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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9.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na kim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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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45127

      설교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1-18-15

2015. 1. 18.

 

본 문 : 욥기 42:1-5

제 목 : 기도 9.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매일 기도하기는 하는데, 때로는 내가 기도한 내용이나 기도를 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 기도하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아무런 기대 없이 다시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나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필요한 재정이 충족되지 않자 새벽기도 때 고춧가루를 한통 들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주먹 손에 쥐고 눈 앞에 갖다 대면서 하나님, *** 죽일라캅니꺼? 살릴라캅니꺼? 오늘까지 해결안되모 *** 죽심미데이!”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까요? 새벽기도에 나온 어느 혼자 사시는 여자 집사님이 그 기도를 듣고는.... 정말 목사님 돌아가실까봐, 그 급한 성격에 눈에 고춧가루 넣을까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평생 모은 3000만원을 그날 오후에 들고 왔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꼭 3000만원이 필요했는데 딱 3000만원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기도에 누가 응답한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을 통해서 응답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응답이라면 하나님께 응답을 강요한 것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실까요?

 

기도는 대화입니다.

 

다시 기도에 대한 성경 공부와 설교의 첫날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대화입니다. 대화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또 듣는 것입니다. 내가 질문하고 대답을 받습니다. 기도란, 그러므로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기도에 대한 다소 심각한 오해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기도의 응답에 관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봅시다. 기도를 하나님과 성도의 대화라고 할 때,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소원이 이루어져야 우리는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얼마 전에 이영표 선수가 간증하는 영상을 봤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같은 꿈을 가진 두 명의 청년이 있습니다. 둘 다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최선들 다해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합격을, 다른 사람은 낙방을 합니다. 이영표 선수가 질문을 합니다. 합격한 사람이야 기도의 응답일 것인데, 낙방한 사람은 그렇다면 기도가 거절된 것일까요? 아니면 기도를 잘못한 것일까요? 이영표 선수는 아주 탁월한 개념으로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너무 성공과 실패로 응답을 가늠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는 분이시지 성공시키거나 실패시키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축복으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성공도 응답이 아닐 수 있고, 실패도 응답일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무조건 되어야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명령 하려는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이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보시고 우리의 삶의 미래를 보십니다. 우리의 피와 땀을 보시고 우리의 가능성을 함께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8-9)입니다. 누구의 생각이 이루어질 때 축복입니까? 내 뜻이 관철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높고 깊으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해야 합니다. 응답을 사모하되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깨닫는 것이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잘 박힌 못! vs. 안들리는 이유

 

저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가족들을 대표해서 기도하실 때 항상 사용하시던 문구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잘 박힌 못과 같이라는 구절입니다.

 

잘 박힌 못이라.... 저는 그 말의 의미가 참 궁금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도의 심령 가운데 잘 박힌 못과 같이 새겨지게 하옵소서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못이 박힌다.... 어린 마음에 좋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말씀이 전도서에 있더군요. 전도서 12:11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12:11)라고 했습니다.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잘 박혀서 빠지지 말라는 말이구나....

 

그런데 못질을 하다 보니 배운 것이 있습니다. 망치와 못도 중요하지만 그 못이 박히는 자리가 또 중요합니다. 부드럽고 좋은 나무에는 못이 잘 박히겠지만 딱딱하고 굳은 콘크리트에 못이 잘 박힐 리가 없습니다. 콘크리트에 무엇인가를 박으려면 화약도 사용해야 하고 특수한 장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나무에는 못이 잘 박힙니다.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잘 듣는 사람이구요,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라틴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제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화살은 결코 돌에 꽂히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그것을 쏜 사람에게로 도로 튀어 간다.”

 

일반적으로 듣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끔 당황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 같은 시간,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두 사람 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왜 같이 대화했던 사람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듣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내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상대방의 생각이 아닌 나의 해석인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내가 대화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른 생각이 내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귀로는 들었는데 마음에 박히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아닌 다른 생각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듣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살을 돌에 꽂히지 않습니다. 콘크리트에 못이 박히지 않습니다. 준비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메러비안의 법칙과 하나님의 언어

 

그런데 우리는 다소 억울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준비된 내게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혹시 메러비안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미국의 심리학자인 알버트 메러비안이 연구한 결과인데요, 사람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목소리, 표정, 태도, 그리고 대화의 내용이 과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도표화한 것입니다. 보실까요?(사진1)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음성에서 38%, 표정에서 35%,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20%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정작 언어적 언달은 7%밖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요하고 진지한 이야기일수록 요즘 보편화되어 있는 전자 메일이나 톡 형식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메러비안이 주장한 대로 우리는 언어 자체를 사용하는 대화보다 비언어적인 대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사람과 대화할 때도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화의 환경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왜 우리는 기도하고 그 응답을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딱딱 들려주셔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일까요? 혹시 하나님은 언어가 아닌 다른 수많은 것들로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신의 삶에 다가온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는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며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들을 통해서 그에게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충분히 들려주셨습니다. 욥기의 내용은 대부분 욥의 고난에 대한 친구들의 해석과 욥의 자기변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말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범죄한 일이 없고, 따라서 이렇게 고난 당할 이유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1-2) 하나님은 욥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다소 황당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자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치를 깨달아 아는지를 물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 말씀하셨다는 것이고, 우주만물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욥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가 풀지 못했던 인생의 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대답하셨을까요? 욥의 다른 친구들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을까요? 같은 음성이었을까요? 폭풍우 속에서 욥이 사용하는 같은 언어를 쓰셨을까요? 아니면 욥이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소리로 임하셨을까요?

 

4. 경청, 응답받는 길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만나주실 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광야를 헤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힘이 듭니다. 죽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그와 교통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데려가십니다. 큰 바람이 일어납니다. 바위가 깨어지고 산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지진 이후에 이 일어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세미한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바람 소리, 하나님께서 그 바람 소리와 더불어 말씀하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 말씀하시고, 요셉에게는 꿈으로 말씀하셨고, 느부갓네살왕에게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와 함께 풀무불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말씀하셨고, 교만했던 벨사살에게는 벽에 손가락으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쓰셔서 그의 시대가 곧 끝날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는 양털을 통해 말씀하셨고, 삼손에게는 머리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발람 선지자에게는 나귀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셔서 밤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를 보여주시고는 저렇게 너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메시야를 백성들이 찬송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 하셨습니다. 종말의 때를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4:32-3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화과의 잎사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말씀으로 나를 교훈하시고 우리 인생의 답을 주십니다. 성경 공부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민과 함께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합니다. 그런가 하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뜻밖의 대답을 주기도 하십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의 언어를 통한 감동을 주십니다. 비언어적인 것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가득하게 우리들을 향한 편지를 써 놓으셨습니다. 시편 19편이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19:1-4)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밤 깊도록 동산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우리 또한 장미꽃 위에 보석보다 투명한 이슬이 맺힌 것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주만물을 통해서 쟁쟁하게 울리는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과 삶에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언어적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은 제한적일 수 있지만 자연환경과 우주만물과 삶의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제한 없이 높고 깊고 넓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 옆에서 침묵만 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어로, 우주만물에 충만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경청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내 말만 하려고 들지 말고,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모든 소원과 기도의 제목에 대해 함께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고, 화살처럼 박히고, 씨앗처럼 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에 성공하는 성도,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고 어두운 인생길을 밝히 걸어가는 가정,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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