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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2014 두 얼굴-2. 예배자의 얼굴 na kim 201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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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6.

 

본 문 : 18:23-35

제 목 : 두 얼굴 2. 예배자의 얼굴

 

다들 축구 좋아하시죠? 어제 경기로 이번 월드컵 4강이 결정되었습니다.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브라질과 독일,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가 4강에서 맞붙게 되었습니다. 4강쯤 오니까 역시 강팀들이 맞붙게 되는군요. 이번 월드컵이 시작될 때 아르헨티나의 메시, 브라질의 네이마르, 포르투갈의 호날두, 네덜란드의 판 페르시, 그리고 우르과이의 수아레스 등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 중에서 누가 득점왕이 되며 누가 최우수 선수가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중에 수아레스라는 선수(사진 1)는 우르과이라는 팀에서 존재감이 특별했습니다. 남미 지역 예선에서 수아레스는 11골을 넣었고,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31골을 넣고 있었습니다. 이번 월드컵 조별 예선전에서 그는 부상으로 코스타리카와의 1차전에는 뛰지 못했고, 우르과이는 3:1로 지고 맙니다. 하지만 영국와의 2차전에서 수아레스는 두골을 몰아넣어서 2:0으로 이깁니다. 그리고 3차전에서 우르과이는 이탈리아를 만납니다. 문제는 이 경기에서 발생합니다. 집중 마크를 당하던 수아레스가 갑자기 이탈리아의 수비수인 키엘리니의 어깨를 물어버린 것입니다. 먼저 맞았다든지 싸웠다든지 이전 상황이 있어야 하는데, 별 특별한 이유가 없이 공격과 수비의 위치를 경합하는 과정에서 키엘리니의 어깨를 문 것입니다.(사진2) 결국 우르과이는 이탈리아를 1:0으로 이기고 16강에 진출했지만 수아레스는 FIFA로부터 1억원이 넘는 벌금과 9경기 국가 간 경기 출장이 금지되었고, 4개월간 축구 활동을 할 수 없는 큰 징계를 받았습니다. 16강에 진출한 우르과이는 수아레스 없이 콜롬비아와 경기를 했고, 2:0으로 져서 탈락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월드컵에서 우르과이는 4경기를 했고, 수아레스와 함께 영국과 이탈리아라는 2강팀을 이겼고, 수아레스 없이 코스타리카와 콜롬비아라는 2약팀에 패배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수아레스의 이러한 기이한 행동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10년 네덜란드 아약스라는 팀에서 뛸 때에도 아인트호벤의 오트만 바칼이라는 선수의 목을 물어서 징계를 받았고, 불과 1년 전 4월에는 영국의 리버풀 선수로 뛰면서 첼시의 이바노비치의 팔을 물어뜯어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10대 때부터 심판을 폭행하기도 하고, 동료를 물기도 했다는 보도도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골을 넣기 위해서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정말 전세계적인 선수이지만 이기기 위해서 반칙을 하고 물기까지 하는 그의 행동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물었을까요? 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진단은 대부분 일치합니다. 분노조절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성장기에서 찾습니다. 그는 평안하고 성공하고 있을 때의 얼굴과 긴장하고 분노했을 때의 얼굴이 다른 사람입니다. 성숙하고 원만한 사람은 분노를 조절합니다. 그의 내면에 있는 성숙한 자아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미성숙하고 연약한 사람은 상황에 따른 감정이 그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경기가 주는 긴장감과 이기고 싶은 욕망이 그의 행동을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얼굴로 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수아레스라는 비웃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 수아레스뿐만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분노 혹은 성취에 대한 욕망 앞에서 다른 얼굴, 다른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이 축구 경기장에만 있는 것을 아닙니다. 아니 우리들 모두는 적당하게 숨기고 살아갈 뿐 우리들은 각각 다른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사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일만달란트 빚을 졌던 신하는 좀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볼까요? 성경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금의 각색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원래 이웃 혹은 친구들에 대해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씀씀이가 좀 헤픈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큰 고민하지 않고 선 듯 돈을 빌려줬습니다. 친구는 기간 내에 곧 갚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왕의 재정에서 돈을 많이 빌려다 썼습니다. 처음에는 푼돈이었는데 씀씀이가 커지다보니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재정을 맡은 친구 신하들이 그에게 경고했습니다. 빨리 어느 정도 재정을 채워놓지 않으면 자기들도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지...고민을 하다가 자신에게 돈을 빌려간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돈을 받아서 왕의 장부에서 빌린 돈을 어느 정도 표시나지 않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친구들이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날마다 찾아오고 연락하더니 갚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아무리 연락해도 소식이 없습니다. 점점 약이 오르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덜컥 왕이 부릅니다. 자신이 일만달란트나 왕의 재정을 빌려간 것이 왕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왕의 진노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하가 아닌 노예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왕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왕은 원래 관대한 사람이었고, 그동안 그의 충성을 감안하여 빚을 탕감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땅에 비비며 감사했습니다. 눈물로 옷을 적시면서 궁을 나섰습니다. 정말 죽을 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렇게 연락해도 만나주지 않던, 자신에게 돈을 빌려간 친구를 만났습니다. 급할 때는 당장 죽을 것처럼 자신에게 찾아오더니 갚아야 할 기간이 넘어가자 아무리 연락해도 감감 무소식이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을 보고 또 도망을 가려고 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봤나....’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는 친구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 때 친구에게 관대하게 자신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었고, 왕에게도 인정받는 신하였지만 지금 많이 분노하고 있었고, 그 분노에 자신의 모든 판단을 맡기고 말았습니다.

 

2. 왕 앞에 다시 서다.

 

그런데 왕이 그를 다시 부릅니다. 그는 왕을 생각하기만 해도 감사가 넘쳤습니다. 너무 자기를 인정해주는 것같고, 사랑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얼굴로 왕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왕이 그에게 묻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용서해서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는데, 너는 왜 너의 친구의 작은 빚도 용서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친구가 얼마나 비겁하고 교묘하게 자신을 기만했는지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왕에게 얼마나 더 생명을 다해서 충성할 것인지도 맹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왕의 질문은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나에게 용서를 구할 때의 얼굴과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친구를 대할 때의 얼굴이 왜 다르냐고 묻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빚을 갚고 갚지 않고는 이미 다른 문제입니다. 왕에게 일만달란트는 별 큰 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왕의 돈을 갚지 않아서 왕이 분노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과연 왜 왕은 분노했을까요? 왕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이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을 만날 때의 얼굴과 친구를 만날 때의 얼굴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왕 앞에 나의 연약함을 내려놓을 때의 얼굴과 친구의 연약함을 내가 만날 때의 얼굴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3. 왕을 대하듯 친구를 대하다.

 

동학’(東學)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1860, 조선 말기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전통 종교입니다. 당시 조선 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하고도 그들이 가진 부정과 부패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불리던 서양의 문물이 동양으로 물밀 듯 밀려드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경주에서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유학을 공부했고, 전국을 20년간 떠돌아다니며 어떻게 하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37세가 되었을 때 그는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시합니다. 그가 자신이 시작하는 종교를 동학이라고 부른 것은 당시 서학’(西學)이라고 불리던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문화에 대한 자주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서양의 문물과 함께 전파되던 기독교를 학문으로서의 공부하고 기독교의 신적인 개념을 자신이 창시한 종교에 포함시키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학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입니다.

 

동학이 처음부터 이 사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닙니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하면서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시천주'하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최제우는 초월적인 신()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사람을 통해 신적 특성을 드러낸다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그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에 와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변화됩니다. 이는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뜻입니다. 3대 교주인 손병희는 동학천도교’(天道敎)로 바꾸면서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사상으로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학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생명이 천하게 여겨지던 시대에 사람의 가치를 하늘의 가치를 통해서 보고자 했던 사상적인 노력에 감동이 있습니다. 동학의 교주들이 내세운 핵심 교리들을 차례로 정리해보면,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 즉 사람의 마음에 하늘을 모시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면, 사람이 곧 하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을 신으로 섬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을 그만큼 귀하게 여기자는 것이지요. 저는 감히 동학이 종교가 아닌 한국의 전통 사상 정도로 남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4. 예배자의 얼굴로 세상을 만나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길을 오직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신앙의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요?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질문을 던졌던 율법학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표현되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성경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1 4:20-21)라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앞서거나 뒤서는 문제가 아니라, 마치 동전에 양면이 있어서 하나의 동전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신앙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신하가 왕 앞에 엎드립니다.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하가 왕 앞에 엎드립니다. 왕의 지혜와 사랑에 감격한 신하가 왕을 찬송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를 자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베푸시는 사랑과 섭리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힙니다. 우리는 이 모든 행위을 합하여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만나는 사람을 예배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만달란트 빚진 신하처럼 만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내려놓고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행위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의 얼굴을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예배자로 하나님을 만날 때의 얼굴,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할 때의 얼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높일 때의 얼굴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처음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을 때의 감격과 기쁨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얼굴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얼굴로 세상에 나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만나며 친구를 만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 얼굴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이해가 드러납니다. 그 얼굴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로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해도, 때로 악한 사람이 나를 분노하게 해도, 때로 세상이 나를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할지라도 나는 내 마음과 생각과 거룩한 얼굴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고 있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참된 진리를 몰랐던 동학교도들도 사람에게서 하늘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고, 하늘을 대하듯 사람을 대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왕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던 신하는 친구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왕에 대한 감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왕의 신하로 살고 있는 우리들,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우리를 통해 왕의 은혜와 영광이, 왕의 사랑과 자비가, 왕의 나라와 통치가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기억하십니다. 그 얼굴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예배자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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