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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5.기도하는 사람 na kim 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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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2014-12-25

2014. 12. 25. 성탄절 설교

 

본 문 : 누가보음 225-35절 말씀

제 목 : 기도 5. 기도하는 사람

 2015년 성탄절입니다. 서로 마주보며 인사해 보실까요? 제가 성탄절이나 혹은 인사말에 쓰기 좋아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그저 인사말로 쓰지는 않습니다. 저의 신앙과 소망이 함께 녹아 있는 말입니다. 우리 이 말로 서로 다시 인사해보실까요?

  우리 주님은 우리를 화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둘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갈라진 틈을 메워주시는 분입니다.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슬픔과 분노를 위로하시고, 아픔과 고통을 치료하십니다. 혹시 오늘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아픔이 있다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고통 가운데 있는 관계가 있다면 우리를 화평케하시는 아기 예수의 은혜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역사하시도록 눈물 많은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고 참된 화평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2주 전부터 어두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 주님을 자신의 삶을 걸고 기다려온 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2주 전 말씀의 제목은 기다림의 기도지난 주 말씀의 제목은 칼의 축복입니다. 이 설교들은 모두 누가복음 2장에서 소개되는 시므온의 기도와 삶을 묵상하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탄절에 마지막으로 시므온에 대해서 다시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시므온처럼 기도하는 삶을 살기 위한 아름다운 결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혹시 여러분은 내가 기도하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목사님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도에 대한 예화 가운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성장학자인 허브 밀러라는 사람이 쓴 ‘Connecting with God’이라는 책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캐나다의 한 작은 마을에 큰 술집을 겸한 나이트클럽이 들어섰습니다. 젊은이들이 밤마다 모여서 놀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어른들이 교회로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마을이 시끄러워졌고, 젊은이들이 정신을 못차린다는 겁니다. 열심있는 성도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트클럽에 불이 나서 영업을 못하도록 해주시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나이트클럽에 불이 났습니다. 영업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나이트클럽에 불이 나도록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이트클럽 사장이 법원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판사 앞에 나이트클럽 사장과 교회 대표가 섰습니다. 나이트클럽 사장은 교회가 기도해서 불이 났으니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기도한대로 다 되는 게 어디 있냐는 겁니다. 우리는 책임질 수 없다는 겁니다. 판사가 판결에 앞서 자기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물론 교회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더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는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회의 성도들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군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허브 밀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기도의 수준이 곧 신앙의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통함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들었다면 우리는 그 기도대로 살아야 합니다. 2000년 전 시므온의 기도를 오늘날 우리가 묵상하고 본받고자 하는 것은 그가 기도를 통해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을 주셨을 때.... 그가 그 기도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며 기대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기도하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어떻게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시므온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정보가 하나 본문에 숨어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고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2주 전에 함께 생각한대로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원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당시 유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의로움과 경건함을 지키지 쉽지 않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그의 삶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2:25)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뜻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사명, 즉 기도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명을 그의 삶을 드려서 감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야를 기다렸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오직 시므온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에게 있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의 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활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자기 안에 주신 하나님의 뜻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2:25-27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2:25-27)”

그의 모든 경건, 의로움, 기다림의 이유가 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고, 성령이 지시하시며, 성령이 감동하십니다. 어떻게 성도가 자신의 생각이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도가 자신의 욕심과 소원을 따라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시므온이 그 답을 우리들에게 답을 보여줍니다. ‘성령에 있습니다.

3. 사명으로 살아가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기사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세례 요한과 그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있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있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시므온과 안나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믿었고, 주신 사명에 순종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어야 했고, 스가랴와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요한을 낳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은 천군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아기를 맞이했고, 동방의 박사들은 먼 길을 돌아 아기왕께 경배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오직 하나의 사명으로 그들의 삶을 바쳐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에게 시작된 소원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며 헌신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소원으로 기도했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헛된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으로 살았던 것은 바로 그 사명이 자신의 소원이나 욕심이 아닌, 오직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유대땅에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서기관들은 아기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지역까지 알아맞힙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경배하지 않았을까요? 왜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기도와 기다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소원과 욕심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대 메시야가 그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 그들은 메시야를 만났습니까? 만나지 못했습니까? 메시야가 그들에게 왔으되 그들은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외면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각과 소원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명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소직 소원으로만 살았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29)라는 기도는 오직 사명으로 살아온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2:34-35) 시므온의 축복, 즉 칼의 축복 또한 사명으로 살아온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3.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경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어쩌면 성경에 꼭 필요한 부분만 소개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에게 약점은 없었을까요? 혹시 시므온은 산헤드린 공의회 안에 사이가 나쁜 사람은 없었을까요? 시므온은 비난 받거나 비판받을만한 부분은 전혀 없었을까요? 그야말로 무흠한 사람이었을까요?

4.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

성경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 혹은 믿음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믿음을 떠난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기도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마음에 들리지 않는 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기도를 하는 것뿐입니다. 왜 그들은 스스로 믿음 있다고 여기면서 제대로 기도하지 못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들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허물 많이 때문에 더욱 기도합니다. 기도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넘어서서 하나님은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낮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책임지시는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감사의 삶을 사는 초대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소개하는 여러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약점도 함께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베드로나 바울도 모두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시므온 또한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삶의 지향의 일관성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기도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한 대로 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했던지 메시야를 보자 첫 마디가 주여, 이제 죽어도 되겠습니다. 저를 불러가셔도 됩니다.”라고 했겠습니까? 그가 연약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부족함이 없었더는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결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도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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