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13 중심 잡기 3. ‘Dignity’ - “너 하나님의 사람아!” | na kim | 2013-1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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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디모데전서 6장 11-12절 말씀 제 목 : 중심 잡기 ? 3. ‘Dignity’ - “너 하나님의 사람아!”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1절 정도에 해당하는 나레이션과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6f1ZCkYxyqs)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 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최근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요즘은 킬리만자로에는 야생 동물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곳에 살던 표범 이야기는 전설이 된 것이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에는 대표적인 두 맹수가 있는데, 하나는 표범이요 다른 하나는 하이에나입니다. 하이에나는 먹을 것을 찾아서 산기슭을 헤매고 다니다가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자기가 사냥한 것이든 남이 사냥한 것이던 일단 빼앗고 먹고 보는 동물입니다. 하지만 표범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것은 먹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냥하지 않은 것도 먹지 않습니다. 차라리 눈이 덮인 산 언덕에 올라가 굶어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혹은 손주들에게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대해 들려주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교훈을 주고자 했을까요?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격려하면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불렀을까요? 디모데는 젊어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충성되고 헌신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지만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먼저 자신은 아직 목회자로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1세기에 사도들을 제외하고 전문 목회자로서 처음 세움을 받은 일꾼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전문적인 훈련의 과정을 경험했으면 좋았을텐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나이가 젊다보니 무시당하는 일도 많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교회를 핍박합니다.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이단들 또한 많아서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디모데는 용기백배하여 더욱 열심히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까요? 아니면 힘과 용기를 잃고 헤매게 될까요? 아마도 디모데는 힘든 목회 현장에서 좌충우돌하다가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같습니다. 못해먹겠다고 불평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든다고, 이단들이 감당이 안된다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는 성도들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과 힘든 일들 속에 있는 디모데를 권면하면서 바울은 먼저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왜 바울은 구체적인 답을 주기 전에 먼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렀을까요? 실은 그 속에 모든 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면 그 연결하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세상에는 욕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멸과 멸망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어도 탐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악을 행합니다. 결국 믿음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해치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악하고, 교회 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습관과 옛사람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믿음과 관계없는 삶을 삽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있습니다. 허덕이면서 지친 모습으로 성도들과 교회를 섬깁니다. 바울은 그를 이렇게 격려합니다. “디모데야, 우리 잊지 말자... 너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더냐? 세상이 저렇게 사는 것은 저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요, 너와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디모데야, 우리는 이런 욕심을 따라 살아가지 말자. 우리는 오직 영생을 위해 살아가자. 우리가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았단다.” 2. Dignity!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참 좋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단어를 마음에 두고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바로 ‘Dignity’라는 단어입니다. ‘존엄성’(尊嚴性) 혹은 ‘품위’(品位) ‘품격’(品格)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철학자 칸트가 사람의 가치를 설명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존엄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때는 그 자신에게 허락된 존엄함을 지킬 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권면하면서 가장 먼저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존엄하고 귀한 디모데의 품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언제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그저 세상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때입니다. 그 때 가장 큰 능력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 가운데 목적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의 인생이 가장 빛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고민과 유혹은 그에게 맞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방황과 좌절 또한 맞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품격,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품위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9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왜 이러한 잘못된 신앙과 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품격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옛사람의 옷을 입고 허우적대면 안되는 것일까요? “에이....하나님의 사람인데....” 왜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에이...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시기하고 질투하면 안될까요? 왜 거짓말하고 욕심을 부리면 안될까요? 왜 부정과 비리와 거짓과 가까이 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쪽팔리니까요! 하나님의 자녀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인데...” 하다못해 뒷골목의 건달도 소위 ‘가오’가 있어서 쪽팔리는 일은 안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그래, 너 에수 믿고 살기 힘든 거 안다. 그런데 잊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탐욕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으로 사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영생이라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치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다.” 12절을 함께 읽으실까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이 한 절의 말씀 안에 디모데가 걸어야 할 길이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허락하신 가치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으로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삶을 헌신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3. 율법을 주시는 이유 하나님은 그 백성 이스라엘을 조상에게 약속하신대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이것보다 더 큰 복과 은혜가 있을까요? 어쩌면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만일 영적으로 지혜롭고 담대하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에게 성경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요셉은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下) 세상은 요셉의 Dignity를 짓밟으려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Dignity를 결코 빼앗기지 않습니다. 요셉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400년간 믿음을 저버리고 살았고, 허다한 많은 종속들도 함께 출애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그들의 삶에 경계를 만드셨습니다. 결국 이런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이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알려주겠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까요? 예, 그들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원칙을 알려주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지침을 알려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땅과 구원을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품격 있는 삶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아셨던 하나님은 구체적인 말씀을 주셔서 그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무엇인지 경계도 만들어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른 어느 민족에게는 없었던 놀라운 Dignity를 허락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짓밟았습니다. Dignity를 지키기 위한 경계를 허락하셨지만 그것도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경계가 없는 삶을 살았고 결국 나라를 잃고 은혜를 잃고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디모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이제 훌륭한 목회자로 교회를 건강하게 잘 세우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디모데의 그 이후에 대해서 소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 편지를 우리들 모두에게 읽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 사실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쓰신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Dignity를 허락하시고 율법을 통해서 삶의 경계를 그으셔서 그들의 존엄을 지키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일꾼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Dignity를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삶의 경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왜 눈이 덮인 높은 산에 올라갔을까요? 그것이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기 때문입니다. 표범이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셉은 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을까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그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바울은 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했을까요? 예, 그것이 그의 인생을 가장 가치있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이 세상을 살면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왜 말씀으로 살아야 할까요? 왜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까요? 왜 욕심과 필요가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와 비전이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들이 그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다툼과 오해와 분열이 아닌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섬기는 일을 계속해야 할까요? 왜 세상은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헌신하고 섬기고 나누는 일에 기쁨을 찾으려고 할까요? 왜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하고 헌신하고 시간과 재정과 삶을 나누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하는 것일까요? 예,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에 우리의 삶의 기준을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우리의 삶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표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오늘 서로 마주보고 손을 잡아 봅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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