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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 우리들의 기도 - 12. 용서, 권리와 의무 사이 이응도 목사 201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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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4.

 

본 문 : 마태복음 69-12절 말씀

제 목 : 우리들의 기도 12. 용서, 권리와 의무 사이

 

애들을 키우면서 찍어놓은 영상 중에서 성일이 땡깡 영상’(영상1)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있습니다. 성일이가 두살 쯤 되었을 때 한참 자의식이 생기고 고집을 피울 때 찍어놓은 것입니다. 다 아시듯이 워낙 캔디와 초콜릿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날도 엄마가 숨겨 놓은 초콜릿을 달라고 하는 성일이와 줄 수 없다는 엄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저까지 합세해서 성일이의 초콜릿을 향한 땡깡을 무마시키면서 영상에 담았습니다. 그 영상의 마지막에 제가 성일이에게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네가 크면 이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그 영상을 성일이에게 보여줬습니다. 떼를 쓰고 고집을 피우는 모습, 울며불며 초콜릿을 달라고 조르는 모습... 여러분! 제가 왜 그리고 언제 이 영상을 성일이에게 보여줬을까요?

 

사실 성일이는 형 가일이에게 비해서 저희 부부의 관심을 좀 덜 받은 편입니다. 가일이는 7-8년을 외동아들로 자랐지만 성일이는 태어나면서 벌써 형과 사랑을 나누어가져야 했습니다. 좀 있다가 승하가 태어난 다음에는 더 그랬습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성일이에게는 좀 힘든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승하가 성장하면서 성일이의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성일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일단 내꺼야!”라고 선언하고 보는 승하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성일이를 좀 가르치고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일이를 달래는 것은 우리 부부가 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이었고, 성일이를 가르치는 것은 어린 아기들은 누구나 승하처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일이 자신이 승하만 할 때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성일이에게 땡깡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성일이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성일이가 처음 보인 반응은 오우~~”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물었습니다. “아빠, 저거 나야?” “, 너야...” ‘내가 정말 저랬어?“ ”그래, 니가 저렇게 땡깡을 부렸어...“ ”오우~~“ 성일이가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계속 영상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승하를 그윽하게 바라봤습니다.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승하가 깔깔대고 웃고 있었습니다. 성일이가 그런 승하와 영상을 번갈아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우~~~“

 

성일아, 원래 아기들은 저렇게 하는거야... 그런데 성일이처럼 형아가 되고 오빠가 되면 이제 안그래. 땡깡도 안부리고 고집도 안피우지... 승하가 지금 성일이한테 그렇게 하는 건 아직 승하가 베이비라서 그런거야. 좀 있으면 괜찮아질거니까 성일이가 좀 참아주면 안돼?”

 

성일이의 고개가 끄덕였습니다. 뭔가 대단한 결심,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승하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 자녀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습니다.

 

1. 빚 진 인생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십니다. 지금처럼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시에 천국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어린 아이를 앞에 데려다 놓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고 말씀하셨습니다. 양 일백마리 중에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한 목자의 관심을 비유로 들려주시고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8:14)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의 삶이 이 땅 가운데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천국의 삶이요,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바로 용서에 관한 질문입니다. 과연 몇 번 용서하면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시는 비유의 말씀이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만달란트 빚진 신하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신하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면서 백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왕을 제외한 두 사람의 삶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 빚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일백 데니리온 빚진 사람이 왕에게 얼마나 빚이 있는지를 모르겠지만 그들은 왕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사람이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바로 우리들 모두가 빚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전적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이 빚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하고 이것은 죄의 용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2. 거룩한 의무 - 용서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우리들이 서로에 대해서도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 용서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다시 주십니다.

 

14-15절을 봅시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서 용서를 말씀하시고 바로 용서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용서라고 하는 덕목이 인간 사회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5장에서 이미 이 원칙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5:23-26) 예수님께서 성도의 예배와 기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예배와 기도에 합당한 삶을 먼저 서로에 대해서 살아가는 것이고, 가장 구체적인 행위로서 용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들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선행되는 권리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도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의무를 최선을 다해 행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성도로서의 거룩한 의무보다 앞서는 것, 그 의무를 행하기 전에 먼저 주어진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는 자녀된 권리, 천국 백성으로서의 권리, 좀 부족하고 못나도 그 자격이 박탈되지 않는 권리입니다. 그 권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와 교회는 이 거룩한 의무와 그 의무보다 앞서는 권리 사이에 살아갑니다.

 

성일이와 승하가 다툽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로가 아빠에게 달려옵니다. 성일이가 말합니다. “아빠, 승하가....” 승하가 말합니다. “아빠, 성일이 오빠가....” 여러분, 이 두 자녀는 자신들에게 있는 권리를 먼저 찾은 것일까요? 의무를 먼저 행한 것일까요? 권리라면 저의 자녀이기 때문에 보호를 요청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발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의무라면 남매지간에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자녀가 서로 저의 자녀된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가 10대가 되고,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어도 여전히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게 될까요? 적어도 지금 가일이의 나이 쯤 되면 아들로서의 권리와 형제로서의 의무가 함께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형제에게 잘못을 범하면 부모로부터 꾸중을 듣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를 섬기는 마음을 자발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조화와 균형은 자녀의 성장과 더불어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때로 자녀들이 성숙하지 못하여 의무와 권리 사이에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권리를 박탈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요, 더 많이 의무를 행했다고 한들 그 의무가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4. 서로 용서하라, 함께 행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미 용서받고 은혜 가운데 있는 자녀들의 권리를 먼저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자녀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성도와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용서와 사랑은 확증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허락하신 권리를 누리며 살고, 또한 거룩한 의무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자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의 부르심과 사랑의 택하심 가운데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그들은 이제 서로를 섬길 거룩한 의무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함으로 교회를 이룰 것을 부탁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허락하신 용서와 용납이 없으면 서로 결합할 수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섬기면서 지체된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용납하며 품지 않으면 먼저 그의 마음이 불행하고, 그가 만드는 모든 관계가 불행하고, 하나님의 마음까지 그 불행이 전달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드는 불행이 하나님께 전달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도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말씀 드린 대로 이 기도는 이미 용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자녀의 권리를 가진 성도들이 기도입니다. 이미 자녀되었으므로 용서의 거룩한 의무만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함으로 만들어내는 불행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용납하여 우리의 마음에 있는 참된 평안과 행복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세 자녀가 부모가 주는 사랑 안에서 잘 자라나면 좋겠습니다.(사진1) 몸과 마음이 성장할수록 서로를 더욱 아끼고 사랑해주면 좋겠습니다. 험한 세상 가운데 서로를 의지하면서 가장 좋은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모인 제가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보실 때 그렇지 않겠습니까?(사진2,3,4)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를 다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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