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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서다 na kim 201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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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마태복음 2531-46절 말씀

*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8. 하나님 앞에 서다.

 

영화 암살’(사진1)을 봤습니다. 친절하게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의 필라델피아까지 찾아와준 영화이기도 하고, 최근 재미있는 영화들을 계속 만들고 있는 최동훈 감독의 영화이기도 해서 얼른 보고 말았습니다. 재미있었고,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한 장면에서 가슴이 탁 막혀버렸습니다. 좋은 장면과 대사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그 장면에서는 동의할 수 없었고, 그 대사를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시간을 지나가는 오늘은 이 영화로부터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세 사람은 모두 독립 운동과 일정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염석진(이정재/사진2)은 한 때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가 체포당해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밀정이 됩니다. 밀정 생활이 탄로 나자 일제의 경찰이 되어 정보를 팔고 독립군들을 체포하는 일을 합니다.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자 대한민국의 경찰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안윤옥(전지현/사진2)은 비록 친일파의 딸로 태어났지만 무장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여성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친일파 처단의 임무를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사진2)은 독특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일합방에 서명했던 대한제국의 각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친일파 각료들의 아들들과 함께 모여 친구들의 아버지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서로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처절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불의한 일을 자행한 사람일지라도 아버지들을 죽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잡혀서 투옥당하거나 극 중 하와이 피스톨처럼 염세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한 때 자신의 양심에 찾아온 가치를 따라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가슴에 찾아온 절대적인 가치는 독립이었습니다. 그에 반대되는 가치는 당연히 친일이며 매국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 때 생명을 걸고 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청춘을 조국의 독립이라는 가치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 염석진은 결국 그 총을 민족을 향해 겨누었습니다. 원수에게 처절하게 패배하고 보니 원수보다 더 악한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가치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반역사적 가치를 선택하여 안락한 삶을 누렸습니다. 반면 안윤옥은 가치에 끝까지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친일 매국의 삶을 선택했던 아버지 앞에서도 당당했고, 해방 이후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에도 당당했습니다. 가치에 헌신하는 삶의 아름다움과 척박함을 함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마지막 주인공인 하와이 피스톨은 한때 가치를 선택했지만 그 가치대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랬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제국의 힘 앞에 그들은 패배하고 절망하고 증오했습니다. 가치가 무너진 삶을 살았습니다.

 

1. 몰라서였을까?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듣고 공부하고 생각하면 누구나 바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양심에 찾아온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치에 헌신하는 삶이란 늘 위험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 가치를 위해 물질을, 관계를, 생명까지 헌신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는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저의 마음을 답답하게 막았던 대사가 있습니다. 해방 후 한국 경찰의 간부가 되어 살던 염석진을 반민족특별 위원회에서 기소하여 재판정에 세웁니다. 그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으며 자신은 오히려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고 강변합니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증인이 살해당하고 그는 무죄가 되어 풀려납니다. 서울의 거리를 자랑스럽게 활보하는 염석진, 그에게 두 사람이 찾아옵니다. 한 사람은 염석진이 배반했던 동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안윤옥이었습니다. 그들은 16년 전,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김 구 선생이 내렸던 명령을 실행합니다. 염석진이 일본의 밀정이면 죽이라고 했던 명령입니다.

 

안윤옥이 그에게 묻습니다. “왜 동지들과 민족을 배반했는가?” 염석진은 자비를 구하면서 대답합니다. 몰랐으니까.... 해방이 될지 몰랐으니까...! 해방이 될지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나...” 가장 현실적인 대답이면서 정말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수많은 친일부역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양심에 찾아온 가치는 독립이지만, 그 가치가 실현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치에 반대되는 삶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해방이 될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양심에 찾아온 가치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치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확신, 비록 그 가치가 내 삶에 성취되고 나에게 영광을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가치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가치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천박한 양심이 그로 하여금 민족과 동지를 배반하게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해방되지 않은 삶을 살았고, 민족의 해방을 가로막는 일을 했으며, 해방 된 뒤에도 조국의 미래를 여전히 친일의 사슬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한 양심을 가르치고 양심에 찾아온 가치를 따라 사는 삶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삶의 요령이 아닌 참된 가치를 선택하고 헌신하는 삶의 소중함을 알게 해야겠습니다. 영화 한 편 보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역사는 늘 아픕니다.

 

2.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

 

마태복음 25장은 좀 어두운 내용입니다. 24장부터 예수님은 종말에 관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갈다가... 혹은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주시면서 택함을 받는 이유와 버려짐을 당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택함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4:4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24:44)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버려둠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24:48)입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기다리기가 싫습니다. 내 기다림이 헛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24:49)이라고 했습니다. 왜 버림을 당합니까?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25장에는 몇 가지 마지막에 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결혼식의 들러리를 서는 열명의 처녀에 대한 비유입니다. 다섯 처녀는 준비와 기다림에 성공합니다. 다섯 처녀는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일에 실패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각각 다른 달란트를 받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기다리는 일에 실패합니다. 역시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인내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양과 염소의 비유는 좀 더 심각합니다.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으로 오른편에, 어떤 사람은 염소로 왼편에 분류됩니다. 오른 편에 선 자들은 세상에 살 때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왼편에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만난 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들은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 말합니다. 변명하고 항의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 너희들을 만난 적이 있다. 너희들은 영원한 벌에, 의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3. 어두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26장으로 넘어가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6:1-2)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주신 말씀들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주인과 종이 있고, 떠나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주인의 뜻과 명령을 따라 살기도 하고 자신의 뜻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양과 염소입니다.

 

, 지금부터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전에 제자들은 분명히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가치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이 아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수많은 이적과 말씀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구나... 그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가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을 떠나는 일에 대해 말씀합니다. 보이고 경험하고 감각할 수 있는 가치에서 그들의 마음과 심령 가운데 역사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고, 너희들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는 눈에 분명히 보이는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따라, 주님이 그들의 심령에 허락하신 약속을 따라, 그들의 양심과 신앙으로 받은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셨고, 그들의 삶을 걸고 양심을 걸어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교회가 살아야 할 가치에 헌신하는 삶입니다.

 

4. 믿는 만큼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책망을 듣는 모든 사람이 변명합니다. 잘 몰랐습니다. 하필이면 그 때 돌아오실 게 뭡니까? 이정도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주인님도 제 입장이라면 아마 이해하실 겁니다. 다 주인님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알고 보면 주님님에게 유익이 되는 겁니다. 정말... 정말... 주인님이 이렇게 돌아올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변명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과연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주인이, 왕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일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켜야 할 가치와 약속을 알려줬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왕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속과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삶의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삶에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만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시작에서 소개한 영화는 사실 참 영리합니다. 그 대사, 설마 해방이 될지 몰랐기 때문에 친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그 영화에서 처음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춘원 이광수가 했던 말입니다. 춘원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일제 시대 대표적인 조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항일 운동에 동참했지만 일본의 대동아 공영주의와 식민문화통치에 설득 당했고, 결국 20년 가까이 친일부역을 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 특별 위원회에서 심문을 받던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 부역을 반성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마 정말 해방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는 정말 해방이 될지 몰라서 친일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해방이 될지 몰라서가 아니라 언제 될지 모르는 해방을 위해 고난의 긴 세월을 자신의 양심과 삶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려워서입니다. 결국 그는 해방 될지 모르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해방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인터넷 갈릴리 마을에 올렸더니 한 선교사님이 이런 답 글을 주셨습니다. 목사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다'라는 변명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 늦게 선교지에 와 보니 '이런 줄 몰랐다'는 생각이 너무 자주 듭니다. 한국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선교지에서는 일상이니... 언젠가 누군가 선교사들에게도 묻겠지요.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선교사들도 아마도 똑같이 대답하겠지요."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물론 모든 선교지가 그런 것 아니고, 모든 신앙이 다 그런 것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좀 진지해져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지금 우리가 믿는 만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우리의 믿음과 삶을 놓고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것이기 때문에... 설마 이런 시간이 정말 올지 몰랐다는 변명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세상의 모든 보석과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치를 심어주셨습니다. 그 보석의 이름은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가치대로 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대로 살기가, 갈고 닦기가 참 힘든 모양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소망하기는, 그렇게 살면 안되는지 몰랐다.... 이런 시간이 올지 몰랐다.... 설마... 정말 하나님 앞에 서게 될지는 몰랐다는 눈물 어린 변명들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허락하신 가치를 지키고 갈고 닦기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며 한평생 살아왔노라고, 믿음과 말씀으로 헌신했노라고.... 우리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성도와 교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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