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예배 - 제자의 증거 | na kim | 2015-04-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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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5. 부활주일 본 문 :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 제 목 : 제자의 증거 여러분 아마 영화 ‘국제 시장’을 많이 보셨을텐데요, 혹시 보지 못하신 분들도 1980년대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이산가족찾기 열풍을 기억하실 겁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노래와 함께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혹시 그 노래 가사를 아십니까?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얌전한 몸매의 빛나는 눈 /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그런데 여러분!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 달덩이....“ 뭐 이래서 사람을 찾겠습니까? 어릴 적 저희 가족이 방송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해서 저희 3형제는 물려받는 흰 반점이 몸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형님과 저는 허벅지에, 작은 형님은 등에 있습니다. 함께 웃으면서 혹시 헤어지면 허벅지를 벗겨서 맞춰보면 되겠네... 하고 농담을 했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이산가족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기억, 이름, 신체의 특징, 헤어질 때 가지고 있는 옷이나 기타 물품들... 이런 것들로 서로의 가족됨을 확인했습니다. 질문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교회와 성도의 믿음의 증거는 과연 무엇일까요?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다고 주장할 때 주님은 과연 어떤 증거와 기준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실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교회 안에 있는 진리를 증거하고, 무엇으로 우리 안에 진리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제가 조금 전에 드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같이 다시 한번 읽읍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자, 이제 대답해봅시다. 우리가 성도되고 교회된 증거,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증거는 무엇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에 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증거를 나타내는 일, 즉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답하기 어려우십니까? 그러면 우리 한번 전후좌우에 있는 성도들에게 “사랑합니다.”하고 인사해봅시다. 자연스럽고 당연합니까? 어색하고 불편합니까? 서로 진심이라고 느껴지십니까? 교회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2. 사랑의 실패 사랑은 참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왜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들어했을까요? 1) “너는 나와 다르다.” 첫째, 그들 모두는 서로 너무 다른 성품과 개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참 불편하지 않습니까? 제가 비브리컬이라는 신학교에서 막 공부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아주 눈에 띄는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한두 살이 적고, 저와 비교되게 키가 너무 작은 분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이나 개인적으로 만날 때나 혹은 그룹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 어찌나 말이 많은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행동은 또 엄청 빨라서 금방 여기 있었는데, 저기로 피해가면 또 저기에 와 있었습니다. 어쨌든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학생들끼리 매주 한번 모여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한 교실에 모여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한번은 그 목사님이 제 옆에 앉았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횡설수설 이야기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고는 혼자서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크게 웃을 때 다른 사람을 때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크게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의 뒷통수를 빡! 하고 때리고 말았습니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아...너무 시끄럽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의 표정에 주목했습니다. 본인도 놀라서 수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 목사님은 “하하하...정말...우습죠...” 뭐 이러더니 성경책을 들고 휙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그 후로 졸업할 때까지 그 목사님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그 목사님 이야기가 나오면... ‘그런 사람이 목회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저희 앞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꽤 훌륭하게 선교팀을 조직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물 한 그릇 선교회’라고 해서 아프리카나 남미 등 오지에 우물을 파주는 일을 하던 선교사님 말입니다. 그 목사님은 사실 공대 출신에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선교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딱 맞게 사용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은 기억에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분의 기억 속에 있는 저의 모습도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큰 키에 자기를 좀 얕잡아보는 것 같아서 늘 기분이 나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앞에서는 괜히 오바해서 말하고 행동했다고 하더군요. 서로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 그분과 다시 함께 지내게 된다면... 그때보다는 좀 나을 것 같습니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좋지 못한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의 입장에서 그 생각은 옳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일에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좀 이해하고 용납하면 괜찮았을 일인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분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싫어했던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각각 이렇게 싫어하고 밀어내는 두 사람인데,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용납하고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서로 이렇게 다르고 그 차이 때문에 서로를 이렇게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각각 다른 열두 명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각각 다른 교회와 성도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 없는 차이는 수만 가지 이유로 공동체를 분열하게 하지만,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차이는 수만 가지 창조성으로 빛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수많은 차이들을 하나님의 창조성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2) 비교하고 경쟁하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을 하고 난 다음에도 그들은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를 논쟁했습니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에 대한 갈망, 더 많은 존경과 인정에 대한 필요,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이 콘트롤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어떤 잘못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교하고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식당에서 오랜만에 다섯 식구가 밥을 먹는데 둘째 성일이가 갑자기 재미있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빠, 이제부터 아빠는 가일이 아빠가 아니라 성일이 아빠야! 가일이 아빠는 많이 했잖아” 갑작스럽게 꺼낸 이야기라서 처음에는 좀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대뜸 승하가 하는 말이, “아니야! 승하 아빠야!”라고 했습니다. 가일이는 애들 참 귀엽게 논다는 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저희 애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게도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자주 다투는 장면이 여과 없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더 많이 사랑받고 싶고 더 많이 인정받고 싶어서 서로를 밀어내며 다투었습니다. 서로 비교했고 경쟁했고 싸웠습니다.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이 그랬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초대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그랬고, 다윗을 바라보는 사울왕의 시선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고 협력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심히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비교하고 질투하고 경쟁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3) 서로의 연약함을 경험하다. 또 하나 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서로가 경험한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뭐하던 사람들입니까? 갈릴리 호수에서 물질을 하던 어부들입니다. 함께 성장하면서 그야말로 서로의 험한 꼴들을 다 봐버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말합니다. 경건과 거룩을 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베드로를 잘 아는데 말이야... 저 녀석은 예전부터 그랬어. 항상 말이 앞서지... 걸핏하면 목숨 걸고 뭐 한다고 하고 말이야... 언제 돌아설지 몰라.” 뭐 이런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믿음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던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둘 때...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연약함에 대해 비난하기 쉽습니다.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가끔 상담을 하는 부부 사이, 같은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 사이에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서로의 약한 점을 너무 잘 압니다. 서로에게 잘못을 반복해왔습니다. 그랬더니 나의 연약함과 잘못은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연약함은 너무 크게 보입니다. 서로 비난하고 싸웁니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하는 말들은 다 사실들입니다. 상대방은 그렇게 약하고 악하고 나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이 진실은 아닙니다. 그만큼 나도 약하고, 그만큼 나도 악하고, 그만큼 나도 잘못을 반복해 왔다는데 숨은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집중하는 관계는 결코 화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3. 사랑의 회복 여러분! 제자들은 과연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서로 너무 다르고, 서로 경쟁하며, 서로의 약함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이기고 사랑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답을 드리자면... “잘 안될 겁니다.”입니다. “실패할 겁니다.” 제자들은 실패합니다. 우리도 실패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증명하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할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은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사랑함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됨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오셨는지요? 저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성공하는 교회와 성도라면...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됨을 증명할 수 있는 성도와 교회라면... 우리의 현실은 이렇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일을 포기할까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벧후 1:3-11에 나오는 성도의 8가지 덕목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참여하는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공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형제 우애, 즉 형제 사랑에는 무엇을 공급해야 할까요? 형제 사랑이란 필로스, 즉 사람이 평등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한계가 뚜렷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더 그렇습니다. 상담을 해보니 더 그렇습니다.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은 사랑하기에 참 힘든 존재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결국 내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다보면 결국 내가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늘 실패합니다. 나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랑의 근거를 사람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의 동력은 바로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로 결단하시고 약속하신 근거한 사랑입니다. 나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사랑에 근거한 나에 대한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사람의 사랑으로 살지 않고 주님이 허락하신 사랑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제 사랑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하라!’고 권면하십니다. 4. 사랑의 희망,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같은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다시 함께 읽읍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지금 예수님께서 어떤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자됨, 교회됨을 증명하는 사랑을 가르치신 것은 제자들 안에 있는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사랑이 실패한다는 것을 주님을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거룩한 뜻을 품어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사람의 모든 사랑에는 연약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요, 부활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사랑이 아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제자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다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나의 사랑을 주노니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오늘 우리는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날에 제자로서의 증거가 있는 삶,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그 삶은 서로 사랑하는 삶, 나의 사랑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삶입니다. Life is Short! 우리의 짧은 인생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랑이 증거가 되어 세상은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만나게 되고, 주님 또한 우리를 제자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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