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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10 두 얼굴- 5.'소금 기둥' na kim 201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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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0.

 

본 문 : 창세기 1926절 말씀

제 목 : 두 얼굴 6. 소금기둥

 

저는 부부 상담을 하면 가끔씩 종이와 펜을 각각 드리고 원하는 가정을 한번 써보라고 권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가정, 아내가 원하는 가정을 간단한 목록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한 부부를 상담할 때도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5분 정도 생각도 하고 정리도 한 다음 남편은 5가지, 아내는 3가지를 썼습니다. 남편의 초점은 소통에 있고, 아내의 초점은 과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소원은 맞물려 있었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을 요약하면 과거의 잘못이나 어려웠던 것을 좀 벗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이야기 그만하고, 서로 용서하고 잊고 새롭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원하는 첫 번째 항목은 바로 숨김없이... 비밀이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나머지 4개도 그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때 왜 그랬는지, 지금도 그런 것은 아닌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30년을 자녀를 낳고 함께 살아온 부부입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위하면서 살아왔겠지만 또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이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겠습니까? 남편은 그 모든 잘못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만의 이해와 논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정에 아주 사소한 잘못이 발생해도 과거의 문제와 연관 지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 당신이 왜 이런 잘못을 했는가 하면, 몇 년 전에는 이랬고, 지난번에는 저랬으며, 그때는 이랬는데 지금 또 그런다는 겁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남편이이야기를 시작하면 벌써 마음에 벽이 생깁니다. 남편은 소통을 원하지만 그 소통에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 장벽이 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 남편은 계속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제가 파악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두려움입니다. 물론 성장과정에서 받은 상처도 있고, 아내와의 관계 속에 쌓인 스트레스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그분의 마음 속에 켜켜히 쌓여 있다는 겁니다. 세월과 함께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꼭 붙들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용납하지도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런 기억들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뭔가 불안합니다. 그 고통의 기억들, 걱정과 분노를 붙들고 있어야 현재 내 삶의 불안함을 이해하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그가 이해하는 가정, 혹은 살고 있는 오늘의 세상은 늘 불안하고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것 같고 떠날 것 같고 해칠 것 같고 속이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고, 내 아내나 자녀들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 불안한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봐도 가족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사소한 갈등이 생깁니다. 과거의 모든 문제를 꺼내놓고 갈등의 원인을 따집니다. 갈등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이 불안함이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화를 내고 대화는 단절됩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아... 내 생각이 옳았구나...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불안한 오늘은 곧 고통의 과거가 되어 그의 기억 속에 쌓이게 되고 그는 날마다 더 불안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날마다 더 고통스러워지는 과거만 있을 뿐, 행복하고 밝은 미래는 없습니다.

 

1.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은 혹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담임 목사가 가장 은혜 받는 성경을 알고 계시는 것도 좋겠지요. 소개하자면 고린도후서 514-15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저는 이 말씀을 20대에 발견하고 비로소 젊은 날의 방황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죽음과 삶에 대한 말씀이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이후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정말 중요한 선언을 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간증이자 하나님의 성도와 교회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전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갔고, 이제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 새로운 인격,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삶의 목표와 문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제 새 사람이 되셨습니까? 새로운 인격과 가치관과 목표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이전과는 다른 새 삶이 성도로서의 여러분의 삶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맞이하는 오늘은 상처와 눈물과 아픔으로 얼룩진 어제와는 다른 새사람으로서의 삶입니까? 여러분이 맞이할 내일은 오늘의 욕심과 염려와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새사람의 새날입니까?

 

2. 옛 것을 돌아보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의 우리들에 대한 선언과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실질적인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은 우리들의 새 날, 새 삶, 새 하늘, 새 땅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새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들은 여전히 과거의 짐을 지고 과거에 이끌려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지금도 사해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사람의 형상과 비슷한 바위만 보면 롯의 아내라고 부를 만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드라마틱하게 남아 있는 롯의 아내입니다.(사진 - 롯의 아내 1,2) 제가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유년 주일학교의 수요일 예배였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참 구성지게 잘 하셨던 한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서 소금기둥이 된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마친 다음, 어렸던 저의 마음에 남은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돌아보지마~~~”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소금기둥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지금도 사해에 가면 소금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 소금 기둥에 있는 롯의 아내의 얼굴 표정까지 묘사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꽤 오랫동안 그대로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이 참 순진하게 성경공부를 시키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두 가지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잘 심어주셨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과거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뒤돌아선 채로 굳어 있는 롯의 아내를 통해서 끊임없이 옛사람으로 돌이키려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소금기둥입니다. 그녀는 변하지 않는 소금기둥이 되어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떨어져 심판을 받았던 소돔성의 자리, 소금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해는 수정처럼 맑지만 그 어떤 나무도 자랄 수 없고, 그 어떤 물고기로 살 수 없는 소금의 바다입니다. 그 바다가 마르고 말라 결정체가 되면 소금기둥이 되지 않겠습니까?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고 과거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과거의 사람, 옛사람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우리의 외면의 모습은 수정처럼 맑아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내면은 소금의 바다가 아닌 소금의 기둥이 되어 여전히 우리의 과거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게 되지 않을까요?

 

3.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것들

 

그렇다면, 롯의 아내의 안타까운 얼굴을 상상하면서 잠시 생각해보시겠습니까? 롯의 아내를 돌이키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그녀는 심판받는 소돔성을 향해 몸을 돌렸을까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는데, 왜 심판을 자청하고 만 것일까요? 만일 여러분이 롯의 아내였다면, 그래서 발걸음을 돌이켰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은 성도가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422절에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도가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상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있지만 아직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복음이 우리의 마음밭에 심기기 전에 먼저 심겨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었습니다. 롯의 아내가 왜 죄악의 도성, 심판받는 도성을 되돌아보았을까요? 구원의 성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마음에 아직 소돔성을 향한 그리움이 남은 것입니다. 소돔성의 풍요한 물질과 쾌락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발걸음은 구원의 도성으로 향하고 있는데, 마음은 아직 소돔성에 있고, 마음을 따라 몸이 움직여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들꽃 교회를 원합니까? 솔로몬 교회를 원합니까? 우리 모두 들꽃 교회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바꿔 봅시다. 우리의 삶의 지향은 들꽃에 있습니까? 솔로몬에 있습니까? 우리는 혹시 믿음으로 고백하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삶으로는 이 세상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가 옛사람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직도 가치관이 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치관은 변화되었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말세의 징조를 설명합니다. 말세의 징조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딤후 3:1-5을 봅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 중에서 3절을 보십시오. 말세에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징조 중 하나는 바로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을 NIV 성경에서는 ‘unforgiv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글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맺힌 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 원통한 마음을 나 스스로 풀지 않는 것입니다. 꼭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요셉의 형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결국을 팔아버렸을까요? 바로 이 풀지 않았던 원통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통함의 이유가 되었던 동생을 때리고 팔고난 다음에는 그것이 풀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죄와 죄책감의 노예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원통함,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그들의 과거는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과거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삶을 원통함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소위 상처들입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분노로 우리의 삶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들이있습니다. 우리들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며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삶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요셉 프로젝트를 하면서 고민했던 트라우마라는 말 기억나십니까? 우리 조상들이 트라우마혹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이라는 어려운 말 대신 사용했던 좋은 비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다 놀란다는 속담입니다. 우리의 과거에 자라를 처음 만났을 때, 고통과 아픔을 처음 경험할 때의 놀라움, 두려움, 분노, 혹은 상처가 오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자라와 비슷한 경험에 대해 반응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상처라고 부릅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더 깊은 상처로 고통받게 합니다. 과거의 상처가 오늘의 나의 정서를 결정하고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4. 내 안에 있는 소금 기둥을 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왜 성경에 롯의 아내와 같은 비극적인 인생을 그려놓았을까요? 왜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이 소금기둥으로 변해버린 처참한 현장을 영적으로 경험하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롯의 아내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소금기둥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백하건데 제 마음 속에는 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소금 기둥이 하나 서 있습니다. 시선은 과거를 향해 있습니다. 아직도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합니다. 아직도 과거의 즐거움을 그리워합니다. 아직도 가지 못했던 길을 아쉬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가기가 불안합니다. 굳이 과거의 삶이 더 좋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버리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은 어차피 앞으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의 질서를 따라 나는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는.... 과거를 향해 고개 돌리고 서 있는 소금기둥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여전히 과거의 그 자리에 변화되지 않는 소금기둥이 되어 풀 한포기,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할 내 어두운 과거들, 나의 옛사람 - 상처와 욕심과 원통함의 세월로 출렁이는 죽음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17:32) 왜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제자들은 롯의 처를 생각해야 할까요? 왜 사해 바다 한 모통이, 한때는 소금 기둥이었다가 이제는 바람과 비에 스러지고 녹아서 사해 소금의 바다가 되었을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묵상하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과거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분노와 상처가 오늘의 나를 설명하도록 허락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영을 부으시기 때문이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전 것은 지나갔기 때문이고,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한번 만져보실까요?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는데, 내 마음에는 나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소금기둥이 하나 있지는 않을까요? 그 소금 기둥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사모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내 얼굴과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숨쉬는 옛사람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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