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14 하나님의 사람들 - 1. 복음적 분업 | na kim | 2014-0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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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17장 1-16절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1. 복음적 분업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옷핀을 만드는 공장에서 아주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능숙한 숙련공이 하루 종일 모든 공정을 혼자 감당해서 핀을 만들면 최대 하루에 20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나누어서 철사를 운반하는 사람, 알맞은 길이로 자르는 사람, 끝을 날카롭게 다듬는 사람 등 작업 과정을 20단계로 나누어 일을 맡겨 보니 하루에 일꾼 한 명당 8,800개의 핀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공장 노동에 분업의 개념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후 모든 산업은 급속하게 분업화되었고, 생산력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합니다. 물론 모든 분업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마치 기계의 부속처럼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기계와 벨트가 돌아가고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만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24시간 기계를 돌리면 사람은 그 기계에 맞춰서 시간을 나눠서 일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고 말씀의 제목을 ‘복음적 분업’이라고 정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실은 교회에서도 우리는 분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업은 조금 전에 설명드린, 기업에서의 생산을 위한 분업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분업은 각각 다른 은사와 직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오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가 어떻게 복음적으로 분업하여 일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그림 하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 적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르비딤이라는 광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두 가지 심각한 적과 대면하게 됩니다. 하나는 물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말렉이라는 광야 민족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물이 없는 것은 광야에서 큰 문제입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라 남자 장정만 60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행동을 해석하기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7)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는 현실 앞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의 한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멜렉이라는 광야 민족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성경이 아멜렉이 시작한 전쟁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출 17:8)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물 부족이라는 위기 앞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일과 아멜렉의 침략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때에~”라는 말은 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 물 부족과 지도자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겹쳤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 큰 적 자, 여러분.... 대답해주시겠습니까? 물이 부족한 것과 아멜렉이 침공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적이요, 더 큰 문제일까요?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열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번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을 400년간의 노예적인 삶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해도 오히려 그들은 모세를 쉬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여 출애굽시키십니다. 출애굽한 그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섰을 때, 앞에는 출렁이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애굽의 기병들이 말달려 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2)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15장 하반부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3일을 헤매었지만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샘을 발견했지만 바로 짠물, 즉 소금물이 샘솟는 곳이었고, 그곳에서도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물을 단물로 만들어주셨고, 또 그들을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로 인도하십니다. 16장에 넘어가면 그들이 신광야에 이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다시 원망을 시작합니다. 심지어 거짓말까지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2-3) 정말 그들이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던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노예였고, 죽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금 거짓말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원없이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7장에서 그들은 르비딤 광야에 있습니다. 다시 그들은 시험을 만납니다. 물이 없습니다. 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그들은 이미 수많은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려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그들을 해친 적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거대한 적군도 물리치셨고, 홍해의 붉은 바다도 가르셨고, 마라의 쓴물도 단물로 만드셨고, 하늘에서 먹을 것도 내려주셨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여정에서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정도 공부했으면, 그정도 경험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다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물도 아니고 아말렉도 아닙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것, 그들 자신이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필요와 두려움과 염려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것 – 바로 그것이 그들이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가장 큰 적이자 원수입니다. 복음적 분업, 하나님의 전략 출애굽기 17장 8-16절의 장면은 영화와도 같습니다. 그들은 아직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훈련도 받지 못했고, 정복 전쟁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도서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400년을 노예로 살았던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아말렉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전쟁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택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수아는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여 전쟁에 나갑니다.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기도합니다. 놀랍게도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하면 이스라엘의 오합지졸이 이기게 되고, 80이 넘은 노인 모세가 팔이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아론과 훌은 이것을 보고 돌을 들어서 모세를 앉힙니다. 그리고 양쪽에서 팔을 들어서 모세의 기도의 손이 떨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해가 지도록 모세는 기도했고,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을 들고 있었고, 여호수아는 오합지졸들을 지휘하여 싸웠고, 또 선택된 이스라엘의 오합지졸들은 모세의 기도의 도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길 때까지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모두를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그들은 전쟁사에 없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기도를 돕는 사람이 필요하고 싸우는 사람이 필요하고 싸움을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일하셔야 했습니다. 복음적 분업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각자 받은 은사와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함께 이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이라는 거대한 적을 만나서 비로소 이스라엘 자신 안에 있는 적이 아닌 그들을 해치는 적들과 싸우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그들은 구경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대신 싸우고 그들이 구경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 했습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했습니다. 모세가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아론과 훌이 도왔고, 여호수아가 혼자 싸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군사와 함께 싸웠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와 용기를 들려줬습니다. 복음적 분업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각자가 받은 은사와 직분으로 협력하여 이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수준 높은 전략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련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원망한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아셨기 때문에 한번도 그들에 대해 진노하시거나 책망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성경은 이스라엘이 고비를 넘길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셨던 영적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4:18에서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서 물리치시면서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출 1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라에서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고 가르치십니다. 굶주려 불평하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 16:11-12)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고난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르비딤 광야에서 물을 내리신 후 그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 7절을 봅시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하닌가 하였음이더라”(출 17:7)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시험과 원망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시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살 길을 내어주시고 그 길 위에 교훈을 주셨지만, 이번 르비딤에서 샘을 터뜨리시고는 아직도 그 교훈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아말렉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성경은 ‘그때에’라는 말로 아말렉과의 전쟁이 때에 맞게 적시에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이 반복되는 고난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도 다시 만난 고난 앞에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할 때입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다시 메마른 광야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을 때입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셔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던졌던 질문이 있습니다. 출 17:7에서 무엇이라 했을까요?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그 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전에 문제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저 원망했습니다.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영적인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르비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을 합니다. 여호수아도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을 합니다. 아론과 훌도 그들이 맡은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오합지졸도 그들이 맡은 역할을 끝까지 감당합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와 직분과 사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이스라엘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한 오합지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모세는 단을 쌓고 그 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싸우기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싸웠는데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 증거가 승리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사실 저는 가끔 다른 교회를 방문하고 말씀을 전하거나 세미나를 할 때 우리 교회에 대해 많은 감사를 드리는 편입니다. 제가 참 좋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민 교회의 성도들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들의 필요 중심의 신앙생활, 문제 중심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미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명의 모세에게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세가 실망을 주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교회를 옮깁니다. 서로가 함께 도와서 일하지 않습니다. 몇몇 주전 선수들이 일하고 대부분은 관객이 되어 출석교인으로 남습니다. 동분서주하는 소수의 모세들과 다수의 관객들이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어떤 문제를 만나도, 어떤 사명 앞에서도, 어떤 project가 주어져도 ‘서로가 함께’ 직분과 은사와 사명을 따라 복음적으로 분업할 줄 아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각자의 위치와 능력을 따라, 각자의 삶의 정황과 열심을 따라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섬기며, 시대와 지역을 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수많은 아말렉을 이기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르비딤 광야와도 같습니다. 늘 메마르고 늘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길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적으로 분업하고 협력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가정과 삶에 ‘여호와 닛시’가 되십니다.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고 바위에서 물을 내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로 만들어주십니다. 언제 말입니까? 우리가 함께, 서로가 함께 은사와 직분과 사명을 따라 함께 순종할 때입니다. 메마른 광야의 이민 생활, 복음적 분업으로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섬기는 초대교회와 성도가 되셔서 여호와 닛시의 삶을 누리는 우리들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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