 모습, 그 모습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해도 아버지가 있는 한 아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현실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우웬은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봅니다. 특히 가장 차가운 표정으로 탕자와 아버지의 재회를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바로 첫째 아들, 탕자의 형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었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분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감은 눈과 그의 차가운 표정을 비교해 보십시오. 팀 켈러 목사님은 두 탕자 이야기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집에 있는 맏아들이 불행하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로부터 도망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3주째 말씀을 나눕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두 가지 개념, 기억나십니까? 들어가는 나라와 임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다른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 탕자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서 본다면, 지금 현재 이 그림의 상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일까요?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닌 것일까요?

 

1. 탕자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이라는 말과 바꾸어도 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이라는 말입니다. 왜 천국이라는 말과 왕이라는 말을 바꾸어도 될까요? 왕의 도래가 곧 그의 나라의 도래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있는 그곳이 바로 그 나라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가 다스리시는 삶,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지금 저 그림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돌아왔고 아버지의 품에 있습니다. 아들의 삶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확인되고 있습니다. 왕이 주권이 한 돌아온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회복되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아들의 삶에 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나라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지금 이 그림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까? 비참하고 위험하게 보이십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교회와 성도들의 삶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모습입니까? 여전히 힘들고 아프고 부끄럽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그 품에 안긴 우리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비참하고 참담합니다. 더럽고 추합니다. 집 안에는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또 다른 탕자가 아버지와 동생을 차갑게 바라봅니다. 그는 동생을 미워하고 다툽니다.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불만과 질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저기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입니다. 주님은 왕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탕자의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건 집 안에 있는 아들이건, 성경은 그들 모두가 아버지의 뜻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은 작은 아들, 더럽고 남루한 마음으로 사는 큰 아들 ? 부인할 수 없는 우리들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좀 더 논리적이고 똑똑했다면 이 때 이렇게 질문했어야 합니다. 예수님, 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왕이라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위한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의 집에 있는 두 아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아들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왔지만 아버지의 영광이 잔치에 참여하기에는 아직도 그 삶의 모습과 마음의 자리가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의 삶도, 아버지의 마음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아버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같은 질서의 삶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삶에 더욱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왕이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이 그의 처절한 삶으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질서가 아직 우리들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서 추하고 더러운 세상이 보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서 다투고 질투하고 정죄하는 세상이 보입니다. 왜 우리가 왕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까? 왕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였지만 끊임없이 왕의 나라를 침략하는 적의 나라의 삶에 더 익숙한 어리석은 백성으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기도와 삶의 조화

 

그렇다면 이 기도를 드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이 기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겠습니다.” 혹은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는 결단이자 소원입니다. 제자들은 언제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언제 그 기도와 삶이 서로 조화될 수 있었을까요?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말씀합니다. 너를 위한 영광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웃들이 함께 아버지와 아들의 잔치를 즐기고 축하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더러운 몸을 씻고, 더러운 옷을 벗고, 새 가락지를 끼고, 새옷을 입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4:22-24)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삶에 대해 편지를 쓴 에베소서의 핵심은 바로 이 말씀에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의 삶의 질서에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다운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편하고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아버지의 영광과 은혜에 맞는 삶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또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굳이 다시 씻지 않아도, 새 옷을 입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까? 그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의 삶은 아버지의 아들로 부끄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과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익숙한데 정작 내 마음이 믿음과 사랑으로 회복되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일치시키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교회와 성도들(딤후 3:5)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있으되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없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참소하고 다툰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잔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와 우리의 삶이 조화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 우리는 두 아들의 삶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고,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로소 이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고 이미 응답된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를 결단하라.

 

우리가 만일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다면, 영원한 잔치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이 땅에 살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연약한 성도와 교회를 위해 주신 기도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한 기도요, 우리들의 자녀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결단을 새롭게 하고 삶을 새롭게 하라는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와 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지 않도록, 그 나라의 영광과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우리가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생각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과 생각과 뜻과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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