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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이십니까? na kim 201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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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26.

 

* 본 문 : 마태복음 58절 말씀

*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6.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한국에는 예전에 각 교단별로 전국 어린이 대회라는 것을 했습니다. 각 시찰과 노회 대항전을 거쳐서 전국에서 뽑힌 유년주일학교 어린이들이 함께 모여서 성경퀴즈, 노래, 율동, 성경 암송 등 대회를 하는 겁니다. 한번은 경남지역의 한 노회에 제 여동생이 속한 팀이 성경 퀴즈 대회 결승에 올라간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한 문제를 남기고 두 팀이 동점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문제를 사회자가 읽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이 살던 마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조용했습니다. 3명씩 6명의 어린이들이 눈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객석에서 왜 웃음이 터졌는지 아시겠습니까? 문제를 잘못 낸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을 깃던 여인이 살던 동네는 당연히 수가성이니까요.... 어린이들이 답이 없자 사회자가 다시 문제를 냈습니다. “... 그러면...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어느 성에 살았을까요?” 당시 중학생이던 저는 너무 답답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문제의 함정을 발견할텐데... 제가 동생에게 입모양으로 말을 해줬습니다. ‘................’ 동생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 이은희 어린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답은 뭘까요?” 동생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사회자는 !”하고 외쳤습니다. 결국 다른 팀으로 기회가 넘어갔습니다. 동생팀은 지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왜 동생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 혹시 이런 일들을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경험한 일은 없습니까? 조금만 다른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답이 보이는데 그 작은 하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서 분노하거나 염려하거나 답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신 적은 없습니까?

 

마치 이런 것과도 같습니다. 언젠가 여름에 포코노쪽으로 갈 일이 있어서 가족들과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476번을 차고 가다보면 터널이 나옵니다. 터널을 지나는데 그날따라 터널이 너무 어두웠습니다. 괜히 아는 척을 하면서 아내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니... 말이야... 펜실베니아가 재정이 모자라나봐... 왜 터널에 불을 안켜놓는지 몰라. 사고 나면 어쩌게...” 투덜투덜 대는데 아내가 짧은 한마디를 제게 던졌습니다. 터널에서는 선글라스를 벗으세요.”

 

1. 들리십니까?

 

구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안타깝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 사무엘과 대제사장 엘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기력이 쇠하여진 대제사장 엘리를 돕기 위해서 사무엘은 성막에서 잠을 잡니다.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가야 하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모든 영적 권위는 대제사장인 엘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어린 사무엘에게 들립니다. 누구에게는 들리지 않을까요? 대제사장 엘리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그 중에는 엘리 가문의 멸망에 대한 예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왜 엘리는 듣지 못했을까요? 성경에는 너무 자주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귀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왜 성경은 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할까요?

 

적어도 엘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은 그의 영적인 어두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집에 찾아온 죄를 알고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범죄했고, 그 아들이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더럽혔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엘리의 집을 향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3:13) 그런데 여러분, 엘리 쯤 되면 이런 음성은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가로채고,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며, 제사를 훼손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은 당연히 엘리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이 징계의 말씀을 들려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들려주고 또 선포해도 그가 듣는 귀가 없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귀를 막고 있는 죄와 악의 귀마개를 벗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을 자신만 모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보는 것을 자신만 보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보이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여든 무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는가?”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본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왜 너희들이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볼 수 없는지 아느냐? 너희 눈 앞에 하나님이 이렇게 다가와도 너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를 아니냐? 그것이 이미 너희의 마음이 청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과 자만심으로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과 하나님을 보는 일은 결국 같은 일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에게 일어났던 일이 1000년을 지나서 예수님의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시대,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100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9-11) 안타깝지 않습니까? 참 빛과 생명되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2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웠던 엘리의 시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처럼 어두웠던 예수님의 시대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11절에서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12절에는 소수의 예수님을 보고 영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나고 영접했을까요? 복음서가 소개하는 사람들 가운데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마가복음 522-43절에 소개되는 두 사람을 만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모이던 회당을 관리하던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 없는 한 여인,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당시에 꽤 높은 신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유대인의 회당이란 한 지역사회의 중심입니다. 모든 삶이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유대 사회에 회당장은 그 지역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반응은 무시와 적대감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무시했고, 이후에는 적대감을 표출했습니다. 야이로 또한 처음에는 다른 유대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크게 아픕니다.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마음은 너무 아픈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를 기억합니다. 그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습니다. 벗어야 할 안경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위와 허위의식을 내려놓습니다. 내가 만난 가장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합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5:22-23) 비로소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고 부탁했고 딸의 병을 고쳤더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에 소식이 왔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5:35) 가족들이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필요가 사라졌으니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필요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필요가 사라지면 하나님도 없는 것일까요? ‘필요가 큰 것일까요? ‘하나님이 큰 것일까요?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필요 중심의 신앙생활은 신앙이기는 하되 건강하지 않습니다. 늘 필요의 해결에 목마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필요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합니다. 당연히 모든 필요가 다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쓰러졌을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이 그 집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그를 격려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5:36)에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필요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야이로는 그 말씀에 순종했고, 그는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보는 법,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권위 의식, 전통, 욕심과 욕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필요와 절망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데 장벽이 있었습니다. 여자였기 때문이고,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었고, 몸이 건강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여인은 수없는 멸시와 거절을 당해 왔을 것입니다. 12년동안 지속적으로 정결하지 못하다고,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손가락질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여인이 용기를 냅니다. 소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나사렛에서 시작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손끝만 댈 수 있어도... 내 삶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다가서기 전에 사람들에게 쫓겨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냅니다. 예수님의 옷깃을 만집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움직이고 있는 예수님과 부딪히거나 스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닐텐데.... 왜 예수님은 여인의 이 행동만을 딱 지적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 또한 간절한 필요로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 필요는 예수님을 만나자 바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여인을 주목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 대해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5:34)

 

4.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12년 동안 부정한 병을 앓던 여인... 성경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기록해 놓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성경은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보는 법,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과정을 통해서 신앙의 길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웠을 수 있고, 친구나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되기도 하고, 스스로 강력한 영적 호기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경우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경우 우리는 삶의 깊은 고통과 슬픔, 간절한 필요와 욕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납니다.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오늘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대답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우리들의 삶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우리의 모든 관계에 대해, 우리의 꿈틀거리는 욕망과 빛나는 야망에 대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어둡게, 뿌옇게,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까요? 사무엘이 말하고 야이로가 설명하고 12년을 혈루증 앓던 여인이 웅변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5:8) 우리의 눈을 가리는 편견과 차별,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두려움과 염려, 우리의 귀를 복음에 대해 닫히게 만드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과 상처들....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하나님은 늘 저 멀리 계십니다. 인생이라는 터널을 지나면서 짙은 선글라스를 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품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 성도가 사는 시대와 이웃을 위핸 거룩한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동지가 되고 도구가 되고 통로가 되어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만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 수많은 사람이 전통과 자기 신념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실패합니다. 분노와 욕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실패합니다. 자기 소원과 필요로 하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실패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십니다. 하나님 만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격적으로,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만나주실 것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듣고 싶으십니까? 마음이 청결한 성도가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나는 복된 성도의 삶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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