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0. 미리암의 노래 | na kim | 2015-0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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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1-25-15
2015. 1. 25. 본 문 : 출애굽기 15장 19-21절 말씀 제 목 : 기도 – 10. 미리암의 노래 이번 2015년 90일 성경통독을 하면서 출애굽기를 읽다가 문득 멈춰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기 15장의 미리암의 노래에서입니다. 그녀는 200만 히브리인들과 함께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을 뒤좇는 애굽의 군대를 보며 바다를 지나왔습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 시내 광야에 들어선다고 해도 그들의 뒤를 따르는 천하무적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잡는다면 이 광야에서 죽거나 다시 애굽에 잡혀가서 노예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고, 건너간들 애굽의 군대와 함께라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드디어 건너편 시내 광야의 언덕에 올라선 그녀는 큰 감격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을 좇아오던 애굽의 군대를 홍해의 거센 파도가 삼키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치밀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습니다. 군대가 무엇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다를 사용하여 대신 싸워주신 것입니다. 그녀는 소고를 치며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여인들이 함께 나와서 시내 광야의 한 언덕에서 휘몰아치는 물결에 전멸당하는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며 높으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소리 높여 찬양하고 춤추고 소고를 치고 뛰고 또 뜁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미리암은 생후 3개월된 모세를 부모가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낼 때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혜로웠던 미리암은 모세의 어머니를 바로의 공주에게 유모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10살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금 모세는 몇 살입니까? 80세입니다. 미리암의 나이가 90은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미리암이 지금 뛰고 춤을 춥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나이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1. 미리암의 노래
오랜만에 성경을 읽고 또 미리암을 생각하면서 글을 하나 써 봤습니다. 춤추며 노래하는 미리암의 마음이 되어서 써본 글인데, 우리 황권사님이 좋은 목소리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모세야, 나는 나일 강변을 달렸던 적이 있다. 10살도 되지 않았던 소녀였다. 혼절해 누워버린 어미와 이를 악물고 서 있는 아비를 뒤로 하고 갈대 상자에 둥둥 떠내려가는 100일된 너를 따라 젖은 갈대숲을 달리고 또 달렸었다. 강물은 이스라엘 어미들의 눈물로 더 깊어졌고 무기력한 아비들의 한숨으로 더 굽이 쳤다. 엄마, 아빠... 불러보지도 못하고 물고기의 밥이 되어야 했던 아기들의 울음 소리가 강물이 출렁이는 모든 땅에 울려 퍼졌다. 하나님, 듣고 계신가요? 하나님, 살아 계신가요? 하나님,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시나요? 하나님... 하나님...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나는, 울었다. 달렸다. 꺽꺽.... 원망하고 원망하고 원망했다. 바로의 공주에게 너를 맡길 때, 어미를 깨워 소개할 때 그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 너의 죽음을 보지 않은 것으로 감사했었다. 우리는 홍해를 지나왔다. 붉은 바다가 저편 애굽 땅 언덕에서 이편 시내 광야 언덕까지 출렁인다. 조금 전까지는 벽이었는데, 조금 전까지는 길이었는데, 두려움에 굳은 얼굴로 200만의 노예들이 지나오기까지 든든하게 지켜주던 붉은 성벽이었는데, 바다는 노예들의 목을 자르던 칼과 등짝을 파고들던 채찍과 식민지를 짓쳐달리던 정복자의 말과 병거들을 삼키고 으르릉, 으르릉 소용돌이치고 있다. 수백만 수천만의 신음들이 강물로 흐르고 하나님은 그 강물을 모아 정의의 바다로 덮으셨다. 모세야, 나는 이제 90의 노인이 되어 소고 치며 노래하며 춤을 춘다 죽음이 흐르던 나일 강변, 열 살 소녀의 절망의 질주가 아닌 구원과 심판의 해변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어미들과 함께 노래한다, 소리를 친다 춤을 춘다, 눈물을 뿌린다. 소고를 친다, 껑충껑충 더 높이 하늘을 날아오른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원망하던 이스라엘의 기도는 노래가 되고 춤이 되어 붉은 바다를 덮고 있다. 모세, 내 자랑스런 동생아 이스라엘의 어미와 아비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강물에 띄웠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너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고 강물을 모아 바다로 애굽을 삼키셨다. 연약한 자의 신음에 응답하시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출렁인다.
2. 성도의 신음 이전에 막 유학 와서 부교역자로 교회를 섬기던 1998년 ‘주만 바라볼찌라’라는 찬양이 막 보급되던 시기였습니다. 저 역시 그 찬양을 처음 접하고 너무 좋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함께 교역자로 섬기던 영어권 목사님이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가사에 너무 은혜를 받는다고 영어로 번역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같이 부르면서 은혜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조금 전에 시를 들었으니까 이제 함께 이 찬양을 해볼까요? 이 찬양을 요약하면 어떤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아주 작은 신음까지도 기억하고 응답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특별히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이라는 부분에 마음이 많이 움직였습니다. 살다보면 기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시편 22편 1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이후 시편의 내용을 보면 시인이 당하고 느끼던 고통의 정도가 표현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시 22:6)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4-18) 지금 시인의 상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육신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있는 뼈를 셀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개들과 악한 무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수치와 조롱을 당합니다. 겉옷이 벗겨지고 속옷까지 벗겨졌습니다. 게다가 7절을 보면 사람들이 시인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15절에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고통이 그 정도를 넘어서 죽음의 경계에 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도가 나올까요? 기도의 제목이 기억날까요?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기도가 안나와요. 너무 기가 막혀요. 너무 힘들고 어려워요. 기도보다는 원망이 나와요. 소망을 품기보다는 그저 절망하고 싶어요. 감사보다는 분노가 앞서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요. 나를 적대하는 사람들만 보여요. 입을 열면 기도가 아니라 신음 소리만 흘러 나와요....” 그런데 시편 22편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고, 찬양과 기도가 아닌 신음조차 듣지 않으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출애굽기는 이런 절망의 깊은 바닥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3. 나일 강변을 달리다. 저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어머니들의 마음을 생각해봤습니다. 아버지들의 절망을 생각해 봤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어쩌나... 고민하다가 아기를 받고 보니 정말 아들입니다... 기쁠까요? 슬플까요? 왜 그렇습니까?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강에다 버려야 합니다. 아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부모가 죽고 다른 자녀들이 죽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젖 한번 제대로 물리지 못하고 강물에 던져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 아기를 아비로서 보호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한 소녀를 주목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미리암입니다. 그녀는 동생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웠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일까요? 걱정일까요? 예, 당연히 걱정입니다. 단순한 걱정일까요? 절망일까요? 아무리 갈대 상자에 역청을 칠하고 쉽게 가라앉지 않게 만들었다한들 강물에 떠내려가면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혹시 다시 건져온다 해도 결국 가족이 살기 위해서 다시 강물에 띄워야 합니다. 어린 소녀는 부모의 절망의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녀 또한 무너지는 마음을 안고 동생이 담견 갈대 상자를 바라바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미리암은 기도했을까요? 모세의 부모는 기도했을까요? 여러분이 그들이라면 기도했을까요? 사내 아이를 낳고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석달을 몰래 키웠다고 했습니다. 이제 버려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스럽고 더 많이 고통스럽습니다. 아마 모세의 부모는 그렇게 모세를 보내고 쓰러졌을 것입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부모가 죽어도 좋은 것인데... 그게 부모인데 내가 살기 위해 아기를 강물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족이 살기 위해 아기를 버려야 하고, 아기를 버리니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울부짖습니다. 눈물 흘립니다. 모세의 가족뿐만이 아닙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전부의 절규입니다. 애굽의 압제 아래 아들들을 강물에 던져야 했던 노예 이스라엘 백성의 절규였습니다. 그들의 눈물이 강물이 되고, 그 눈물의 강변을 지금 미리암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소망을 품고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곧 강물에 가라 앉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동생 모세와 그들이 미래를 지켜보며 절망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4. 스스로 응답이신 하나님 80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미리암은 그 기억을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왔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보시셨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붉은 홍해 바다 앞에 왔습니다.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이제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 흙먼지가 일고 있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포기와 절망, 증오와 원망에 익숙한 그들은 다시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증오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바다에 길을 여시고 그들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그들의 길이 되셨고, 바다의 성벽이 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애굽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위해 열린 바닷길에 뛰어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길이 되시고 물의 성벽이 되어주셨지만, 애굽의 기병들에게 하나님은 휘몰아치는 파도가 되셨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셨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겼고,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었던 애굽의 마병은 처절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입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서 제게 기도에 대해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잘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소위 폼 나게 기도하는 일이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기도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구원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 그들의 신음소리입니다.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신음조차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사정과 형편에 대해 가장 적절하고 완전하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든 사정과 형편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란 하나님과의 신실한 교통함입니다.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함은 때로 화려한 말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에게 사람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이미 응답이 되어 주십니다. 나일 강변을 달리는 미리암에게도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응답이었고, 절망에 쓰러진 이스라엘의 모든 부모들에 대해서도 응답이었고, 원망하고 패배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으로 신앙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신실한 응답이십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신실한 응답이 되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이 성벽이 되어 보호하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험한 인생 길을 함께 걷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에 대해 신실한 응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함께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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