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 na kim | 2015-08-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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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9. * 본 문 : 마가복음 9장 33-50절 말씀 *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7.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달라졌어요’라는 한국 EBS의 상담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내용이 유익하고 실제적이어서 자주 보는 편입니다. 구체적인 상담 사례들이 일정한 상담의 기간을 통해서 변화와 성장의 과정과 함께 방송됩니다. 그 중에 한 사례를 소개할까 합니다. 30대 초반의 부부가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다소 세심하고 신중한 성품이고, 아내는 적극적이고 표현이 많은 성품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다양한 표현과 적극적인 태도가 좋았고, 아내는 남편의 주도면밀함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혼 6년이 지난 현재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에서 남편은 작은 딸을, 아내는 큰 아들을 품고 삽니다. 서로의 경계가 분명해서 영역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성격이 맞지 않아서 도저히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가정생활과 자녀들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실수가 많고 거칩니다. 아내는 남편의 잔소리가 싫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꼭꼭 집어내고 지적하는 남편이 답답합니다. 남편은 날카롭게 짜증을 내고 침묵하며, 아내는 거친 말로 공격하고 화를 풀지 않습니다.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면서 가정은 늘 팽팽한 침묵과 긴장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많은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서로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부분을 발견하고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심은 매력으로, 사랑으로 발전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후에 두 사람은 중요한 기로에 섭니다. “다르기 때문에 더 행복하게 살 것인가?” “다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 것인가?” 두 사람이 서로의 차이에 대해 어떤 이해와 협력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정합니다. 두 사람이 상담자 앞에 앉았습니다. 남편은 신중형이며 완벽주의자입니다. 고통이 내면화되는 사람입니다. 실수와 잘못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내는 사교형입니다. ‘재미’과 ‘인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남편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아내는 너무 답답했습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오래 고민하느냐고, 남자가 왜 그렇게 못났냐고 퍼부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사소한 생활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칠 것을 요구하면 아내는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남편의 세심한 성품을 공격했습니다. 남편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아파하고, 아내는 금방 화를 내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결혼 6년 동안 반복된 이러한 일상은 6년이 지난 지금 대화의 단절과 관계의 균열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성품에 대한 상담자의 설명을 듣던 아내가 갑자기 기억이 난다는 듯 말합니다. “전에 남편이 가슴을 잡으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내 마음에는 유리조각이 있어...” 저는 그때 남편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뭐라는 거야... 유리 조각이 왜 마음에 있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요.” 이 부분만 짧게 영상을 보겠습니다.(영상 1) 아내는 비로소 자신이 남편의 마음에 박아놓은 유리조각들이 보입니다. 그 유리조각들은 여전히 남편의 심장에 피를 흐르게 하고 있고, 그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과 자녀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런 남편과 부등켜안을 때마다 그 유리조각이 자신에게도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실은 남편의 마음에만 유리조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칠고 부정적인 말로 남편의 마음에 유리조각을 박아 넣은 것은 아내이지만 아내의 마음에도 남편으로 말미암은 보이지 않는 차가운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습니다. 남편의 완벽을 추구하는 성품은 늘 즐거워야 하고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하는 아내에게 숨 막히는 고통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가슴에 유리조각을 박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고 입히며 살고 있었습니다. 1. 유리조각 해변, 유리조각 가슴 2년 전에 본 이 영상을 떠올린 것은 지난 주 목장 성경 공부 교제를 만들면서였습니다. 얼마 전에 facebook을 통해서 아주 인상적인 사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 Fort Bragg이라는 해변의 사진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이 해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린 유리제품과 가전제품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위험한 해변이라 판정되어 1967년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해변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버려진 가전 제품을 수거하고 물도 깨끗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해변 가득하게 깔려 있는 유리조각들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버릴 때는 깨진 유리병이었지만 이제는 날카롭게 부숴져서 서로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유리조각들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해변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사진부터 보실까요? 3장을 차례로 보여주십시오.(유리바다 사진 1,2,3) 유리와 유리가 파도에 의해 서로 부딪히고 갈려서 날카로운 모든 부분이 사라지고 유리구슬로 변했습니다. 변함없고 지치지 않았던 파도는 유리끼리 서로 갈리고 부숴지게 했습니다. 날카로운 모든 부분이 파도를 따라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변했습니다. 사람의 발을 디딜 수 없었던 해변이 유리구슬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변했고, 2003년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이 해변을 사들여 MacKerricher State Park에 포함시켰습니다. 쓰레기로 버려졌던 유리조각들은 반짝이는 유리구슬이 되어 주 정부의 재산으로 등록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 없고,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자유로운 사람 없습니다. 누구나 가슴 한 부분이 문드러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진실입니다. 누구나 가슴을 열면 촘촘하게 박혀 있는 유리 조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가슴에 박힌 유리조각을 더 날카롭게 벼리고 서로를 향해 공격하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서로 부딪히고 갈려서 아름다운 유리구슬로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 것입니까? 각각 다른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더 창조적이고 더 형형색색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로 성장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월의 파도로 날마다 어루만져주시는 이유입니다. 2. 제자들의 다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 제자들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실은 토론이 아니라 다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답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앉히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을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들었습니까? 예, 들었습니다. 이해했을까요? 이해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동의했을까요? yes... or... no... 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듣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만 동의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혹은 듣고 이해했고 동의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삶으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모두가 마음으로부터의 동의에서 삶으로서의 순종까지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들의 신앙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동의하고, 삶으로 순종하는 단계 중에서 나는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까? 성경은 제자들이 지금 한번만 다투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 늘 다투었습니다. 서로 자신의 공을 내세우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논쟁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배경이 달랐고, 성품이 달랐고, 욕심도 달랐고, 소원도 달랐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로 모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려 하십니다. 교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일이 이들의 협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섞으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제자들의 다툼이 한편으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의 다툼의 주제가 주로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였다고 말합니다. 기본 전제가 ‘천국에서...’입니다. 이들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당연히 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너무 당연한 주제입니다. 자신들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다른 제자들의 믿음 또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것과 상관없이 내가 더 큰 제자, 높은 자리에 앉고 싶습니다. 다투고 논쟁합니다. 그들은 천국에 대한 확신으로 비천국(非天國)에 대한 욕심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천국에서의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믿음이 있고, 천국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천국으로 살아가는 삶이 없습니다. 천국 아닌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천국의 삶의 회복을 명령하십니다. 3. 또 하나의 다툼 그런데 그 다음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이렇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8-40) 당시에 예수님의 12제자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말씀을 듣고 스스로 제자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니까 이상한 겁니다. 우리들이 아닌 그 누군가가 스승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다고 말합니까? 예, 못하게 했습니다. 막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특권의식, 혹은 우월의식.... 나아가서 질투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사소한 차이나 특권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믿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한번 천국을 말하면서 비천국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천국을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2-47)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빠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리를 좀 해봅시다. 여기 두 가지 다툼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다툼입니다. 누가 큰 자인가? 라는 논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서로 낮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또 다른 다툼이 있었습니다. 12제자들과 이름 없는 제자들 간의 다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데 배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툼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너희들 제발 좀 그러지 마! 왜 내 제자라고 하면서 서로에게,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제자답지 않게 행동을 하니!”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의 영적인 의미를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42-47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42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정하십니다. 누굴까요? 제자들일까요? 물론 제자들도 해당됩니다.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 문맥을 통해 보자면 함께 믿음을 가지고, 함께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작은 소자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 그들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경쟁하지 않는 천국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실족하는 ‘작은 소자 한 사람’이 그들 중 누구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실족하게 하는 사람’ 또한 그들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는, 실족함과 실족하게 함이 발생하는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성도의 목에는 연자맷돌(연자맷돌 사진 1,2)이 걸려 있습니다. 천국이 아닌 지옥이 경험됩니다. 생명이 아닌 죽음이 경험됩니다. 천국을 말하면서 비천국을 행동하는 사람, 복음을 말하면서 비복음으로 행하는 사람, 제자이면서 비제자의 삶을 선택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자르고 풀고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닌, 복음이 아닌, 천국이 아닌, 제자답지 못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복음과 믿음과 천국을 소유한 제자요 성도요 교회로서의 삶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시는 말씀이 바로 50절의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찾아보면 대부분 난해구절이라고 먼저 겁을 줍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문맥을 통해서 보면 우리는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함께 크게 소리 내어 읽어 봅시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소금이라고 하면 ‘빛과 소금’에 너무 집착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까요? 오늘 본문의 전체 문맥에 근거해서 본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의 제자들아, 내게 너희들에게 준 제자라는 직분은 참 좋은 것이란다. 그런데 만일 제자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면 어떻게 제자일 수 있겠니? 이제 다투지 말고, 서로 경쟁하지 말고 협력하자. 세상적인 가치와 생각을 따라 다투지 말고, 너희 안에 십자가를 두고, 복음을 두고, 사랑을 두고,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기억하고 하나가 되자. 서로 화목하자. 서로 힘을 합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함께 헌신하자!”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성도’(聖徒)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성도로 불러주셨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참.... 어렵습니다. 성도로서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가슴에 박힌 유리조각으로 고통당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다시 성도라 부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도야, 교회야.... 내가 너희에게 준 이름은 참 좋은 것이란다. 너희가 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었단다. 그런데 너희가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로 살아가면 어떻게 성도이고 교회이겠니? 이제 너희 안에 십자가를 두고, 말씀을 두고, 복음을 두고 서로 화목하자. 서로 마음과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자.”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교회라는 것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가득 찬 캘리포니아 해변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처 많고 눈물 많은 인생들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가슴에 촘촘히 박힌 아픈 유리 조각같은 기억들을 쉽게 잘 내려놓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 유리조각들은 자신이 얼마나 날카롭게 깨어져 있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 가슴에 박힌 유리조각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조각이 다른 가슴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모여서 서로 가슴을 부딪히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가해자로 만들고 서로에게 피해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서로 피를 흘리며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너희가 나의 백성, 나의 제자, 나의 성도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가치를 지키면서 서로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됨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답게, 제자답게, 교회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유리가 박힌 가슴과 가슴 사이에 십자가를 두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조각난 유리들이 갈리고 또 갈려서 아름다운 유리구슬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좀 뜨겁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시원한 제 고향 바다를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태어났던 거제도에는 이런 해변이 있습니다.(학동 사진 1,2,3) ‘학동’이라는 곳인데요, 모습이 이렇습니다. 몽돌 해수욕장이라고도 합니다. 이곳 해수욕장에서 이 돌들을 주워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자그락 자그락 소리를 냅니다. 돌들이 파도에 닳고 또 닳아서 동글동글합니다. 여기는 바위와 모래 대신 몽돌이라 불리는 검고 작고 둥근 돌들로 해변이 이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해변과도 같습니다. 캘리포이아 유리구슬해변, 혹은 거제도 몽돌해변... 교회는 그렇습니다. 원래 나의 모습이 사라져야 교회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나를 계속 만지셔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훈련해야 교회입니다. 끊임없이 파도와 바람으로 나를 변화시켜야 교회입니다. 그리고 점점 부드러워져야 성도입니다. 날카롭고 모났던 나의 영성과 인격과 성품이 어린 아기의 연약한 피부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성도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날카로운 유리조각인줄 알았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유리보석이 되었네?” 이런 칭찬을 얻어야 성도요 교회입니다. 우리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의 조각난 삶에 십자가를 두고, 성령 하나님의 어루만짐 속에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져가는 성도와 가정과 교회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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