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6.믿음은 기다림이다. | na kim | 2014-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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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은 아래를 클릭해 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2014-12-28 본 문 : 누가복음 2장 36-38절 말씀 제 목 : 기도 – 6. 믿음은 기다림이다. 아마도 여러분도 ‘홀로서기’라는 시집에 대해 아실 겁니다. 서정윤이라는 교사 출신의 시인이 아주 달달하고 감상적인 시들을 묶어서 출판한 시집입니다. 1987년에 나왔고, 3권까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시집의 머리말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아십니까?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입니다.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다림.... 여러분, 이런 기다림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기다림은 시인의 시집처럼 낭만적이고 서정적일까요? 아니면 견디기 힘든 고통일까요? 저는 기다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고, 결국 우리의 생명을 사용하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 연말에 쇼핑을 포기한 이유도 줄을 서서 기다리기 싫어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기다림에 대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난 두 주일과 성탄절에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시므온은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아니 부르심에 대한 기약조차 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그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메시야는 언제 그들에게 찾아올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 그들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역사적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믿음은 기다리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는가에 있습니다. 기다림의 자세 예수님의 시대에는 기다림의 개념과 방식에 대한 극명한 대립을 보여주는 여러 입장이 있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가장 대표적으로 메시야의 임재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가 지극히 정치적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정치란 사람들의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람의 일로 격하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가 그들의 정치적 한을 풀고 야망을 성취하는데 사용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만났을까요? 만났으되 만나지 않았습니다. 바라새적인 전통을 따르는 오늘날의 Jewish들이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으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야가 아닌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는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으되 자신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사람의 소원을 해결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성취되는 통로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시대에는 사두개인이라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유다를 정복하면서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부유하고 안락한 지위를 보장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이익과 지위를 보장받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처럼 주욱~~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살렘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 굴에 살면서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우리가 왜 강도야? 강도는 우리 민족을 착취하는 로마지...”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의 편에서 유대민중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좀 더 쉽게 통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가 눈에 보이는 강도라면, 제사장들은 성전이라는 동굴에 숨어 있는 강도였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담당하는 직업적 종교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스스로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변하고 삶이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군중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희생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할 때 자신을 제물로 드립니다. 믿음은 타인을 손가락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이미 지치고 낙심해서 기다림이고 뭐고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 휩쓸리고 저리 몰려다녔습니다. 이미 소망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희망을 발견하면 쉽게 마음을 주고 또 쉽게 낙심했습니다. 당시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따랐다가 곧 등을 돌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며 유리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선교의 대상은 예수님이 만났던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의 방향과 소망을 보여주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그 좋은 예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2. 안나라는 여인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만나는 여선지자 안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안나라는 이름은 ‘은혜’라는 뜻을 가졌고, 히브리어 ‘한나’의 헬라어 표기 방식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히브리어 이름인 야곱(Jacob)이 신약에서는 James로 표기되는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먼저 아실 것은 여선지자 안나의 나이가 번역본에 따라 다르게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역 성경과 NIV성경은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6-37)( There was also a prophetess, Anna, the daughter of Phanuel, of the tribe of Asher. She was very old; she had lived with her husband seven years after her marriage, and then was a widow until she was eighty-four. She never left the temple but worshiped night and day, fasting and praying.)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전에 사용하던 개역 성경과 KJV는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6-37) (And there was one Anna, a prophetess, the daughter of Phanuel, of the tribe of Aser: she was of a great age, and had lived with an husband seven years from her virginity; And she was a widow of about fourscore and four years, which departed not from the temple, but served God with fastings and prayers night and day.) 차이는 뭘까요? 과부가 되고 난 후 84년이 흘렀다면 여선지자 안나의 나이가 꽤 많습니다. 당시 유대 여인들의 보편적으로 15세 전후로 시집을 갔습니다. 남편과 7년을 살고 과부가 됐습니다. 84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106세 정도는 되었다는 말입니다. 반면 결혼하고 남편과 7년을 살고 나이가 84세가 되었다면 다릅니다. 약 60여년을 혼자 기도하며 살았다는 것이 됩니다. 어느 번역이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문자대로 해석하자면 KJV와 개역 성경이 맞고 상황으로 보자면 NIV와 개정 개역 번역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삶입니다. 그녀가 언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계시가 끊어졌던 영적 암흑의 시대에 여자 선지자로 평생을 헌신한 여성이었습니다. 당시에 여성이 선지자로 헌신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녀를 선지자로 부릅니다. 선지자로서 그녀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왜 그녀는 선지자일까요? 3. 선지자가 되다. 성경이 요약하고 있는 그녀가 한 일은 첫째, 성전에 머무는 일입니다. 둘째, 그녀는 그곳에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served/worshiped God with fastings and prayers night and day) 그저 기도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KJV에서는 served God으로 NIV에서는 worshiped God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을 성전에서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왜 그녀를 영적 암흑기 시대의 선지자로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무엇을 하는 처소입니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입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성전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 가장 밀접하게 교통하는 처소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사장들이 지키던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굴혈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탐욕과 욕망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속죄와 속량의 은혜가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죽일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여선지자 안나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serve) 예배(worship)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기도와 금식으로 그녀는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성전을 맡긴 제사장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거부하고 있을 때 한 나이 많은 여인이 그 마음과 삶의 순결함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때까지 성전일 수 있었던 것은 제사장들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안나와 같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모두가 교회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숫자가 줄어서 위기일까요? 교세가 약화되어서 위기일까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교회는 다수요 강자였을 때 부흥을 이룬 일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급속하고 과도한 부흥이 오히려 위기였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약자의 자리, 고난 받는 자리에 있을 때 늘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좀 더 약해져도 되고, 좀 더 어려워져도 됩니다. 다만 교회에 누가 있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이 있어야 할까요? 예,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한국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초대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성도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성도가 있으면 됩니다. 많지 않아도 되고, 높지 않아도 되고, 크지 않아도 됩니다. 강하거나 부자가 아니어도 됩니다. 100세 전후의 여선지자 안나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예배와 제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그녀는 전 삶을 헌신하여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안나가 했던 일입니다. 예배하고 섬기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입니다. 4. 목적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이 의도적으로 두 사람, 시므온과 안나를 소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려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결례를 지키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왔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는 무엇인가 조금 다릅니다. 시므온은 성령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에 메시야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나는 다릅니다. 성경에 그녀는 어떤 계시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삶만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더니 7년만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이후로 60년 혹은 80년 남성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혼자된 여성으로 살았습니다. 평범한 삶도 아닙니다. 여자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선지자도 아닙니다. 선지자로서의 그녀가 한 일은 성전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메시야 대한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할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시구대로, 그저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했을 수 있습니다. 언제인지 모를 메시야의 강림, 아니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녀는 자신의 삶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오직 한 길로만 엎드렸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사람들이 아무리 악해도, 내 삶의 조건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오직 한 길만 갑니다.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내 인생을 다 드려도 하나님의 때가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 만남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영광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내가 하늘의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면,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나는 가장 가치있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씀 좀 드릴까요? 지난 주간에 홍재성 집사님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자꾸 미안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가끔 어르신들이 제가 그런 말씀하십니다. 좀 젊고 능력이 있을 때 왔으면 교회에나 목회에 힘이 될텐데 나이 들어서 와서 짐만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축소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하고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젊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헌금하고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삶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다시는 우리 어르신들이 그런 말씀 뒤로 숨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안나를 소개하는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8) 성경이 말하는 ‘마침 이때’는 언제를 말할까요? 그것은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아서 메시야를 기다렸고, 알아봤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를 축복하던 때를 말합니다. 바로 그 때, 비록 하나님이 그녀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시지 않았지만 ‘마침 이 때에’ 그녀가 성전에서 축복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연일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일까요?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요.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자 사명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인생의 목적인 야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목적은 비전과 사명입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38절 상반절에서 그녀는 아기 메시야의 증인이 되었고, 하반절에 보시면 자신과 함께 기도하며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2014년을 보내는 마지막 달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두 사람을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믿음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어떻게 기다릴까요? 시므온처럼 기다리면 됩니다. 안나처럼 기다리면 됩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과 뜻대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면서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안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면서 성전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때로 만남을 목적할 수 없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면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정한 목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내가 사는 세상에, 내가 섬기는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처음 증거한 선지자를 세례 요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신약에서 어느 선지자가 가장 먼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전했습니까? 여선지자 안나입니다. 큰 영광입니다. 삶으로 예배하고 섬기며 기다리는 안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이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함이 가장 우선이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뻐하고, 그래서 평생을 통해 하나님과 사귀며 각자의 인생에 허락된 사명을 이루며 사는 초대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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