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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5.18 빌레몬의 편지 - 1. 시대를 이기는 믿음 na kim 201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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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18.

 

본 문 : 빌레몬서 11-25절 말씀

제 목 : 빌레몬의 편지 - 1. 시대(時代)를 이기는 믿음

 

저는 한 때 인류의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가 현재 속해 있는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깊은 회의를 품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이 제도를 좋아하거나 이 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소위 맘모니즘’(Mamonism)에 대한 경고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맘모니즘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물신주의(物神主義)입니다. 물질 즉 재화를 신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경제논리가 모든 도덕과 윤리와 가치를 우선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모든 이방 나라들이 이 사상에 빠져 있었고, 그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 바알과 아세라, 다곤과 밀곰 등이 이 사상에 근거하여 만들었습니다.

 

신약에서도 물신주의에 대한 경고는 계속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이라고 가르칩니다. 맘모니즘은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따라 각각 다른 얼굴로 존재해왔고, 성경이 기록되던 1세기 로마 제국주의 역시 맘모니즘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저는 돈을 사랑하는 사회, 돈을 사랑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불의한 사회 제도를 인류에게 허락하셨을까요? 성도와 교회는 이런 비성경적인 사회 제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 옳을까요? 복음에 적대적인 사회 제도 속에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의 삶의 방향과 지혜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도(制度)와 신앙 사이

 

사무엘상 8장을 보면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의 시대를 지나서 왕정시대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왕을 허락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 제도에 대해 반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그들에게 사사를 허락하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요하게 왕을 요구합니다. 삼상 8:4-8을 봅시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 8:4-8)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가장 원하셨던 사회제도는 사사 제도였던 것 같습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와 규례대로 살아가고 때로 사람들의 연약함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사사 즉 재판관(Judge)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왕을 원했고,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소원을 허락하십니다. 삼상 8:19-22를 봅시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삼상 8:19-22)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한 왕은 없습니다. 첫째왕 사울도 실패했고, 두 번째 왕 다윗도 많은 허물을 가진 왕이었으며, 세 번째 왕 솔로몬은 하나님의 강물 같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겼고, 그 이후 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우상 숭배와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우상을 섬기던 다른 나라에 의해 정복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이 제도를 허락하셨을까요?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제도를 결국은 허락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그 제도 속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

 

신약 성경 가운데 빌레몬서가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독특합니다. 이것이 왜 성경이며 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았습니다. 먼저 빌레몬서는 빌레몬이라는 골로새 지방의 한 귀족에게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 내용 또한 복음을 풀어 설명하거나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네시모라는 한 도망친 노예에 대한 부탁입니다. 저는 이번 주일부터 몇 주간 빌레몬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이지만, 오늘 우리는 어쩌면 2000년 전의 빌레몬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짧은 편지 속에 빌레몬과 오네시모, 그리고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불의한 제도 속에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어떤 믿음과 지혜로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빌레몬이라는 귀족의 집에 재정을 맡았던 노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가 재정에 큰 문제를 일으켰고 로마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을 만납니다. 그가 일부러 바울에게 도망을 갔는지, 우연히 바울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울을 만난 것이고 바울을 통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바울이 갇힌 자 중에 낳은 아들”(1:10)이 되었고,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지만 이제는 너와 내게 유익하므로”(1:11)라고 했고, ‘바울의 심복’(1:12)이 되어 빌레몬 대신 바울을 돕는(13) 사람과 사랑받는 형제’(1:16)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용서할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당시 노예 제도는 근동 지방의 생산력을 규정하는 사회 제도였습니다. 노예가 늙으면 자신이 키우는 짐승의 밥으로 던져줘도 노예의 주인에게는 아무런 법적인 제재가 가해지지 않을 만큼 신분의 차이는 컸습니다. 노예가 주인을 거역하고 도망을 간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을 쳤다는 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여러분... 빌레몬은 로마 시대에 예수를 믿는 귀족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포기해야 할 위험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쉽고 가벼운 것일까요? 진지하고 가치 있는 것일까요?

 

오네시모는 로마 시대에 예수를 믿는 노예입니다. 당시 많은 노예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신앙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도망친 노예입니다. 죄수입니다.

 

신앙이 있는 이 두 사람, 노예 제도라고 하는 불의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새롭게 된 이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여러분이 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3. 무엇이 결정하는가?

 

먼저 빌레몬은 노예를 추적할 수 있고 잔인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제정로마시대의 정치가이자 당대의 정신세계를 주도했던 철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세네카는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처럼 취급되어야 하며 말은 물론 입술조차 움직일 권리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그런 노예가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고 도망을 갔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로마의 역사를 돌아보면 종종 노예 반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로마 사회는 30% 정도가 노예 인구였습니다. 노예는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정교사나 보모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했으며, 전쟁터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자주 영화에 등장하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검투사들도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과 갈등이 깊어지거나 학대가 심각한 경우 많은 주인을 죽이기도 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빌레몬은 주인에게 해를 입히고 도망을 친 노예입니다. 그는 선택해야 합니다. 주인을 해치든지, 숨어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경우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상식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가정예배를 드리면 저희 할머니는 손주들을 위해서 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시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제 머리가 이렇게 큰지도 모르겠습니다. ^^ 성경에 보면 이 기도를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기를 지시기 전에 모여 앉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사람인지를 다투었을까요? 그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의 상식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높아져야 하고, 많아져야 하고, 강해져야 하고, 커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과거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상식을 씻어내고 새로운 생각으로 그들의 마음을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2:27)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겸손한 성도가, 낮은 곳에 임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고 가치있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에 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이후 제자들은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그들의 상식과 믿음이 있습니다.

 

다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생각해보시겠습니까?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이미 불의하고 비성경적인 노예제도라고 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입니다. 빌레몬은 나면서부터 귀족이었고, 노예들의 노동을 근거로 부하고 편한 삶을 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나면서부터 노예였거나 전쟁으로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미 확정된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갈등 상황을 만났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추적하며 죽인다면 불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 사회는 오히려 이것이 정의요 법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 대항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로마의 역사를 보면 많은 노예들이 주인을 해치고 그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울분에 가득 찬 노예들은 빌레몬의 그런 선택을 지지할지도 모릅니다. ,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다고 말합니까?

 

4. 감독 오네시모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의 선택의 결과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선택했습니다.

 

먼저 오네시모는 자신이 도망쳐왔던 골로새로 돌아갑니다. 그곳에는 주인 빌레몬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는 바울의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할 수 있을까요? 안전이 보장되었을까요? 빌레몬은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그를 받아줄까요? 이미 어떤 언질을 받고, 보장이 된 상태에서 떠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오직 복음에 의지하며, 말씀을 들고 길을 떠납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이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고, 혹 나의 기대대로 빌레몬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할찌라도... 그가 그리아니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에, 복음에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제도가 오네시모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과 말씀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이 때로부터 약 50년이 지납니다. 로마의 폭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던 시대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순교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처형 당하기 위해 호송을 당합니다. 그는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그는 특히 에베소 교회와 그 교회의 감독을 크게 칭찬합니다. 그는 디모데나 디도 등과 함께 2세기 초대교회를 이끌고 있는 영적지도자였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에베소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갔던 골로새보다 훨씬 큰 도시입니다. 당연히 교회 또한 더 크고 영향력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그 교회의 감독이 되어 교회를 신실하게 이끌고 있었다고 역사가 증언합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 그는 당시 로마 사회의 질서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제도의 상식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권면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설교의 시작에서 여러분께 물었습니다.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 귀족인 그가 당시로는 가치 없는 목숨일 수도 있는 노예 한 사람에 대한 긍휼함을 부탁하는 편지가 어떻게 성경일 수 있을까요? 이제 답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웅변하는 시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돈 때문에 양심을 팔기도 하고, 돈 때문에 자신의 삶의 가치를 팔아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와 교회에게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편지를 받은 빌레몬이 어떻게 했는지를 왜 보여주지 않을까요? 이 편지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빌레몬에게 전달했고, 빌레몬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바울의 편지로 받은 빌레몬이 결정해야 했던 것처럼, 복음을 빌레몬의 편지로 받은 우리 또한 결정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대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질서대로 사시겠습니까? 세상의 상식으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원칙으로 사시겠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성도와 교회로 사시겠습니까? 구워받은 성도이지만 세상에는 순응하는 두 마음으로 사시겠습니까?

 

그들이 복음에 순종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고, 교회가 살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의 영향력이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상식이 아닌 복음의 원칙에 순종할 때 우리를 통해 복음은 열매를 맺고 향기를 떨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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