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15 빌레몬의 편지-4.중보자 | na kim | 2014-06-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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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5. 본 문 : 빌레몬서 1장 1-25절 말씀 제 목 : 빌레몬의 편지 – 4. 중보자 얼마 전에 어느 선교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젊은 전도사님이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행사에 대한 협조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패기만만하고 열정도 있어보였습니다. 제가 동의하는 행사가 아니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고, 이후에는 교회와 사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그 전도사님은 제게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 중보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뭘 하신다구요?” “저희가 목사님의 목회와 교회를 위해 중보하겠습니다.” 저는 그냥 “아...예....”하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한 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제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주 하는 말,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좀 더 많은 이해를 해드린다면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겠습니다.”정도이겠습니다. 여러분은 ‘중보’ 혹은 ‘중보기도’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중보기도’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중보’(中保)의 사전적인 의미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전에는 기독교적인 의미가 따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연해서 설명하기를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젊은 전도사님이 뭐 대단히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생각할 것은 있습니다. 저는 그 전도사님을 그날 처음 만났고,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전도사님이 왜 저를 위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인사치례 정도로만 생각할까요? 뭐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인사치례로 한다는 것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저는 여러분과 고민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서로를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는 것, 서로를 위해 우리 인생에 허락된 나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 - 빌레몬과 오네시모, 바울은 우리가 가진 의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눈물 많은 세상에서 살다. 지난 주 제가 여러분께 드린 질문은 사실 제게는 좀 아프기도 하고, 부정하고 싶기도 한 질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교회가 아니요 성도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드린 질문, 기억나십니까?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같은 믿음이 있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 하고, 선한 일에 헌신하려는 열망이 있는 성도들의 관계에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좀 더 젊을 때는 이 대답을 부정했었지만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니, 저 역시 때로 가족과 성도들에게 때로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될 때가 있고, 때로 불편하고 아픈 기억을 남기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눈물 많은 세상에 삽니다. 빌레몬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했던 대답에 동의합니다. 함께 교회의 일꾼이요 성도된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지금 위기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좀 복잡합니다. 빌레몬은 그들이 속한 사회 제도 속에서 이익을 누리는 집단에 속해 있습니다. 귀족이었고 많은 노예들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삽니다. 좋은 신앙인이었지만 그가 가진 존재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입니다. 불합리한 사회 제도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당시의 사회법으로 보면 범죄자입니다. 주인에게 해를 입히고 도망간 노예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는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누구의 편을, 아니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 있을까요? 2. 눈을 뜨고 마음을 열라! 하나님은 2000년 전 로마 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두 사람의 성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들 스스로는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지혜도, 능력도 없습니다. 당시의 사회 제도나 심지어 교회 또한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또 한 사람을 소개하시고,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답을 주십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빌레몬 혹은 빌레몬과 같은 존재적 한계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오네시모를 보면 당연히 그는 죽을 죄인입니다. 사회법이 오네시모를 법정으로 이끌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들의 관점을 인정합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는 빌레몬의 입장에서 오네시모를 평가하되 ‘무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6절에서 그의 신분이 명시됩니다. 그는 ‘종=노예’입니다. 그러나 18절을 보시면 노예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불의’를 행했고, ‘손해’를 끼쳤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하여 다른 눈을 뜨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보되 그 시대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향해 마음을 열고 보니 그는 참으로 많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아들(9절)과 같은 사람이 되었고, 유익한 사람(11절)이 되었으며, 바울의 심복이 되어 섬기는 사람(12-13)이 되었고, 사랑 받는 형제(16절)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눈으로 본 오네시모와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오네시모,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까요? 오네시모 혹은 오네시모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빌레몬을 보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빌레몬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귀족으로 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에 대해 영적인 눈을 뜹니다. 바울은 그가 장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집을 개방해서 예배의 처소로 드리는 사람(2절)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5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선교팀에게 늘 기쁨과 위로를 줍니다.(6-7절) 그는 사도 바울의 동무요(17절), 바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만한 사람(20절)이며, 순종할 수 있는 사람(21절)이며, 섬길 줄 아는 사람(22절)입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그는 참으로 많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서 노예제도의 딜레마 속에 빠져 있는 2000년 전 로마 교회가 답을 찾게 될 것입니다. 노예 제도가 잘못되었으므로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서로를 영적인 눈을 뜨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3. 중보자 -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듯... 그래서 성경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바로 ‘사도 바울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는 지혜와 사랑이 부족하고, 겸손하지도 인내하지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A라는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에게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지만 B에게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B라는 사람 또한 많은 사람에게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지만 A라는 사람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원수로 지낼까요? 성경은 사도 바울의 역할을 우리들에게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행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모든 사람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설교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 대해 하신 역할을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자’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에 대해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짧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교회와 성도에 대해 했던 역할처럼 우리가 서로와 세상에 대해 중보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1) 인정하라. 빌레몬서가 보여주는 중보자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인정하라’입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잘못이 무엇인지, 연약함이 무엇인지를 먼저 지적하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된 삶을 사는지를 고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하실 일이요, 말씀을 통해서 변화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장점과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적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어야 회개도 가능하고 화해도 가능합니다. 중보자로서의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영적인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겸손하라. 바울의 중보자의 역할에 있어서 두 번째 생각할 것은 그가 참으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듭거듭 자신이 명령하거나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그는 오히려 간구(9,10절)합니다. 승낙(14절)을 얻으려고 합니다.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이 선한 일에 대한 공을 자신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에게 돌립니다.(14절)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그가 빌레몬에게 자신을 ‘동무’(17절)로 여겨달라고 부탁합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겸손하게 부탁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중보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낮아지심’입니다. 가르치거나 훈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문제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겸손함,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자세입니다. 3) 온유하라. 세 번째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중보자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한 것입니다. 중보자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에 대해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왜 신앙이 있는데 믿음 안에서의 형제를 용납하지 않느냐고, 오네시모에게 왜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자의 삶을 사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참 강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불의에 맞설 때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중보자의 역할을 해야 할 때, 자신보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도울 때 한없이 온유합니다. 마치 죄와 악에 대해 분노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죄와 악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1:4-7과 1:20-21에서 바울의 온유함을 발견합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 1:4-7)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몬 1:20-21)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중보자는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합니다. 4) 손해를 보라. 마지막으로 중보자는 ‘손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 완전한 중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모든 잘못과 죄를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싶으십니까?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이웃을 섬기는 일, 그것이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 1:18)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하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당할 수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4. 기쁨과 평안의 공동체가 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공동체의 정서적인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이요, 다른 하나는 평안함입니다. 기쁨과 평안이 없는 교회적 관계와 교회 공동체,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공동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모임, 성공과 성취를 위한 모임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초대교회가 그런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쁨과 평안함이라는 교회의 정서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1:20-21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다시 읽어봅시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몬 1:20-21) 한 단어를 찾아보십시오. 기쁨과 평안을 상실한 공동체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적 선택은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동의하고 하고 싶어야 합니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므로 내가 순종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할 때 빌레몬이 순종해야 합니다. 시대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다른 귀족들이 비난할 것이라고, 노예들이 깔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한 사람을 용서하면 다른 모든 노예들의 반발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수많은 근심과 질문으로 순종을 주저하지 않고, 단순하고 분명하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네시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전을 보장하냐고.... 책임질 수 있냐고....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냐고...바울 선생님 당신이 노예가 되어본 적이 있냐고.... 따지고 확인하고 보장받으려 하지 않고, 단순하고 분명한 신앙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비로소 그들이 속한 골로새교회가 복음 안에서 기쁨과 평안의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가 복음적 관계, 기쁨과 평안의 관계가 되어 그들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자녀요, 교회요,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눈물 많은 세상에서 중보자의 역할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에 대해 보여준 이 아름다운 사역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상처가 있고 눈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그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고 놀라운 사랑, 내안에 고여 있게 마시고 퍼서 섬기고 나누는 삶을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중보는 예수가 한 일입니다. 그 일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를 섬기시듯 우리가 교회와 세상을 섬길 때 교회는 기쁨과 평안의 공동체가 되고, 교회가 가는 세상 곳곳에 기쁨과 평안의 씨가 심기고 싹이 나고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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