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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4. 칼의 축복 na kim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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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45115

설교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12-21-2014

 

본 문 : 누가복음 225-35절 말씀

제 목 : 기도 4. 칼의 축복

 

이번 목요일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이번 성탄 이브에도 Youth Group을 중심으로 새벽송이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 가장 좋은 추억 중 하나가 바로 성탄 새벽에 온 마을을 돌면서 새벽 찬양을 했던 일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2000년 전 천군 천사들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선포하며 찬양했던 것을 오늘 우리가 대신하는 행사입니다. 참 의미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벽송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몇 번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부산 연산동 제가 살던 아파트 앞에 있던 나이트 클럽 사장님 이야기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쯤이었을 겁니다. 새벽 찬양을 막 시작했는데, 요란한 뽕짝 음악이 울려 퍼지는 지하 나이트클럽 앞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던 사장님이 우리를 불러 세운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찬양을 해주면 안되겠냐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때 저희 아버지의 아주 곤란한 표정을 봤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찬양을 하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 사장님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들었습니다. 자기도 어릴 때 시골에서 교회 다녔었고, 자기도 새벽송을 했다면서... 언젠가 교회에 꼭 나가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리고 저희들이 가고 다시 성탄 새벽 대목 영업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래 전 한 때 교회 다녔다는 나이트클럽 사장님도 기뻐하고,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춤을 추면서 온몸을 불태워서 징글벨을 외치는데, 왜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들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으면서도 그토록 악하고 차갑게 예수를 외면했을까요? 왜 그들은 복음을 기다린다고 하고 복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무덤에 처박아버렸을까요?

 

1. 복음이란?

 

왜냐하면 그들에게 2000년 전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선포하신 복음이 그들에게는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불편한 진실이 그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들에게 복일까요? 복의 개념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8잘을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8장에는 아주 당황스럽고도 흥미진진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하나냐라는 선지자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자비하심입니다. 아마도 그는 유 다를 사랑했던 선지자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장래와 바벨론에 대해서 예언하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28:2)라고 했습니다. 왕과 모든 신하들이 그의 예언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예언을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28:14) , 어느 예언이 맞는 예언일까요? 유다왕 시드기야는 어느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여러분은 이 두 예언 중에서 무엇이 복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냐는 평화와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패배와 포로됨을 선포했습니다. 어느 소식이 복된 소식, 즉 복음일까요? 예레미야 28:16-17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28:16-17)

 

성도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있어서 참되고 복된 변하지 않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자신입니다. 내가 들어서 편한 말들, 나를 기쁘게 하는 말들, 나를 위로하는 말들... 그것은 좋은 말 일 수 있지만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때로 그것은 참된 평강과 위로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2.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61)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후에 인기가 급격하게 올라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오직 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48-51)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되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예식을 하는 것은 구원받은 증거입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은 아주 감사하고 복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61)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말일까요? 거절하고 있다는 말일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교회와 성도의 생명의 떡이 되시고, 대속의 피가 되십니다. 우리의 복음이 되십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반대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발버둥쳐도, 아무리 나는 반대요, 나는 믿지 않소, 나는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야단을 해도,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받아도 예수님은 복음이 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이 복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복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걸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평강을 선포할 수 있고, 그들의 패배와 포로됨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고 편하고 잘되고 복받고...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 나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3. 칼의 축복

 

오늘 하나님이 주신 본문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았습니다. 그는 지난 주 말씀을 나눈대로 눈크 디미티스의 기도를 드립니다. 어떤 기도라고 했습니가? 주님, 이제 저를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30-32) 분위기 좋지 않습니까? 찬양이며 기도이며 감격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기 메시야의 부모를 봅니다. 2:34-35를 봅시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2:34-35)

 

34절 서두에서 분명히 시므온이 마리아와 요셉을 축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기에 대해 예언합니다. 요약하면 아기 메시아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칼이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성도 여러분!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평생을 기도하며 기다려온 시므온입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다가온 메시야를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기와 그 부모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요? 슬프고 아픈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요? ... 당연히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좋은 말만 했다면 그것은 좋은 말이지, 복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일단 부모를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전합니다. 무엇이 아기 예수님과 부모에 대한 복음입니까? 그들을 위로하는 말일까요? 그들의 삶에 다가올 치명적인 고통에 대한 예언일까요?

 

복음은, 때로 복음은..... 칼보다 날카롭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처녀로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복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제 그녀에게 다시 더 고통스러운 복음이 다가왔습니다. 시므온의 축복은 마리아에게는 칼의 축복, 칼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스러운 축복이었습니다.

 

4. 십자가, 복음의 근원

 

아들은 비난의 표적이 되고, 어머니는 그 아들로 인해 심장을 칼로 찌르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 그들은 그것이 고통인 줄 알면서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통도, 눈물도, 아픔과 상처도 하나님이 뜻 가운데 있을 때 축복입니다. 그 어떤 삶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때 축복입니다. 칼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 속에 살아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복음의 삶이요, 곧 복음입니다.

 

유대인들과 오늘날 많은 교회가 고통 없는 복음, 십자가 없는 순종, 눈물 없는 축복만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과 그를 잉태한 어머니에게 선포되는 축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어린 아기에 대해 많은 사람의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말, 그 어머니에게 이 아기로 인해 가슴을 칼로 찌르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말.... 하나님은 시므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슴 속에 묻어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고 받으실 깊은 아버지의 고통과 눈물에 젖은 마음, 그 마음은 세상의 축복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에게,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복음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칼의 축복이라 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리아에게 적용할 때 가장 적절한 제목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바로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요? 저는 십자가의 축복이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마리아에게 칼이 축복이었다면,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심장을 찌르는 칼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감당했듯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 축복의 삶,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 여러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칼이 축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에게 그렇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고통도 복이 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축복일까요? 복음일까요? ...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만난 복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곧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를 기도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평안하고 잘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선포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내 삶이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고, 어머니 마리아가 눈물로 축복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2000년 지나 오늘날 주님 오신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축복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잘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믿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칼의 축복, 십자가의 축복 우리의 믿음과 삶 속에 풍성하기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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