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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권면의 사람 na kim 201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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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사도행전 436-37

*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7. 위로와 권면의 사람

 

제가 성일이만 했을 때였습니다. 친구 중에서 규동이라는, 꽤 잘 사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당시 해운대에서 새로 개발되던 양옥집이 많은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좋아해서 자주 그 동네로 가서 놀았습니다. 하루는 그 동네 애들 여럿과 규동이와 제가 골목을 누비면서 놀던 중에 보조바퀴가 달린 어린이용 자전거를 한 대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규동이 맞은 편에 사는 집 아이가 타는 자전거였습니다. 지금은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가 흔하지만 그때는 정말 부잣집 아이가 아니면 그런 자전거를 탈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 친구들이 그 자전거를 서로 타보겠다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녀석들이 타서 그런지, 아니면 자전거 보조바퀴가 부실하게 만들어졌던지... 갑자기 한쪽 보조 바퀴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찌그러져 버렸습니다. 자전거를 가지고 놀던 녀석들이 모두가 한걸음 물러서더니 서로 자기가 안했다고, 자기 때문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정도 무게로 휘어졌으면 다시 힘을 줘서 펴면 될 것 같았습니다. 정작 저는 자전거를 타지는 않았지만 용감하게 친구들을 헤치고 나섰습니다. “나와 바라... 이거... 그냥 피면 될 것 같다. 내가 해보께...” 그리고 힘을 줘서 찌그러진 보조바퀴를 폈습니다. 그런데 ~’하고는 바퀴가 아예 부러져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마침 그때... 그 자전거의 주인인 아이가 집에 들어가서 엄마 손을 잡고 나왔습니다. 형들에게 빼앗긴 자전거를 되찾겠다는 것이지요. 쪼그려 앉은 제 한쪽 손에는 부러진 보조 바퀴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은 자전거의 큰 바퀴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제 손에 들려 있는 보조바퀴를 본 꼬마는 엄마 손을 흔들면서 울기 시작했고, 그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그 동네 친구 중에 한 명이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응도는 큰 일 났네요. ** 자전거 부쉈네요.~~ 응도는 큰 일 났네요....”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 엄마가 척척척... 제가 다가오더니 제 손에서 보조바퀴와 자전거를 확~ 채 갔습니다. “... 아줌마... 그게 아니고....”라고 변명을 시도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네 친구들은 아이와 엄마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낮고 분명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의 시선은 규동이에게 향했습니다. 그 동네가 나의 홈 그라운드가 아니라서 딱히 무엇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규동이가 다 보고 알고 있으니까... 내편이 되어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규동이를 봤습니다. 순간 저는 규동이의 입술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규동이의 발걸음이 아주 천천히 제게서 멀어지고... 그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주먹이 꽉 쥐어졌습니다.

 

제가 그 자전거를 물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 다시는 가지 않았습니다. 규동이와도 한동안 절교를 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부잣집 아들이었던 규동이가 가져온 과자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다만... 아무리 다시 친해졌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규동이의 꼼지락 거리는 입술과 조금씩 움직이던 발걸음입니다. 내 편을 들었어야 할 친구인데, 내 옆에 있어야 할 친구인데.... 나를 공격하고 고립시키는 사람들 편에 선 것입니다.

 

1. 친구의 자리

 

시편 55편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합니다.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55:1-6) 그의 삶에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가 견디기 힘이 듭니다. 차라리 사람이 아무도 없는 광야로 가고 싶습니다.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12-15절을 볼까요?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55:12-15) 지금 다윗이 죽을 만큼 깊은 고통을 느끼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원래 미워하던 사람,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 혹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받아들을 수 있습니다. 인정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비난하고 책망하는 사람은 원수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내 친구요, 동료요, 가까운 친척들입니다. 그들이 나를 배신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깊은 골짜기를 생각합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그가 눈물로 노래한 것이 시편 55편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어린 나이에 규동이를 통해서 다윗의 절망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때 그 장면을 그림처럼 띄워보려고 노력해봤습니다. 골목에 자전거와 보조바퀴를 뒤고 쪼그리고 앉은 저, 저를 차갑게 바라보는 아이 엄마... 그리고 아이 엄마 옆에서 나즈막히 노래를 부르는 규동이 동네 친구들... 그런데 그 어떤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희미하게 이미지로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잊혀지지 않는 얼굴, 표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규동이입니다. 그때 내가 내 편에 서주기를 기대했던 유일한 한 사람, 그런데 다른 편에 섰던 사람, 대단히 나를 공격하거나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한동안 잊기 힘들었습니다.

 

2. 허물, 두 얼굴로 만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윗의 친구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랬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다윗에게는 정말 아무런 허물이 없었을까요? 다윗은 늘 정의롭고 옳기만 했을까요? 항상 신앙과 말씀 위에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연약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충성된 신하들이 많았지만 또한 그들 중에는 다윗이 연약했던 순간들을 잊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분명하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다윗에게 창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압살롬이 그랬고, 제사장 아히도벨이 그랬습니다. 심지어 대장군 요압도 다윗에게 늘 어려움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의 역사는 연약함을 노출한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분명하고 충분한 이유로 다윗의 잘못을 드러내고 비난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멸망했습니다. 성경은 왜 연약함이 드러났던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의 멸망을 보여줄까요?

 

잠언 17:9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17:9) 성경이 왜 허물 많았던 다윗의 편에서 기록되었는가? 그것은 잠언 17:9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기 원하시는 공동체는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고 세워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비난했던 미리암과 아론이 벌을 받는 것이고, 다윗을 비난했던 사람들이 멸망해가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가 되어 신앙생활을 가까이에서 하다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쉽게 연약함을 노출시킵니다. 때로 어떤 사람의 연약함은 꽤 결정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기도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잠언 17:9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랑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허물과 부족과 연약함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한 맹인을 만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질병이나 핸디캡은 죄의 결과로서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자신의 죄로 이렇게 된 걸까요? 그 부모의 죄 때문일까요?” 이 질문을 신학적으로, 혹은 인권의 입장에서 접근해도 일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아주 단순하게 한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허물에 대한 두 종류의 시선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실까요? 앞을 볼 수 없도록 태어난 이 맹인의 삶의 아픔과 연약함에 대한 그 시대의 보편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맹인에게 들리도록,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때문이 아니다. 그의 삶도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 그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3.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

 

초대교회 공동체는 아직 교회의 조직이 완비되지 않은 채 많은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혼재하고 있었고, 신앙적인 혼란함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입장과 의견이 중요했고, 무엇인가 차이를 발견하면 심각한 비난과 분열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서신서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당시 교회 안에 존재했던 수많은 갈등들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들이 계속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르치고 권면해도 안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입장만 더 강화되고 분열의 골만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때 누군가 나서서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사람들의 아픔과 연약함을 위로하며, 모든 사람들의 편에서 이해하고 위로하며 권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굳이 사도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는 굳이 모든 사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가르치고 지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섬기는 사람이며, 사람들의 편에 서서 함께 서 있는 사람이며, 상처와 고통 앞에 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며, 먼저 찾아가서 손 내미는 사람이며, 정죄와 판단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사람이며, 허물을 사랑으로 덮는 사람이며, 수많은 말들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허공을 떠돌아다닐 때 자기 안에 그 모든 날선 말들을 품고 위로와 권면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교회의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입니다. 영어 성경은 그의 이름을 ‘encouragement’라고 번역합니다. 격려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초대교회에서 지도자가 되기 전에 이미 어떤 역할을 삶으로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성경은 그의 헌신을 잊지 않습니다. 그는 말로, 관계로 수고하고 헌신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모든 성도들에게 외면당하고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있는 바울을 발견합니다.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스데반 죽인 일을 사과하고 그의 몫까지 사역하고 싶은데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바나바가 나섭니다. 바울의 회심에 대해 보증이 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9:26-27)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핍박을 받아서 고향 다소로 돌아갑니다. 그 사이 이방 지역인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졌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경 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합니다. 선택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고향 다소에 있던 바울을 잊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4-26) 성경이 바나바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착한 사람입니다. 그의 성품에 대해 먼저 소개합니다. ‘성령과 믿음은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로 그의 성품과 믿음의 결과를 소개합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더라마지막으로 이러한 기록들을 증명하는 삶을 소개합니다. 바울을 찾아와서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를 소개하되 그의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으로서의 성품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 믿음이 좋은 사람은 많았을 것입니다. 서로 더 좋다고 자랑하다가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나바와 같은 사람은 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착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혼자 떨어져 있는 바울을 찾아가서 불러내어서 함께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 그들의 연약함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가 역사하도록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조카 마가가 1차 선교 여행에서 빠지는 바람에 2차 선교 여행에서 사도 바울과의 갈등이 있을 때에도 그는 조카 마가를 믿고 선택합니다. 결국 마가는 나중에 바울을 도와서 선교 사역을 계속하게 되는데, 이 때 마가의 연약함을 책망하지 않고 다시 한번 믿고 손을 잡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4. 그 사람의 자리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에는 참 많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구제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사들이 있었고,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각자 맡은 역할과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중에 꼭 필요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연약함을 보고 비난하고 책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약이 되어서 치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직분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입니다. 모든 사역에 동참하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한 사람, 위로하고 권면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돕는 사람 -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초대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바나바와 그의 삶의 자리, 믿음의 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모든 교회에는 바나바의 역할과 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2000년이 지나 오늘 우리 초대교회에서 바나바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할 성도는 누구입니까? 고난의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성도들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함께 아파하며 함께 손을 잡고 고난의 과정을 걸어갈 성도는 누구입니까? 비난하고 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위로하며 격려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으로 성도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겠습니까? 바로 그 일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며, 바로 그 사역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음성에 응답하여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세우며 서로에 대해 사랑으로 섬기는 초대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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