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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1. 우리들의 기도 - 11. 예수님의 식탁 미디어선교팀 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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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1.

본 문 : 마태복음 68-10절 말씀
제 목 : 우리들의 기도 ? 11. 예수님의 식탁

 

오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두 번째로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첫 시험을 이기시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서를 잘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만날 때 함께 식탁을 나누고 먹고 마셨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비난하기를 세례 요한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는 왜 죄인들과 함께 늘 먹고 마시느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던 예수님인데 왜, 어떻게, ....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나누실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먹는 문제를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사실 먹는 것은 첫째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 활동의 에너지를 얻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늘 먹는 것과 관련해서 싸우고 죽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먹는 것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권리로부터 소외당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까?” 무엇을 위해 살까?” 라는 삶의 본질에 관련된 질문보다 가난한 자들은 무엇을 먹을까?”의 문제에, 부자들은 어떻게 모을까?”의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역사는 먹을 것을 중심으로 하는 전쟁의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식탁, 즉 먹는 문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삶의 원칙이 먹고 마시는 일에까지 원칙으로 지켜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문장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시 한번 듣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원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삶의 원칙입니다. 믿고 구원받고 천국가는 문제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며 입고 사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삶의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식탁을 통해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식탁을 네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봅시다.

 

모두의 식탁 / 만나와 오병이어

성경에서 예수님은 혼자서 무엇을 드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늘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했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나누는 식탁을 원하셨습니다.

 

함께 나누는 식탁을 가장 좋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오병이어의 이적의 현장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의 역사에는 먹을 것이 공평하게, 고르게 분배된 일이 없습니다. 인류는 늘 더 많이 먹는 사람, 더 많이 축적한 사람들이 있었고, 적게 소유하고 적게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회가 발전할수록 먹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불평등합니다. 공산주의사회가 이 불평들을 제도와 법으로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불평등을 기본적인 욕구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분배의 정의를 보여줍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은 만나를 통해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능력이 먼저 그들에게 제공됩니다. 오늘날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것입니다. 더 많이 먹고, 축적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만나는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축적할 수 있는 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식탁 위에 펼쳐질 때 만나로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먹을 수 있었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이 함께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나눔의 식탁입니다. 함께 하는 식탁입니다. 축적하고 자신을 위해 즐기는 식탁이 아니라 함께 하여 모두가 즐기는 식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식탁을 이웃과 함께, 성도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나누는 모든 식탁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식탁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2. 생산보다 분배 / 부자와 나사로

 

그러나 한편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나눔이 없는 식탁의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눔이 없는 식탁, 누구의 식탁일까요?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두텁고도 높은 벽이 존재합니다. 이 벽은 어쩌면 서로의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내가 나사로를 이웃으로 삼지 않은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대궐같은 집 안에서 살았고, 그는 집 밖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자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그는 그렇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나사로의 편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딱히 선을 행한 것도 아니요, 부자가 딱히 악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각 부자와 거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사로를 품으시고 부자를 지옥에 벌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람이 사용할 뿐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잘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내게 허락된 다소 불균형한 부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따라 사용하고 나누어야 할 책임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의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 가운데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었고, 나사로는 다행히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부자는 책임을 행하지 않았고, 나사로는 책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이 땅에서의 불평등과 고난을 하나님의 품에서 보상받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회의 책임에 대해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렇게 게으르고 어리석으니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부와 풍요함이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성실함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합시다. 좀 더 신앙으로 해석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빌려 사용하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내가 만든 부와 풍요가 아니라 나의 노력에 대해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과 양심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닮은 사랑과 거룩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식탁에 대한 주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풍성한 식탁은 이웃의 가난한 식탁과 더불어 끊임없이 평균케되어야 합니다.

 

3. 용서와 화해를 먹고 마시다. / 탕자의 식탁

 

전도사 시절에 한번은 어느 권사님이 식사를 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음식이 우리 안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어 우리를 섬기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녹아져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참 좋지 않습니까? 음식이 우리 안에 들어가서 서로 섞이고 소화되어 우리의 몸을 섬기고 힘이 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섞이고 화합하고 결합하고 연결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16에서 바울은 교회에 대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라는 식탁은 이렇게 서로 화합하고 연결하여 서로를 자라게 하고 세워주는 공동체입니다. 허물과 죄를 덮고 부족함과 연약함을 덮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탕자의 잔치입니다.

 

그는 이 식탁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을까요? “, 그렇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어느 답이 맞을까요? 먼저 그는 자격이 없습니다. 이 식탁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는 죄를 범했고 더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형님조차 그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함께 하는 식탁 ? 그 어떤 정죄도 없고 손가락질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용서만이 있습니다. 화해와 연합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용서와 화해의 식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직접 구운 고기와 떡을 주시면서 그들을 먹이십니다. 정죄가 있습니까? 책망이 있습니까? 오직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고 먹이시는 식탁입니다. 비로소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4. 나를 헌신하는 식탁, 성찬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러한 화합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식탁에는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본질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의 핵심, 그것은 바로 성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주님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성찬이라는 식탁에서 예수님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요? , 그것은 스스로 밥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나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하나가 되라. 그리고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고 나의 말씀을 기억하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성찬에 대한 메시지는 이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최초의 성찬은 식사였습니다. 이후 초대교회 또한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징적으로 작은 것을 먹고 마시지만 초기에는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플 때 주님의 기억했고, 먹어서 배부를 때 주님의 채워주시는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밥과 국이 되신 것을 기억하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녹아들고 소화되고 우리의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위해 밥이 되고 국이 되어 서로에게 녹아들고 소화될 수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서로를 세우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 일에 먼저 본을 보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먼저 음식이 되십니다. 우리의 밥이 되십니다. 우리의 국이 되십니다. 우리를 위한 떡과 포도주가 되어 우리 안에 들어와 녹아집니다. 우리의 영적 에너지가 되고 우리의 영적 근육이 되며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요리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여러 재료를 사용해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혹 어떤 성도들은 시식을 하고 싶어합니다. 만들어진 요리를 즐기고만 싶습니다. 하지만 밥이 되려 하지는 않습니다. 국이 되려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떡과 포도주가 되시고, 국이 되고 밥이 되셨는데 우리는 계속 요리하고 먹으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여전히 예수님의 희생만 올려져있습니다. 모두 둘러 앉아 예수님의 희생만을 즐기려 합니다. 건강하고 좋은 식탁일까요?

 

예수님의 식탁은 스스로 밥이 되는 식탁입니다. 그 식탁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밥이 된 것처럼 너희도 나를 기념하여 함께 밥이 되고 함께 국이 되는 삶을 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희생하고 헌신하는 식탁이요 함께 연합하고 결합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식탁입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이웃을 살리는 식탁입니다. 자신의 헌신으로 형제를 섬기는 식탁입니다. 그 식탁에 천국의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교회와 성도에게 허락하신 네 가지 종류의 식탁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식탁은 모두의 식탁, 나눔의 식탁, 용서와 화해의 식탁, 그리고 스스로가 밥이 되는 식탁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교회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를 축적하여 세상을 호령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다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인 식탁이 그 어떤 식탁이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인줄로 알아서, 모두가 함께 나누며 섬기며 사랑하며 스스로 수고하고 헌신하는 식탁,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시 한편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말씀과 더불어 시가 주는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정일근이라는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라는 시입니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판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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