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14 두 얼굴-1. 두 가지 질문 | na kim | 2014-06-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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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9. 본 문 : 눅 22:21-24 제 목 : 두 얼굴 – 1. 두 가지 질문 여러분은 ‘중화요리’ 하면 어떤 음식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예, 아마도 짜장면....? 아니면 짬뽕일 것입니다. 한번은 한국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짜장면과 짬뽕, 이 둘 중에서 정말 중화요리집을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6:4 정도의 비율로 짜장면의 승리였습니다. 저 역시 중국집에 가면 고민합니다. 얼큰하고 시원한 짬뽕 국물이냐 어린 시절 운동회를 기억나게 하는 짜장면이냐....! 하지만 요즘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중화요리집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메뉴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짬짜면 ’입니다.(사진 1) 그릇을 반으로 나누고 적당한 분량의 짜장면과 짬뽕을 함께 맛볼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짬짜면은 2000년에 강남의 태화루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메뉴로 개발되었는데, 그릇을 개발한 김정환이라는 사람은 이 신선한 아이디어 하나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둘 다를 먹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의 마음에 인생에 대한 두 갈래 길이 있고, 내가 어느 길을 가야할지 모른다면 어떨까요? 혹은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길 위에 놓였다면, 그것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야보고서 1장 8절을 보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고난과 시련을 인내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라고 꾸짖는 말씀이 있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지는 고통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성도와 교회를 향한 책망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이 비겁한 성도들아!” “이 거짓된 성도들아!”라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두 마음을 품은 성도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복음을 향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오직 한 마음, 한 길이 아니라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향한 또 다른 마음이 있어서 두 마음이 충돌하고 인생의 발걸음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일부터 약 10회에 걸쳐서 우리들 안에 있는 이 두 마음, 두 갈레의 길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고, 신앙의 문제일 수 있으며, 우리의 인생의 목적에 관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또 질문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에 놓인 길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자들의 두 가지 질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질문이야 누구나, 또 언제나 할 수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의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먼저 던지는 질문은 “우리 중에서 선생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각한 정서적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아무리 말리고 반대해도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예, 그들은 이미 대답을 했습니다. 앞을 다투어 “내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진심일까요? 예, 진심일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았던 가륫 유다 또한 한 때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진심을 믿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제자로 거두셨고, 십자가를 앞두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례를 그들에게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것을 행하여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길 제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들 중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있다고? 도대체 누구지?”라며 묻습니다. 같은 기록이 마 26:21-22에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마 26:21-22) 제자들이 이 질문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저를 의심하는 것입니까? 저는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도, 배신하지도 않습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서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그들은 이미 이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 적이 있습니다. 마 18:1에서 보면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라고 질문했고, 예수님은 마 18:4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대답이 제자들에게는 잘 들리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만찬이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상징하는 예식을 향한 후에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큰 자냐?”라고 질문하며 서로 다툽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방향과 일치합니까? 반대됩니까? 예, 정확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질문과 다툼입니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높고, 더 강하고 싶은 마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마음은 제자들의 진심일까요? 아니면 잠시 제자들이 정신을 잃은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제자들의 진심이 잘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그들은 결코 이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그들은 이 소원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 두 질문을 비교해보시겠습니까? “우리들 중에 누가 예수님을 배반한단 말입니까?”라고 질문한 그들은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큰 자입니까?”라고 다시 질문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요, 두 번째 질문은 “우리는 주님과 생각이 다릅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두 질문에는 그들의 진심이 묻어 있고, 그들의 마음에 숨어 있던 두 가지 소원이 숨어 있고, 그리고 각각 다른 나라, 두 세계, 두 종류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 2. 같은 마음, 같은 뿌리 여러분! 짬짜면은 짜장과 짬뽕을 섞은 또 하나의 요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둘을 반반 나눠서 먹는 두 가지 요리일까요? 예, 짬짜면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우리들의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요리를 개발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그릇을 나누어 두 음식을 담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에도 이렇게 벽을 가로지르고 두 가지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요? 즉, “누가 예수님을 배반한단 말입니까?” 라는 질문과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사람입니까?”라는 두 질문은 섞일 수 있는 질문일까요?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질문이 같은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관하여 관심을 가진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그가 처음 던진 질문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성경에 무엇이라 쓰여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주십니다.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근심하면서 돌아갑니다. 여기서 그가 던지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 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입니다.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 모르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는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그와 비슷한 바리새인이 또 있습니다. 그 역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 19:21) 예수님께 두가지 질문을 했던 이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22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그는 예수님의 대답을 확신하고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두 질문이 자기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와 풍족한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돌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이 두 가지 욕구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3. 시몬아, 시몬아 ! - 제자들의 자기 오해 오늘 본문에는 자기 확신 속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은 결코 예수님을 외면하거나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진심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22:28-30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안심하며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장차 너희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구나. 아직 거쳐야 할 과정이 많이 남았구나. 나를 사랑하는 베드로야! 사탄이 너를 노릴 것이다. 너를 시험할 것이다. 마치 밀을 까부르듯 사탄이 너의 믿음을 마음껏 조롱할 것이다.”(눅 22:21) 베드로는 갑작스런 예수님의 말씀에 놀랍니다. 자신을 인정하시는 줄 알았는데, 사탄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다시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 22:34)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반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믿는 것은 자신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그가 곧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에 있는 신앙에 대한 이 두 다른 생각 중에서 어떤 생각이 진실이며, 어떤 생각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법정 뜰에서 예수님이 고문당하시던 자리에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문 당하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부인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통곡합니다.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가 그 마음 속에 두 개의 질문, 두 개의 나눠진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제자들이 방향이 다른 두 질문을 들고 방황하던 것처럼, 우리들도 매주 반복되는 종교 생활이 우리의 신앙인줄로 알고 만족하고 자족하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앞에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나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4.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참으로 다행인 것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악하거나 거짓된 사람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이킬 사람’으로 보십니다. 시련과 고난의 과정, 자기 부정과 묵상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으로 거듭날 사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베드로는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 우리처럼 자기기만이 있는 사람, 우리처럼 잘 무너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많고 욕심과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두 가지 얼굴로, 두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안에 찾아온 복음이 만든 얼굴이요, 믿음이 내는 음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원래 그가 가진 욕심이 만든 얼굴이요, 세상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내는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얼굴, 두 마음, 두 음성, 두 가지 인생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걷는 사명자로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이제 60을 넘긴 한 부부를 상담하면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 “마음 속에 복음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두 분이 서로를 손가락질 하면서 “이 사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제 앞에서 다퉜습니다. 서로를 거짓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두 분께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우리들을 얻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가치 있고 귀한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 이것 하나만 붙들고 살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고 감당해야 할 사명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마음에는 다른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욕심도 있고, 아직 변화되지 못한 성품도 있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관계도 있고, 아직 포기하지 못한 꿈도 있습니다. 신앙은 짬짜면이 아닙니다. 그것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한 그릇에 담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성도”를 아파하십니다. 우리의 고백, 우리의 질문, 우리의 믿음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두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소원에 대해 깊은 오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오직 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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