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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복 na kim 201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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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시편 651-4

*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9. 다윗의 복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개념들 중에서는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각 문화권에서 그 단어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온 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라면 어떤 것을 말합니까?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복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정의에 동의하십니까?

 

유교에서 말하는 복()이 있습니다.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1편인 <홍범(洪範)>에는 다섯 가지 복, 즉 오복(五福)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 즉 장수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 즉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강령(康寧), 즉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넷째는 유호덕(攸好德), 즉 도덕적으로 살기를 좋아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주장했던 오복은 조금 다릅니다. 첫째, 치아가 좋은 것. 둘째, 자손이 많은 것. 셋째, 부부가 해로하는 것. 넷째,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다섯째, 명당에 묻히는 것 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와 교회가 추구하는 복은 어떤 복입니까? 우리도 5복을 놓고 기도하면 되는 것일까요? 오늘은 시편 65편의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 교회와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참 좋은 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한국교회와 기복신앙(祈福信仰)

 

한국 교회의 특징을 설명할 때 기복신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니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에 대해서만은 대단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웃으면 복이 와요.” “밥 먹다가 다리를 떨면 복이 나간다.” “빈 숟가락 빨지 마라, 복 나간다.” “아침에 이불을 털면 복이 털려 나간다.” 이런 말들도 있었습니다. 애들 이름을 지어도 복순이, 복돌이로 지었고, 정월 대보름에는 복을 담는 복조리도 있었습니다. 베개와 이불, 심지어 장롱과 그릇에까지 곳곳에 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한국 교회에도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소위 마술 공식(magic formula)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것만 대입하면 해결된다는 공식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 성장의 마술 공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논리가 바로 삼박자 구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순복음 교회를 일으킨 조 모 목사님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를 잘 믿으면 ‘1) 영혼이 잘되고 2) 사업이 잘되고 3) 육체가 건강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왜 잘못 해석되었는지 간단하게만 설명을 드리면, 첫째 이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 말씀이 아닙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 강건하기를로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맞습니다. 둘째, ‘잘되고...’라는 말을 사업의 번영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 번째, 문맥을 잘못 보았습니다. 요한3서는 가이오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 1:1-2) 이 구절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까? 아니면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와 기도입니까? , 이것은 인사와 기도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교리적인 문구가 아니라 요한이 제자인 가이오를 기뻐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2. 왜 그랬을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한국 교회가 복에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문화 역사적인 요인입니다. 한국의 전통 종교는 실은 불교도, 유교도 아닌 무속신앙입니다. 불교가 한국에 전래되어도 무속과 결합했고, 유교가 전해져도 무속과 결합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또한 무속 신앙의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무속이란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한 치료적인 기능과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이것을 자꾸 따라합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어느 나라와 문화 속에서도 발견되는 성공과 성취의 욕구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국에서는 번영신학으로 꽃피었고, 한국에서는 기복신앙이 되었습니다. 한 때 미국의 번영신학을 주도했던 로버트 슐러와 같은 목회자는 미국의 대표적인 메가쳐치였던 수정교회를 목회하면서 "교회를 기업으로, 전도와 선교를 판매로,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 ‘성공적인 삶입니다.

 

마지막 요인은 좀 슬픕니다. 복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을 들고 세상적인 복이 대한 개념을 가르쳤고, 나님을 이야기하면서 무속신앙적인 복을 기도했습니다. 1970-80년대 한국 산업사회의 성장과 한국 교회의 성장은 그래서 서로 맞물려 있고,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개인의 성공신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교회 또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다윗이 소망하던 복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선조들이 소망했고,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실까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64:4)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이 사모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시면 그것은 주님의 택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뜰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복, 다윗의 행복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의문이 생깁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64:3)라고 했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긴 것은 이미 과거형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하실 것이라는 것은 확신이면서 미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시인의 현재는 어떤 상태일까요? 죄와 악의 시험 가운데 있고, 연약함 중에 있고,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죄악이 나를 이긴 상태, 복된 삶입니까? 아니면 복과 관련이 없는 삶입니까? 적어도 죄악이 나를 이겼으면 나는 복과는 좀 멀어져 있는 상황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윗은 곧 4절에서 복을 노래합니다. 왜 다윗은 죄악에 패배한 자신의 영적 상황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복되며 만족하다고 노래했을까요?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 시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38:4에서는 내 죄악이 내 머리 속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했고, 40:12에서는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했으며, 시편 5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하게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1-3) 다시 묻습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 들끓는 죄의 유혹과 시험을 당당히 이겼을까요? 처절하게 패배했을까요? , 처절한 패배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성경일까요?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의 자랑이자 하나님이 자랑인 다윗의 처절한 패배의 기록을 성경으로 남기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다윗이 소망했던 복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4. ‘, 명예, 권력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지난 14, 15일에 한국 기독교의 석학으로 알려진 손봉호 교수가 뉴저지에 있는 한 교회에서 기독교 윤리에 대한 특강을 했습니다. 그는 강의에서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 명예, 권력에 초점이 맞춰진 신앙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 자녀들에 대한 소원, 삶의 성공에 대한 기준들이 모두 여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든 얻으면 성공한 삶이요, 이것에 허덕이면 실패한 삶으로 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결국 대부분 두 가지 방식으로 , 명예, 권력에 패배하고 맙니다.

 

첫째는 우리가 욕망하되 소유할 수 없을 때입니다. , 명예, 권력을 위해 내 시간과 관계와 신앙까지 사용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망을 우리는 과정이자 수단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는 일에 패배합니다. 평생 그것을 소유해보지 못하고.... 다만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손톱이 닳고 지문이 없어지도록 열심히 일했는데...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한 것이었고.... 세상에는 그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리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실패했습니다.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하나님 아닌 맘몬, 즉 물신이 나를 철저하게 이겼습니다.

 

또 하나의 패배는 성취된 욕망으로부터 옵니다. 다윗은 돈과 명예와 권력의 전쟁에서 승리했을까요? 실패했을까요? ,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그것을 가지는 일에 엄청난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죄악에 패배했다고 고백할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지만, 그는 그것으로 죄와 악에 패배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를 죽이게 되고, 그 신하의 아내를 취하게 되고, 여러 명의 자녀를 잃게 되고, 가장 사랑했던 아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되고, 헛된 명예욕으로 7만이나 되는 그의 백성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시편 65편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은 죄와 악에 대한 사람의 연약함입니다. 그는 날마다 그 죄와 악에 대해 패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우리 또한 다윗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외치지만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해 삽니다. 심지어 나는 내 가장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조차 행복하게 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고, 날마다 죄가 나를 이기는 삶 - 참 처절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65:4의 다윗의 고백을 다시 봅시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만족하리이다”(65:4) 이 문장에서 주어가 누구로 표현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을 택했고,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질서를 따랐습니다. 나는 죄와 악에 대해 패배하는 삶을 사는 연약하고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택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가까이 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하십니다. 내가 행복한 까닭은, 내 인생이 복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품에서 참으로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다윗이 깨달은 복이 무엇인지아십니까?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로 이 짧은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의 아름다움 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왕이어서가 아니라, 권력가 명예와 재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복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다윗보다 연약하고 다윗보다 세속적인 우리들은 과연 무엇에 우리의 만족과 행복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를 그 품에 안으시기 위해 아들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게 하셨고,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셨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하나님의 품에 두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되어지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 가장 큰 은혜입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 살고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우리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살게 하셔서 참 감사합니다.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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