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5 정사 예배 | na kim | 2015-0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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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3. 정사 예배 본 문 : 요한복음 18장 15-18절 말씀 제 목 : 베드로의 경계(經界) 만일 제게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 있게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합니다. 저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대신 질문을 다르게 하면 좀 편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 닮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질문에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닮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왜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합니까?”라고 따져서 묻는다면... 하하... 저는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마음은 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말씀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 동의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만 잘 안되는 것뿐입니다.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저 자신 안에도 있고, 관계 속에서도 있고, 환경에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 정도로 변명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딱히 말씀을 능동적으로 어기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양심과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다만 가끔씩 한계를 만납니다. 그 한계는 반복적이며 견고합니다. 저는 성경이 베드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베드로는 충격적이면서... 실은 좀 위로가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장면, 고난 주간이 되면 한번쯤은 언급하게 되는 베드로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을 함께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들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함께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 베드로, 안나스의 뜰에 가다. 지금 베드로가 서 있는 곳은 제사장 안나스의 집 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심문과 고문을 당합니다. 15절 상반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제자란 아마도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한은 성경이 자세하게 알려주지는 않지만 대제사장 친분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십자가에도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안나스의 집으로 예수님을 따라 갔고,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게 됩니다. 자, 우리 함께 생각을 해 볼까요? 베드로는 왜 결박당해서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다 뿔뿔이 도망쳤는데, 왜 그는 용감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까요? 우리가 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 일이 그리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몇일 있으면 형장이 이슬로 사라질, 정치범으로 몰리고 있는 스승을 따라 법정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죽일 계획을 세웠고 실행하고 있는 대제사장의 집 안에 성큼 들어선 것입니다. 그야 말로 호랑이굴로 들어선 것 아닙니까? 믿음이 없이는,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일이 있고, 지금 그 선언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너는 누구냐? 그런데 베드로에게 중요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15절에서 17절을 잇는 상황을 봅시다. 요한은 아마도 대제사장과의 친분 때문에 쉽게 그 집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저기 담장 너머 결박을 당해있고, 나는 그 뒤를 따라왔는데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고 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서성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요한이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을 잘 해줬습니다. 좀 데리고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여종이 베드로를 들여보내주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여종에 베드로를 들여다 보내면서 자세히 보니까... 뭔가 좀 수상해 보입니다. 여종은 이렇게 묻습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You are not one of his disciples, are you?"(설마 당신...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아니겠지? 그렇지?)(요 18:17) 여종의 묻는 방식이 교묘합니다. 여종은 딱히 이 사람이 제자인지 아닌지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 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요한이 부탁을 하니 들여보내주기는 하는데, 베드로가 워낙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다보니 어... 낯이 익은 것입니다. “에이... 설마 저 사람의 제자가 간 크게 여기 오겠어? 좀 닮기는 했네... 당신, 혹시 저 사람 제자는 아니지? 그렇지?”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만일 그 여종이 “당신은 저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저 사람은 구주로 믿습니까?” 라고 물었다면 대답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 저 사람 제자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교묘합니다. 질문 자체가 부정의 대답을 하기 쉽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소 죄책감 없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쉽게 “I am not”이라고 대답합니다. 여종의 질문은 교묘하고 유혹적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교육할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특정한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착한 가일이 아빠한테 거짓말 안하지요?” 어떤 대답을 유도하고 있는 겁니까? 정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예, 안해요!”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빠, 실은 제가요, 어제 거짓말 했걸랑요...”라고 대답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종은 지금 내가 듣고 싶은 대답, 베드로가 대답하기 쉽도록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탄은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고 있었고, 여종을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경계를 낮추는 질문을 던졌고, 베드로는 그 질문이 파 놓은 함정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3. 불을 쬐다. 저는 조금 전에 여종이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경계를 낮추는 질문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질문에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그 다음 장면을 보면 낮아진 경계의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경계’(經界)라는 말의 뜻을 알고 계십니까? 네이버 사전에 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해지는 한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양심과 믿음에 근거해서 판단하면 옳고 그름의 한계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경계가 약해지거나 낮아질 때가 있습니다. 죄와 악에 유혹당할 때가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염려에 빠질 때가 그렇습니다. 내 소원이 말씀을 앞설 때가 그렇습니다. 야망이 비전을 앞설 때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경계가 흔들리고 낮아지고 무너집니다. 17절에서 “No, I am not!”이라고 예수님의 제자됨을 부인했던 베드로, 스스로 낮아져버린 경계를 인정했던 베드로는 18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18절을 읽읍시다.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7 / And the servants and officers stood there, who had made a fire of coals; for it was cold: and they warmed themselves: and Peter stood with them, and warmed himself.) 새벽녘에 기온이 많이 내려갔습니다. 추웠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불가에 다가섭니다. 어렵게 예수님을 부인해가면서까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왔는데, 그의 발걸음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숯불이었습니다. 그는 왜 숯불에 다가섰을까요? 성경은 날이 추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또한 종과 하속들과 함께 불가에 가까이 가서 몸을 덥히기 위해 불을 쬐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왜 이곳에 와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제사장 안나스의 뜰에서 채찍질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차가운 바닥에 있고, 매를 맞고 있고, 고문당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추위를 느껴서 예수님이 아닌 모닥불로 다가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는 자리를 피해서 나는 따뜻하게 불을 쬐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경계를 낮춘 결과입니다. 믿음과 양심의 경계를 낮추었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에 대해서 둔감해졌습니다. 나의 필요에 민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보다 나의 추위가 더 절박합니다. 그는 그렇게 불을 쬐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고통보다 자신의 몸을 떨게 하는 추위에 더 민감해진 것입니다. 4. 닭이 울다. 베드로는 자신을 보호한 것일까요? 오히려 위험에 노출시킨 것일까요? 그 이후 일어나는 사건이 대답해줍니다. 18장 25-27절을 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 18:25-27) 이 사건을 함께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베드로는 두 번째 부인할 때는 맹세를 하면서,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더 안전해졌습니까? 큰 위험에 노출되었습니까? 그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있는 믿음과 사랑의 경계를 조금 낮추고 “No, I am not...” 정도로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의 낮아진 경계를 밟고 올라섭니다. 그로 하여금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하게 합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을 저주하도록 만듭니다. 두려움으로, 염려로, 걱정으로, 이익 때문에, 손해는 보기 싫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왕따 당하는 것이 싫어서, 손가락질 당할 수 없어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한번 경계를 낮추고 타협했더니 사탄은 낮아진 베드로의 경계를 짓밟고 올라서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고 합니다. 스스로 수치스러워서 도저히 주님 앞에 다시 나설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베드로 앞에 놓은 함정입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편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꼭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배우고 알고 믿는 신앙의 원칙들... 그 경계를 조금만 낮추면 좀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에서 그러하고, 관계에서 그러하고, 재정에서 그러합니다. 말씀이 내게 가르치는 원칙... 어떻게 그대로 지키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조금만 물러서기로, 잠시만 타협하기로, 한 뼘만 경계의 수위를 낮추기로 했습니다. 좀 숨 쉴 수 있을 것 같고, 따뜻하게 모닥불을 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적 타협’을 말씀의 원칙과 공존하는 또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는 적당하게 섞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과연 그래서 더 안전해지고 더 평안해졌을까요? 닭이 웁니다. 비로소 깨닫습니다. “당신... 설마 말씀대로 그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 “어휴... 그렇게 어떻게 살아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내 인생에 말씀의 흔적이 사라지고 십자가의 흔적이 사라지고 믿음의 흔적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조금만 편하고 쉽게 살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과 세상 사이에 경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나를 통해서 예수님은 더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나는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한 사람이 아닌 십자가를 더 무겁게 하고 더 수치스럽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나는 예수의 제자인데 말입니다. 마지막 퀴즈 하나... 성도 여러분! 그 새벽에 울었던 닭은 누구의 편일까요? 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닭이 울거야... 네가 나를 맹세하고 저주하고 부인하고 난 다음 닭이 울거야.. 새벽이 될거야.. 새 날이 밝을 거야.... 베드로야... 바로 그때에는 세상과의 타협의 최면에서 깨어나렴.... 나의 십자가를 다시 기억해주렴... 네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믿는 것은 무엇이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해주렴..” 닭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준비하신 경종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경계의 수준을 0에서 10이라고 하면... 베드로의 신앙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아내가 “뭐 한...8이나 9 정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고난 받는 현장까지 따라갔으니까... 부인했으니까 1이나 2를 빼고...”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베드로보다 높아..? 낮아...?” 아내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습니다. “낮지!” 요한복음 18장에서 사탄은 베드로를 마음껏 조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상처를 더욱 후벼 파고 있고 십자가를 거듭 조롱합니다. 자 봐라... 사람은 너의 희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교회의 반석으로 세운 베드로조차 거듭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하지 않느냐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2015년, 고난의 주간에 사탄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경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하고 뚜렷한 신앙의 경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무너지지 않는, 타협하지 않는, 내 믿음과 삶이 그 안에서 보호되고 나의 가정과 교회가 그 안에서 승리하는 분명한 말씀의 경계가 있습니까? 닭이 웁니다. 베드로는 비참하게 무너진 경계를 안고 수치와 자괴감으로 도망갑니다. 무너진 경계, 부숴진 담장 너머로 사탄의 웃음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고난의 주간, 성경은 우리들에게 닭 울음 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허물어진 담장을 보수하고 연약해진 경계를 다시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를 향한 믿음과 사랑은 지키고 증거해야 능력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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