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3. 우리들의 기도 - 8. 뜻이 이루어지는 삶 | 미디어선교팀 | 2013-06-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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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자주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삶에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위로와 권면을 합니다. 내 삶에 목표와 비전을 세울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바꿀 때도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던 일이 잘 안되거나 계획이 실패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 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심지어 기도를 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정말 자주 사용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리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 금요일 밤마다 10시부터 12시까지 심야기도회를 했습니다. 기도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30분 정도 찬양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빠지지 않는 찬송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날마다 찬송하고 기도하지만, 정작 정말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지는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언급한대로 너무 폭넓고 다양한 의미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베드로의 삶에 초점을 맞춰보려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임하였고, 그가 그 뜻과 함께 어떻게 성장하고, 그 뜻에 대해 어떻게 저항하고 좌절하는지, 주님은 어떻게 베드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뤄가시는지를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다.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메시야를 압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만나서 믿음이 있는가를 물어본다면 그는 분명 있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그가 그의 인생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들려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단 한번도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믿음은 있었지만, 그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어부로 태어나서 어부로 죽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의 부르심이 들렸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물고기를 잡는 인생이 아니라 나를 위해 헌신하는 인생으로 만들겠다” 한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이 임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무책임하게 하나님께 미루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내 삶에서도, 나의 가정과 교회와 이웃들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자 결단입니다. 베드로는 부르심을 듣고 모범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두 번 묻지 않았습니다.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재미있는 평행이론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시작을 알리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떠나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즉시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작, 즉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나라의 시작, 제자들의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와 형제들은 그물과 배와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뜻이 내 삶에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과거의 내 삶을 지배하던 것들로부터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백성을 시작했던 아브라함이 그랬고, 교회를 시작한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는 순종합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고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습니다. 내 삶에 대한 새로운 목표와 가치가 나를 인도합니다.
2. 뜻이 성장하다. 아브람이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떠났을 때 하나님의 뜻이 그의 삶에서 성장합니다. 그 역시 하나님 안에서 함께 성장합니다. 그는 이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영적인 면모를 가지기 시작합니다. 옛 것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과정은 자신과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이 뜻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들의 삶의 성장의 흔적은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역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 9:1-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신 후 세상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막 6:12-14) 그들이 그들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그들에게 허락하십니다. 귀신을 쫓으며 병을 고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말씀을 증거할 때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조차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주님께 자신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다투어서 보고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했습니다.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했습니다. 어쩌면 “앗싸~~! 이제 나도 예수님을 따라서 가족까지 버려두고 온 보람이 있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들뜬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 조용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수많은 군중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저항과 좌절을 만나게 됩니다.
3. 저항과 좌절을 만나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선택한 이후에 단 한번도 의심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그의 삶에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장애는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후손을 잇기 위해 하갈을 선택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이 이겼습니까? 후손에 대한 그의 욕심이 이겼습니까? 그는 애굽왕 바로와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내어준 적이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안전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겼습니까? 두려움과 염려가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임하고 그를 부르고 그를 인도하고 있지만 그 뜻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로 그 안에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했지만 그 안에 아직도 남아서 그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자기 안에 숨은 저항과 좌절을 완전히 극복하는 놀라운 장면은 바로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드리는 장면에서입니다. 그는 비로소 오직 믿음만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선택을 할 줄 아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믿음의 조상과 족속은 이렇게 탄생됩니다. 수많은 군중 앞에 두시고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말씀을 나누십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눅 9:11)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갑니다. 군중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제자들도 좀 쉬고 싶습니다. 참지 못한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눅 9:12)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이적을 행하던 제자들, 이제 하나님의 뜻이 성장하고 그들 또한 성장해서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 뜻이 주님의 뜻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충만한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마음을 통해 세상으로 다시 흘러가야 하는데, 그들의 마음에서 딱~ 가로막힌 것입니다. 제자들이 앞을 다퉈서 말합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광야에서 어떻게... 남자만 5천명인데.... 돈이 어디 있어서.... 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자신들의 뜻을 만나고 있습니다.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는 왕의 마음에 대해 왕의 신하를 자청하고 있는 그들이 왕의 뜻을 거절하고 왕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합니다. 제자들이 언제 마치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예,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고 말씀을 휘두를 때입니다. 제자들이 언제 자기 안에 있는 복음에 대한 저항을 만납니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사람들을 섬길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내 이름이 나타나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사역에서는 마치 내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한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드러나지 않고 내가 섬기고 내가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의 요청에 대해 저항하고 변명하고 불평합니다. 제자들의 참된 성장은, 아니 제자들 안에 하나님의 뜻과 나라의 참된 성장은 그들의 고난의 때에 더욱 빛납니다. 교회와 성도의 성장 또한 그렇습니다. 하늘의 뜻이 성도의 삶에서 이뤄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뤄지는 것이 그 나라의 백성이요 아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심고 계십니다. 4. 뜻이 이루어지는 삶 성경은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강물처럼 흐르는 성도와 교회의 삶이 참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계속 보여주십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세 번 부인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는데,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정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를 먹이시고 다시 부르십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그를 부르셨던 주님은 이제 ‘양을 먹이라’를 명령으로 그를 다시금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시 더 뜨겁게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합니다. 베드로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한번 설교를 하면 수천명이 회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있는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눈을 피해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사도 바울의 불같은 책망을 들으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에 대해 좌절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훈련을 더 받고, 얼마나 더 연단되어야 하나님의 뜻이 강물처럼 그의 삶을 통해서 막힘없이 세상으로 흘러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 그의 삶에 일정한 패턴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성취를 생각할 때 그는 늘 좌절과 절망을 만났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통해서 공동체와 이웃을 향한 헌신을 결단했을 때 그는 성장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했을 때는 그는 자신의 성장에 집중했고, 실패했습니다. 스스로 낮아질 수 밖에 없었을 때 그를 통해 하나님이 높아지고 공동체가 성장하고 하나님의 뜻이 증거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더 훈련을 받고 더 단련해야 하나님의 뜻이 막힘없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더 많은 능력과 더 많은 재능을 가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의 삶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그의 능력과 자질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닌 그 삶에 저항하과 좌절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그러하고 우리가 그러합니다.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이뤄지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 나라에 대해 끊임없이 반역하고 저항하는 본성을 가진 내가 나를 비우고 낮추고 벗어버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질서로 나를 채우고 성령의 새옷을 입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바로 이런 결단과 헌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삶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또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를 볼 수 있고, 그가 끊임없이 저항하고 좌절하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갔음을 봅니다. 그의 삶의 주인공이 그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었음을 그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인 되고자 했을 때 절망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하실 때 하늘의 뜻이 그의 삶에서 형통케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와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결단하시고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서로에게 막힘없이 흘러가고 세상이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우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고 그 나라를 확장해가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후서 3:8~18의 말씀을 함께 읽고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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