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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4 하나님의 사람들-3.함께 웃고 함께 울라 na kim 201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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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9.

 

본 문 : 로마서 1215절 말씀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3. 함께 웃고 함께 울라.

 

루빈 카터(사진 1)라는 복서가 있습니다. 그는 허리케인 카터('Hurricane' Carter)라고도 불립니다. 뉴저지 패터슨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인종차별을 당하여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20대에 석방된 그는 새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복싱에 전념합니다. 모든 분노를 주먹에 실어서 링에 올랐고 연전연승합니다. 웰터급 세계 챔피언에 오릅니다. 곧 미들급 챔피언에 도전했지만 결정적인 편파 판정으로 실패합니다. 잠시 방황하던 때 백인 3명이 총격을 당해 죽은 사건에 용의자로 지목되어 조작된 증거물에 의해 무기징역을 선고 받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항소를 계속하지만 두 번에 걸쳐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16 라운드(The 16th Roung)'라는 자서전을 집필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원망,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차별과 억압에 대한 억울함을 담았습니다.

 

같은 뉴저지에 살던 레스라(Lesra)라는 한 흑인 소년이 캐나다로부터 환경 운동을 하기 위해 온 세 명의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레스라가 마약 중독자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여깁니다. 레스라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캐나다로 데리고 가서 함께 생활합니다. 레스라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새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루는 레스라가 독서에 필요한 책을 사기 위해 헌책방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상적인 책 한권을 발견합니다. 그 책은 바로 루빈 카터의 16라운드였습니다. 레스라는 그 책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루빈 카터에게 편지를 씁니다. 둘은 곧 감옥의 면회실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됩니다.

 

루빈 카터는 레스라와 세 명의 캐나다 청년들의 도움으로 다시 항소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뉴저지 법원에서는 더 이상의 항소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밝히려고 노력했던 루빈 카터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레스라와 세 명의 청년에게 전화를 합니다. 더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절망의 깊이와 시간에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기대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카터에게 전화가 옵니다. 레스라와 청년들이었습니다. 교소도 창 밖을 내다보라고 말합니다. 건너편 아파트 건물의 한 창가에서 네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레스라와 세명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석방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그는 다시 용기를 얻고 그들과 함께 일을 시작합니다. (영상1)

 

마지막으로 그는 연방 법원에 상고를 하는 큰 결정을 합니다. 세명의 청년들은 루빈 카터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와 뉴저지 법정의 불법적 판결의 증거를 찾아냈고, 연방법원은 19857월 루빈 카터의 무죄를 선고하고 즉각 석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뉴저지 법원이 항소했지만 대법원은 기각합니다. 그는 1993년 세계 복싱 연맹으로부터 챔피언 미들급 챔피언 밸트를 수여받았고, 캐나다로 가서 세명의 청년들과 함께 부당하게 수감당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제가 지난 주에 본 영화 허리케인(사진 2)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는 루빈 허리케인 카터라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인종 차별로 억울하게 22년을 감옥 생활한 일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1.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두더니 사랑이 나를 자유케 하는구나

 

제가 조금 전에 보여드린 이 장면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장면에서 가장 깊은 절망과 가장 적극적인 사랑이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절망적입니다. 도저히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사방이 가로막힌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8절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영화를 보면, 카터는 독방에 갇혀서 시편 23편을 묵상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는 또한 자신이 이름이 야곱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에서 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니다. 루우벤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가 낳은 장남입니다. 레아는 이 아들이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던 모든 설움을 씻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짓기를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라고 지었습니다. 루빈 카터는 이 이름을 기억하며 고통을 이깁니다. 언젠가 자신도 하나님께서 보라... 내 아들이라!”고 선언하시고 세상에 자신을 자유케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씀을 묵상해도 점점 상황은 어려워집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갑니다. 22년이 흐릅니다. 마음을 다잡고 말씀을 묵상하고 독하게 견디려는 결심만으로는 이 긴 고통의 시간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바로 이 때, 레즈라를 비롯한 세사람이 그에게 나타납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루빈 카터를 위해 레즈리와 세 사람을 준비하셨고, 가장 깊은 절망에서 가장 책임감있는 사랑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루빈 카터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절망할 때에 세 사람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후에 루빈 카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두더니 사랑이 나를 자유케 하는구나 그는 자신과 함께 울고 웃는 네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서 삶의 희망을 회복합니다. 이 네 사람은 그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 좋은 이웃들입니다.

 

2. 울음 우는 사람들, 절망하는 세상

 

지난 주 여러분 모두 안녕하셨습니까? 아마 저희 가정과 윤장로님 가정, 그리고 이정욱 집사님 가정을 마지막으로 전기 시설을 다 회복된 것 같습니다. 혹시 아직 복구가 안된 가정이 있습니까? 지난 번 허리케인 샌디가 몰아쳤을 때에도 많은 가정들이 교회당으로 모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교회를 통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고, 자신의 가정으로 서로 오라고 초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참 넉넉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만난 어려움보다 함께 어려움을 나누려는 성도들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런 정도로 어렵다고 말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예기치 못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갑자기 당하는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을 생각해보시겠습니까? 로마서가 기록된 AD. 57년 경은 지중해 근방의 많은 선교지에서 박해기 시작되던 무렵입니다. 1:14에 보면 이미 로마에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이후 로마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면서 AD. 64년에는 네로 황제의 대규모 박해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제 1차 박해에서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박해가 심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로마 시대의 방화를 기독교인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시작된 이 박해에서 잔학했던 네로는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태워서 자신의 정원의 불을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중에서도 교회는 내부적으로 두 가지 큰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아직 신약의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학적인 논쟁이 계속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들 간에 갈등과 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이방 문화에 젖어 살다가 신앙을 고백하고 각 지역교회를 이룬 성도들은 이전의 삶의 습관과 가치를 완전히 씻어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그들을 위해 말씀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로마서입니다. 외부적으로는 어이없는 핍박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 내부적으로는 이단과 싸워야하고 성도들 간에 깊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로마교회를 말씀으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3. 로마서 12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

 

저는 2013년 수요 예배를 통해서 로마서 12장을 묵상했었습니다. 수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셨던 분들을 위해 잠시 로마서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로마 교회에서 들려온 여러 가지 소식을 듣고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는 당시 로마교회가 당면했던 몇 가지 문제들과 해결책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라면 먼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직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워졌지만 아직 사도들의 가르침이 부족했습니다. 바울은 1~11장에 걸쳐서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기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는 이신득의(以信得義)사상을 전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전반부가 신앙에 관한 것이라면 후반부는 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12장에서 성도의 생활에 대해 강조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절에서 밝힙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도는 그 삶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 이웃에 대해서는 어떻게 살까요? 여기서 이웃이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 대한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먼저 보여주셨던 모습니다. 우리와 함께 웃고 함께 우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과 성도들의 연약함에 함께 웃으며 울 수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4. 함께 웃고 함께 울라!

 

사실 로마서 12장 하반부에는 성도와 성도가 화목하기를 권면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6-18)

그러나 이런 말씀들을 우리들에게 있는 삶의 태도를 통해 한 절로 요약한 것이 바로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15)입니다. 여러분, 이 짧은 문장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를 한번 찾아보시겠습니까? 어떤 단어가 가장 본문의 의도를 살리는 중요한 단어일까요? 그렇습니다. 함께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웃고 우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하...좋은 일은 기뻐하고 나쁜 일은 슬퍼하라는 말씀인가하고 이해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웃고 우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 나누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웃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복음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서로에게 이웃이 되고 세상의 이웃이 되어 삶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있는 성도가 살아야 할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소개드린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연하게 아까 보여드린 한 문장을 영화를 소개하는 글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두더니 사랑이 나를 자유케 하는구나 저는 만델라 쯤 되는 사람이 이 말을 한 줄 알았습니다.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본 영화는 아니었는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복음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증오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증오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사랑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그 자체가 감옥이요, 사람이 없는 삶도 감옥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죄와 악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셨고, 그 자유는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섬기며 삶을 나눌 때 더욱 풍성한 열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울음 우는 사람들과 절망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 속에 허락하신 복음조차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사람이 복음이 되게 하십니다.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슬픔의 자리에 함께 하고,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고, 멍든 가슴으로 함께 울고 웃는 참된 이웃이 될 때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자유와 기쁨이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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