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5. 우리들의 기도 - 14. 악에서 구하소서 | 미디어선교팀 | 2013-09-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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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5.
본 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제 목 : 우리들의 기도 ? 14. 악에서 구하소서(1)
지난 주 우리가 함께 Q.T를 했던 사무엘상 24~25장을 보면 다윗에 대한 좀 생각해야 할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서 광야에서 낭인 생활을 합니다. 그가 가는 길은 참으로 험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받아서 주린 배를 채웠는데, 사울왕이 그것을 알고 아히멜렉이 있던 놉 지역의 제사장만 85명을 죽였고,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도 죽였습니다.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망명해서 생명을 구하려 했는데 오히려 위험에 처합니다. 그는 침을 흘리면서 미친 척 합니다. 겨우 목숨을 구해서 광야 아둘람 굴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의 주변으로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400여명의 용사들이 다윗을 따릅니다. 사울왕은 여전히 다윗을 추격합니다. 오히려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도 있는 기회를 잡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스스로 해치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마음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무엘상 25:1-2를 봅시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삼상 25:1-2)
성경은 왜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이 두 사건을 차례로 기술하고 있을까요? 이 두 사건을 다윗의 영적인 상태와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무엘과 함께 있을 때는 그의 인생에 어떤 악한 일이 다가와도 말씀의 원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습니다. 다윗이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나발이라는 부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양이 3000마리, 염소가 1000마리 있었다면 대단한 부자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군사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나발은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자,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은 분노합니다. 군사를 이끌고 나발의 가족을 멸족시키겠다고 달려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도움을 거절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다윗에게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다고 해서 제사장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을 죽인 사울왕의 악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지금 꽤 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1. 악에게 희생당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 함께 나누실 하나님의 말씀은 주기도문 가운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주 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라는 기도에 대해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은 환경의 유혹에 대해 반응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그 열쇠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시험에 빠집니다. 시험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는 죄를 범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을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권력의 시험에 빠진 사울왕은 다윗에게 위협적이며 넘어설 수 없는 악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도하되, 그런 “거대한 악에서 성도와 교회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보스톤 마라톤 폭발 테러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건을 접했을 때 저는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이 있습니다.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서 올라간 박명희 권사님의 아들과 권사님, 그리고 보스톤에서 대학을 다니는 기선이와 정운교 목사님의 아들인 준성이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안전하기를 기도했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봤습니다. 물론 모두 안전했습니다. 이후에 박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가까운 곳에서 폭발물이 터졌더군요.
지난 주에도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테러 사건과 폭력적 시위 진압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의 생명과 같은 가치를 가진 생명입니다. 다만 사회적인 악, 혹은 그 어떤 사람의 악함에 희생당한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우선 “악에 희생당하지 않게 하시옵소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저는 이 기도를 드릴 때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 지도했던 양영현이라는 청년입니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서울의 한일합섬에 취직을 했습니다. 약 12년 전, 서울 김동호 목사님이 시무하던 높은 뜻 숭의교회의 찬양리더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실적도 좋아서 ‘올해의 사원’에 뽑혔다고 자랑하는 메일도 왔습니다. 그리고 삼성의 비서실에 있는 예쁜 자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신문에 서울에서 한 신혼부부 가정에 강도가 들어서 남편이 가슴에 칼을 맞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도 있구나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그 형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합니다. 그 악은 우리를 넘어섭니다. 강하고 사악하기도 합니다. 함께 서로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악에 그저 의미 없이 희생당하는 슬픈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악에 이름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유대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정복 전쟁에 용병으로 잡혀가기도 하고, 끊임없이 일어났던 로마에 대한 반란으로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악이 우리를 압도하고 위협할 때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우리를 보호해 주십시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십시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성도의 기도요, 교회의 기도입니다.
2. 악의 편에 서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이 기도는 한 단계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고신 교단은 그 탄생 배경에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대부분의 조선 교회가 일본의 황국신민화정책에 굴복했을 때 고난과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려 했던 소수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해방 후 출옥하여 세운 교단이 저희 고신 교단의 출발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탈하고 36년간 지배하던 시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19년에 있었던 3.1.절 만세 운동입니다. 그 일을 주도했던 민족 지도자 33인이 있습니다. 천도교와 기독교와 불교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 중에 기독교 대표였던 정춘수(鄭春洙)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3.1 만세 운동 당시 함경남도 원산의 한 교회에 시무하고 있었고,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후 자기 발로 자수했습니다.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한 그는 한동안 독립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 대 중반 일본의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강화되고 지식인들에 대한 다양한 설득 작업에 넘어가게 됩니다. 1938년 5월 그는 교회를 통한 황국신민화를 위해 만든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에 선출됩니다. 그해 10월 일본 도쿄에서 조선감리교회와 일본 감리교회와의 합동을 논의하고 감리교 황민화에 앞장섭니다. 일제 말기 그의 친일행적은 극에 달합니다. 목회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의 자리에 있던 그는 국민총력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침략전쟁에 나간 일본군을 위한 특별기도는 물론 국방헌금과 무기제조를 위해 교회당의 철문과 교회 종(鐘) 헌납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44년 그는 감리교 소속 일부 교회당을 팔아 감리교단 명의로 비행기 3대를 헌납했습니다. 해방 후 그의 친일행적이 교단 내에서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다가 1949년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친일파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신앙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악에게 설득당합니다. 악에게 희생당할 뻔하던 위기를 넘겼던 그는 오히려 악에게 설득당하여 악의 편에 섭니다. 신앙을 배반합니다. 하나님보다 일본의 신에게 먼저 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팔아 일본의 식민지 정복 전쟁을 돕습니다. 교회의 종을 팔아서 총탄을 만드는 일에 앞장섭니다. 민족을 배반합니다. 청년들을 몰아서 전쟁터로 내보냅니다. 조선을 팔아서 황국, 즉 일본화하는데 앞장섭니다. 그는 악에 희생당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다가 자신이 오히려 악의 편에 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 자주 일어납니다. 악에 희생당하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사이에서 흔히 이런 일이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친구를 왕따 시키는 일에 동참합니다. 가쉽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가쉽핑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의한 편에 서버리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악의 편에 서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악에 대해 담대해질 수 있도록, 불의에 대해 용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옳지 않은 일에 담대하게 No 할 수 있도록,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불의와 악의 편에 서서 자신을 보호하는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말입니다.
3. 악보다 더한 악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 기도의 의미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다윗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경험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그를 전쟁터로 보냅니다. 다윗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면서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고 돌아올 것을 권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어서 그를 죽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공했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셔서 200명의 블레셋 군대를 죽이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왕의 악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납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성경은 처음으로 다윗의 어두운 면을 기록합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고, 계속된 정복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제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요압 장군에게 전쟁을 맡겨도 되는 때가 왔습니다. 그는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야라고 하는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보게 됩니다. 밧세바와 동침한 후 임신을 하게 되자 자신의 죄를 숨기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전에 경험으로 학습했던 악, 사울왕이 자신에게 행했던 악을 우리야에게 행합니다. 대장군 요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야를 선봉에 세우고 적진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다른 모든 군대를 물리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야는 영문을 모른 채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성경은 처음으로 다윗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下)
때로 우리는 억울하고 분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악에 맞서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악보다 더한 악이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더 처절하게 복수하고 더 악한 방법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행해지는 악에 의해 그 악보다 더한 괴물이 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요셉의 형님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죽이려하고 팔아넘긴 것은 아버지가 우리들을 제대로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로서 저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아버지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파괴시켰습니다..... 형들은 이렇게 변명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님들은 스스로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경험했던 악보다 더한 악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세상의 악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켜서 악을 능동적으로 즐기는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한 악보다 더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인격은 초겨울 얇은 살얼음보다 더 약해서 바람과 풍랑이 없을 때는 마치 견고한 것 같지만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깨지고 작은 바람과 파도에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4. 주여, 우리를 악에서 건지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우리들 성도와 교회의 연약함 또한 잘 아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해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셔서 우리가 시험과 유혹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악에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를 도우시고 구해주십시오.” 날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새롭게 하는 성도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어떻게 악에서 구해주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던 여러 시험을 이겨냈던 그는 자신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발이 자신을 무시하고 도발하자 감당하지 못하는 분노로 그를 멸족하기 위해 말을 달려갑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울왕에게 당했던 모든 악이 자신보다 연약했던 나발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 한 여인을 보내십니다. 참으로 지혜로웠던 여인 아비가일입니다. 그는 나발의 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발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아비가일을 감동시키십니다. 부드럽고 겸손한 말로 다윗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다윗과 그 군사들을 먹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내신 한 여인을 통해 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구함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아비가일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윗이 나발을 죽이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울보다 더 악한 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서 떠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준비하셔서 다윗을 악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늘 요셉의 고백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50:19-20에서 요셉은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삶의 가능성에서 요셉을 구하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날로 악해져가는 세상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함께 드리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로에 대해 시험과 악에서 구하심을 받는데 사용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주님이 허락하신 기도가 우리의 삶에서 풍족하게 응답되는 교회와 가정과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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