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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8 빌레몬의 편지-3.복음이 되는 삶 na kim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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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8.

 

본 문 : 골로새서 3:11-14

제 목 : 빌레몬의 편지 3.복음이 되는 삶

 

지난 주일 설교의 마지막에 여러분이 서로 나눈 인사를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복음입니다. 당신을 통해 복음에 합당한 삶을 배우겠습니다.” 라는 인사였습니다. 지난 한 주간 서로에게 복음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까? , 그러셨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마치고 쉬는 가운데 문득 저의 마음 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성도들은 나를 복음으로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저는 복음입니까? 복음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까? 제가 그 역할을 일정부분 하고 있다면 왜 그렇습니까? 아직 많이 부족하다면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빌레몬이라는 한 귀족을 소개합니다. 그는 예수를 잘 믿는 좋은 성도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중심이 되는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노예가 많습니다. 그 노예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빌레몬은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면서부터 그는 귀족이었을 것이고, 주변에는 늘 노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인이었지만 그 시대가 가진 자기 존재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문제를 하나 내십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 빌레몬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을 갔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다시는 빌레몬과 로마의 공권력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림자처럼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다음 오네시모가 나타났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빌레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손에는 두통의 편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한통은 골로새 교회에게, 다른 한통은 법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향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이 빌레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빌레몬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오네시모는 복음이 될 수도 있고, 복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위기의 관계, 축복의 관계

 

두 사람은 예수를 믿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영적 지도자인 사도 바울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좋은 형제들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이 함께 성도이고,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도 관계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까요? , 물론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모든 관계는 늘 위기 속에 있습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부모와 자녀 관계는 어떻습니까? 교회적 관계는 어떻습니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누구를 가장 아프게 하며 살고 있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굳이 그것을 막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신앙으로 사는 일에 관여합니다. 서로 상처 받게 하고 상처 주게 합니다. 서로의 관계에 은혜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정죄와 판단이 흐르게 하고, 나눔과 섬김이 아닌 이익과 자존심이 흐르게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복음적인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성도와 성도 사이에 복음이 흐르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2. 변화, 그리고 순종

 

지난 주일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빌레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가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바로 변화순종입니다. 빌레몬의 변화는 귀족으로서의 자신의 권리와 유익을 내려놓는데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주는 구조적인 유익과 편의를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았으므로, 복음 아닌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택해야 할 순종의 삶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권면하신 것처럼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닌 형제로, 죄인이 아닌 성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귀족으로 평생을 누리면서 살아온 빌레몬에게 이것은 쉬운 일일까요? 주변에 많은 동료들이 있고, 그들의 불편한 시선과 비난이 있고, 나아가서 모함하고 해치려 할 것인데.... 빌레몬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변화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이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레몬의 복음적인 선택은 골로새 교회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나아가서 골로새 사회에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빌레몬에게 허락된 복음의 의미이자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는 과연 어떻게 빌레몬의 복음이 되고 복음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빌레몬의 선택이요, 오네시모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일까요?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향한 복음이기 위해 오네시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네시모 역시 변화와 순종이 필요합니다. 먼저 그에게 있어서 필요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사회적 강자로서의 빌레몬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오네시모가 노예로서의 의식, 약자가 가진 비겁함과 비루함을 버리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빌레몬의 변화를 바울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1:10)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에게 해를 끼쳤습니다.(1:18) 그러나 이제 바울은 확신합니다. 오네시모는 바울 자신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1:11) 그는 바울이 신뢰하는 신복이 되었습니다.(1:12) 종이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둘 사람입니다.(1:16) 요약하면 오네시모는 무익하고 무능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받는 형제가 되고 믿을만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복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받는 아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일꾼, 믿을만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죄와 악의 노예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순종을 통해서 자신의 변화를 증명합니다. 내가 변화되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봉인된 편지를 들고 자신이 해를 끼치고 도망나온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전의 노예로서의 모든 비류함을 버리고 당당하게 믿음 안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의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을 향한 선택은 빌레몬의 선택보다 앞서 일어난 것이며, 빌레몬으로부터 어떤 보장이나 약속 없이 자신의 의지와 믿음으로 선택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사도 바울을 통해 권면하셨고, 그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계획은 비로소 그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3.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다.

 

문제는 순종하되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의 빌레몬을 향한 긴 여정을 두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골로새는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 중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로마까지는 약 2400km정도가 됩니다. 미국 땅으로 말하자면 필라에서 콜로라도 정도를 가는 거리이고, 서울과 부산을 3번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오네시모는 그 먼 거리를 편지를 들고 갑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고 짧은 순간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매일 한걸음 한걸음을 걷고 또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순종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돌아가고 있는 오네시모, 얼마나 수많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까요? 먼 여정 가운데 그는 자신의 변화와 순종의 결단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벧세메스로 가는 소를 아십니까? 삼상 6장에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가 하나 소개됩니다.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통해서 법궤를 빼앗깁니다. 블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땅에 임합니다. 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네기로 합니다. 아직 젖을 떼지 않은 두 어미소에게 멍에를 지우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합니다. 송아지를 떼어낸 어미소들은 한걸음도 치우치지 않고 곧바로 블레셋에서 벧세메스로 수레를 끌고 갑니다. 벱궤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어미소가 끌고온 수레를 쪼개서 장작을 만들고 그 소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예정된 곳,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제물로 드려져야 하는 곳으로 자신을 불로 태울 수레를 끌고 가는 두 어미소의 이야기.... 벧세메스로 가는 소의 이야기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창세기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자신을 번제물로 태워 드릴 나무 짐을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자고 하니 갈 뿐입니다.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오른 이삭은 아버지에게 결박당하여 자신이 지고 간 장작 위에 누웠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무덤이 준비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발걸음과도 같습니다. 로마에서 자신이 순교할 줄을 알면서도 내가 로마도 가야하리라!”라고 선언하고 결국 순교한 바울의 발걸음과도 같습니다.

 

빌레몬은 한 때 살기 위해서 오랜 길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골로새에서 로마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걸었습니다.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레몬에게서 멀어지는 길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그 길을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길은 오네시모가 죽는 길입니다. 죽음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자신의 변화와 순종의 결단을 따라 다시 골로새, 빌레몬의 집으로 가는 순간마다, 걸음마다 그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미처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여 빌레몬에게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지만 그는 날마다 두려움과 근심을 이겨야 합니다. 안전한 삶의 욕구를 이겨야 합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과 회의와 싸워야 합니다. 한걸음마다 하나의 후회가 생기고, 다른 걸음마다 또 다른 분노가 생겨도.... 그 모든 것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옛사람의 것으로 여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는 지금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순종하는 것이 참된 순종일까요? 무엇까지 순종해야 순종 좀 했다...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이 말하는 오네시모의 순종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로 돌아가라고 권면하는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가라고 하시니 가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저의 안전을 보장해주십시오.” “제가 상황을 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반응을 살펴볼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들 말리니까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는 죽음을 예상하고 돌아갑니다. 그의 발걸음에 변화와 순종의 참 모습이 있습니다.

 

4. 복음의 통로가 되다.

 

서론에서 여러분께 던진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과연 성도들에게 복음일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레몬의 입장이든 오네시모의 입장이든 같은 원칙으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변화와 순종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말해야 합니다.

 

빌레몬서는 빌레몬 한 귀족과 오네시모 한 노예의 화해를 주선하는 개인적인 서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서는 그 시대, 귀족과 노예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배하는 시대에 각각의 귀족과 노예가 구체적인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어떻게 믿음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네시모는 두기고와 함께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를 들고 갔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중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다시 봅시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1-14)

 

이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시겠습니까? 차별없이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다음의 구절에서 더 명백해집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3:22)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4:1)

 

이런 권면을 들을 주인이 있을까요? 아무리 교회라지만 주인과 종이 공평과 정의를 함께 논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지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리고 마지막 이 말씀이 압권입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4:9)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이 보이십니까?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이 편지를 들고 온 오네시모를 보면서 .... 저녀석 곧 죽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보니 문제가 심각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들 모두의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그가 내가 전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성도들에게 알게 할 것입니다.” 이후에 오네시모는 골로새교회보다 더 컸던 에베소 교회의 감독, 즉 목회자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통로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 이후 그의 세 번째 삶의 단계입니다. 복음의 수혜자였다가, 변화와 순종을 통해 복음 자체가 되고, 나아가 세상에 지속적으로 복음을 공급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저는 오네시모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도 이런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변화되고 순종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오네시모처럼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한 노예를 변화시키셔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도구요 통로로 사용하신 하나님, 우리가 서로에 대해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도 복음이 되고 복음의 통로로 살게 하시옵서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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