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7 기도 - 2. 서로를 위해 기도하다. | na kim | 2014-1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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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7. 본 문 : 히브리서 13장 18-21절 말씀 제 목 : 기도 – 2. 서로를 위해 기도하다. 지난 금요일 저녁 저희 집에서는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12월 3일 99세로 부름을 받으신 고 유재연 권사, 즉 저의 외할머니 천국 환송 예배가 있었습니다. 모든 장례 절차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진행되기 때문에 저는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광고를 드리고 카톡으로만 알렸습니다. 연락 못받았다고 섭섭해하지는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참석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저희 가족은 외가 중심으로 늘 생활했었습니다. 친가 쪽에서 예수를 믿는 가정이 저희 가정 밖에 없기도 했고, 외가 쪽이 여러모로 강했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늘 외가에 가서 살다시피했습니다. 어머니가 외동딸이셔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저희 손주들을 워낙 사랑해주셨습니다. 꾸중하시거나 매를 드시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딱 한번 제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께서 매를 드신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거제도에는 T.V.를 가진 집이 많지 않았습니다. 친척들이 와서 늦게까지 함께 T.V. 시청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밤이 되고 친척들이 하나 둘씩 가고, 우리 형제들만 남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저기 안쪽에서 책을 읽고 계셨고 우리들은 T.V.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친척들이 가고 빈자리가 남게 되자 저희 3형제들 사이에 자리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T.V. 앞에 길게 누웠고 작은 형은 비키라고 하고 큰 형은 그 위에 눕고... 몸싸움과 말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형이 후다닥~ 하고는 뛰쳐나갔습니다. 어... 왜 그러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의 등 뒤에서 “이누무 시키들... 형제들끼리 싸워,,,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작은 형도 후다닥 뛰어 나갔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할아버지께서 벌써 매를 하나 꺼내들고 저의 뒤에 오셔서 등짝을 내리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망치지 못한 저만 맞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막내인 저만 때리는 것이 안스러웠던지 두어 대 때리시다가 멈추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서 약을 발라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딱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앞으로 할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면 일단을 도망가라고 하셨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시지만 그 때만 지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형님들은 그것을 알았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은 형제들끼리 싸우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위하고 도와야지... 서로 싸우면 안되지... 형제들끼리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는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인 두 가지 이유 제가 가끔 소개하는 본 훼퍼라는 신학자는 ‘성도의 교제’라는 책에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사랑으로 공존하는 관계 그가 첫 번째로 주목하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교회는 관계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시는 능력에 기초합니다. 교회는 그 관계를 서로에게 나눕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 대하여 실천하신 관계, 사랑과 은혜와 능력의 관계를 서로에 대해 실천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연약함을 감당하셨던 것처럼 서로의 연약함을 감당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참으셨던 것처럼 서로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희생하셨던 것처럼 나도 서로 인내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적인 관계가 교회적 관계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에 대해 허락하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관계를 세상에 대해 실천해야 합니다. 성도가 서로에 대해 관계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교회가 세상에 대한 관계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그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2) 사랑의 공동체적 실천 그래서 본 훼퍼는 교회가 공동체인 두 번째 이유를 ‘사랑의 공동체적 실천’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신적인 능력을 외면하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사랑으로 헌신하고 수고하고 희생하기를 꺼려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신적인 은혜가 자신의 삶에 임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타인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활동입니다. 타인의 유익이 나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와 이웃의 유익이 나의 이익보다 앞설 수 있을까요? 나의 시간과 재정과 관계를 사용해서 공동체와 이웃을 지역사회를 섬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우리 교회 성도들도 제대로 잘 보살피지 못하는데...”라는 말을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보다 이웃을 먼저 사랑으로 보살펴야 교회입니다. 나보다 이웃을 먼서 살펴야 성도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희생하는 일을 쉽게 결단하고 선택합니다. 어쩌면 그 일에서 자기 의를 발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 몸은 어떤 일에 사용되었습니까? 세상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용납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갈갈이 찢겨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I believe in Jesus!”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또한 몸 된 교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 안에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만일 용서와 용납이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와 관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훼퍼는 그의 책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서로를 위한 사랑이 실천되어야 하는데, 사랑의 실천을 위한 전제는 바로 용서와 용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교회의 공동체성은 서로를 위한 기도에 있습니다. 2. 공동체, 서로에 대한 신앙적 실천이 있는 사람들 성경에서 ‘성도의 교제’를 듯하는 헬라어를 아마도 잘 아실 겁니다. 예,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협동 또는 친교를 뜻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사용될 때 교회의 공동체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코이노니아보다 더 교회의 공동체성을 잘 설명하는 부사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알렐론’(αλληλων)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 현대 성경에는 이 단어가 ‘서로’(each other)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서로’라는 뜻의 ‘알렐론’(αλληλων)의 어원은 ‘다른’이라는 뜻의 ‘알로스’(αλλος)에서 왔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서로’라는 단어가 ‘다른’에서 왔습니다. 이 ‘서로’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설명하실 때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렐론’(αλληλων)이 사용된 구절들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소리 내어 크게 한번 읽어볼까요?
서로 존경하라(롬 12:10) 서로 용서하라(롬 12;10) 서로 합심하라(롬 12:16) 서로 받아들이라(롭 15:7) 서로 충고하라(롬 15:14)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롬 16;16) 서로 기다리라(고전 11:33) 서로를 위해 같이 걱정하라(고전 12:25)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라(갈 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갈 6:2) 서로 권면하라(살전 5:11) 서로 덕을 세우라(살전 5:11) 서로 화목하라(살전 5:13) 서로 선을 행하라(살전 5:15)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라(엡 4;2)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엡 4:32) 서로 순종하라(엡 5:12) 서로 죄를 고백하라(약 5:16)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약 5:16) 서로를 진심으로 다정하게 대하라(벧전 1:22) 서로 대접하라(벧전 4:9) 서로 친교를 나누라(요일 1:7)
자, 그렇다면 왜 우리가 ‘서로’ 이러한 신앙적인 덕목을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해당하는 ‘알렐론’(αλληλων)이 어떤 단어에서 왔다고 했습니까? ‘다르다’는 뜻의 ‘알로스’(αλλος)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각자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고,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서로가 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서도를 위해 기도하다. 제가 앞서 드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공동체인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사랑으로 공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공동체적 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공동체적으로 실천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타인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곳곳에서 ‘나를 위해’, 혹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바울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다른 지체를 섬기는 기도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실 교회론적으로 보면 성도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각 지체가 연합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체가 곧 몸입니다. 성도는 교회의 지체이면서 곧 교회입니다. 따라서 한 성도를 위한 기도는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입니다. 성도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본질적으로 몸 된 교회를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한 성도의 아픔은 모든 성도의 아픔입니까? 한 성도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입니까? 한 성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모든 성도의 것이며 또한 모든 성도를 위한 것입니까? 본질적인 의미에서 한 성도의 기도가 모든 성도 즉 교회의 기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참이기 위해서는 그 성도가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체로서의 나의 건강함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몸 전체를 위한 기도이며, 다른 성도를 위한 기도 역시 나를 위한 기도라는 정확한 인식과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께 여쭙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 기도가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기도라고 믿으십니까? 나를 위한 기도가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기도라는 연대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공동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다른 성도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다른 성도를 위한 기도가 곧 나를 위한 기도임을 믿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동체성에 대한 정확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는 몸 전체를 위한 기도이며, 다른 지체를 위한 기도 또한 몸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세워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4.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위하여 히브리서의 기자는 본문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18-19절에서 그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선한 양심으로 선한 일을 교회에 대해 감당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1절에서 그는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20下-21上)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자신을 위한 기도와 교회를 위한 기도에서 함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선한 일에 대해 말합니다. 따라서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서로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과 서로를 위한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서로를 섬기지 않으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으면서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은 공허한 주문과도 같습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서로를 위한 삶을 사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동력은 서로를 위해 드리는 기도와 서로를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사탄은 화려한 예배가 드려지는 큰 교회당보다 성도들이 서로를 섬기는 삶과 기도가 있는 초가집을 더 두려워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보의 기도는 교회가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기도입니다. 그저 말로 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지는 것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서로를 건설하는 기도입니다. 그저 말로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는”(약 2:16)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서로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이며, 용서와 용납이 있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서로의 삶에서 실천되는 기도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 훼퍼의 기도에 대한 언급은 의미가 있습니다. “중보기도 속에서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짐을 짊어진다... 교회는 이 짐을 지고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진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마련한 도구이다.... 중보기도는 이웃과 함께 하는, 이웃을 위한, 그리고 마침내 이웃을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 안에서 온 교회가 기도한다.” 저희 할머니, 고 유재연 권사님... 참 말씀 없으시고 조용한 분이셨습니다. 제게 너는 꼭 목사가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셨던 교훈은 바로 ‘형제애’에 관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다투면 안된다... 서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한다... 서로 위하고 도와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지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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