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 : 시편 103편 8-14절 말씀
* 제 목 : 기억과 함께 울다.(1)
얼마 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가정들을 찾아서 가족들의 사연과 더불어 음식을 배달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정준하라는 연예인이 아프리카 가봉의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는 박상철씨를 찾아갑니다. 그의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준비해 준 음식들을 펼칩니다. 어려서부터 즐겨먹던 어머니의 만둣국과 각종 반찬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50대 중년 남성이 눈물을 흘립니다.(영상1) 그는 왜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을까요? 음식을 배달했던 정준하씨는 왜 울었을까요? 저도 눈물 찡~ 했습니다. 왜요? 아마도 모두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의 손에서 펼쳐지던 마술과도 같았던 음식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7-8년 전에 개봉했던 ‘식객’이라는 영화에는 재미있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한 폭력배가 자신이 한 때 먹었던 음식을 잊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 음식을 다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돈을 쓰고 폭력을 써도 안됩니다. 그 음식은 바로 군 복무시절 눈물을 흘리면서 먹었던 ‘라면’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군대시절 상관을 만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맛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친 그의 상관은 그에게 삼양라면 한 봉지와 더불어 '라면 맛있게 먹는 법'을 편지로 남깁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사진1)
대부분 우리가 기억하는 ‘다시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들’은 이렇게 우리들의 오랜 기억들과 함께 있습니다. 비싸지 않아도 좋고, 이국적이지 않아도 좋고, 사실 대단히 맛있지 않아도 좋습니다. 기억은.... 지금 내가 먹는 음식의 맛을 풍성하고 깊게 하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 있게 하는가 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한편, 기억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만 있는 것 아니고, 우리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만 살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날카로운 범죄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선명하게 각인된 상처로 말미암아 평생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기도 하고, 불같은 분노와 함께 새겨진 아픈 기억들로 복수의 칼날을 갈기도 합니다. 어둡고 아픈 기억은 우리를 과거의 노예로 만듭니다.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과거에 내가 받은 고통의 기억으로 하루하루를 원망하며 살기도 합니다. 내게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들조차도 이전에 주고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으로 서로를 적대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억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축복이면서, 사람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몇 주간 우리들의 ‘기억’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내가 왜 그랬을까...?”
저는 가끔 아주 어두운 꿈을 꿉니다. 그 중 하나, 땅거미가 지는 넓은 운동장을 혼자 달립니다. 운동장 끝에 있는 건물에 들어섭니다. 복도를 헤매며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계단을 오릅니다. 달려도 복도는 계속되고, 올라도 계단은 또 나옵니다. 처음 그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왜 이런 꿈을 꾸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학교가 어딘지, 왜 내가 그곳을 헤매고 다니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가끔 반복해서 꾸면서.... 지금은 꽤 많은 것이 기억납니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제가 4학년, 작은 형이 6학년이었습니다. 작은 형과 저, 그리고 두 명의 친구가 해운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학년 혹은 중학생 쯤 보이는 3-4명의 좀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이 자꾸 축구를 방해했습니다. 공을 뺏어가기도 하고, 멀리 차 버리기도 했습니다. 참지 못한 작은 형이 한 아이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순식간에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형보다 덩치가 큰 여러 명이 오더니 작은 형을 집단으로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어... 어떻게 하지....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정말 짧은 순간.... 너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방과 후였고, 운동장에는 누구 말릴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학교 건물로 뛰어갔습니다. 누군가 어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장과 건물이 그렇게 멀 수가 없었습니다. 계단을 뛰어올라갔습니다. 각 층마다 최대한 빨리 달려봤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건물 안을 달리다가 한분을 만났습니다. 마침 작은 형의 담임선생님이 숙직이셨습니다. “서..선생님... 저 응진이 형 동생인데요... 응진이 형이요... 깡패들에게요....”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던 선생님 소매를 끌고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찾아보니 저기 운동장 구석에 있는 수돗가에 작은 형이 씻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이 맞은 것 같았습니다. 형은 오히려 선생님께 싸움을 했다고 꾸중만 들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거의 4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 이후로 형과 저는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일을 잘 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문득... 그 생각이 납니다.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질지라도 형과 함께 싸웠어야 하는데... 혹시 내가 누군가 도움을 청한다고 뛰어갔던 것이 나도 맞을까 두려워서가 아닌지.... 어린 마음과 비겁한 마음이 섞여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참 괴로웠습니다. 같이 아파하지 못했고, 같이 고통을 나누지 못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형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한번이라도... 그때 같이 싸우지 못하고 맞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말이라도 했다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아마도 식은 땀 축축하게 젖은 그 꿈을 또 꾸게 될 것입니다.
2. 죄책감, 혹은 수치심
때로 잊고 싶고,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문득문득 우리를 아프게 하고 놀라게 하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억들은 대부분 우리의 죄책감 혹은 수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의 작은 형과의 한때에 대한 기억을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라고 부를 수 있고, 형에 대한 죄책감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감정들은 분명 내 안에 있는 것인데 나를 해롭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는 감정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주인된 감정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사탄은 이런 감정들을 사용합니다. 자신을 미워하게 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분명 신앙이 있고,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고, 죄 사함을 받았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나는 해결되지 않은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인가 더 책임지고 더 고통스러워해야 나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지워질 것 같습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 중에서 자신의 삶에 찾아온 연약함과 그 연약함의 결과로서의 죄책감이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한 때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에게 있는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는 생각하지만 삶을 포기하지 못해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던 12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의 꿈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그려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그는 행복했을까요? 만족했을까요? 그는 양심에 찔림을 받습니다. 그의 수치심과 죄책감은 그를 다시 제사장들에게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을 팔고 받았던 은 30냥을 돌려주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그를 조롱하고 쫓아냅니다.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마 27:4) 그는 그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 돌아갑니다. 돈을 돌려준다고 한들... 양심의 소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책감이 그를 죽였습니다.
또 한 사람, 자신에게 다가온 수치심과 죄책감의 문제를 잘못 풀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담입니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으로 부터 숨고, 수치심 때문에 부끄러움을 잎으로 가렸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수치심과 죄책감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하나님을 원망하고 아내를 원망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쫓겨나는 것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찾아온 수치심과 죄책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나를 찾으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정말 부끄러웠을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수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부정했던 사람, 베드로입니다. 그 또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가 만일 베드로라면 다시 교회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는 이후에 예수님께서 마 16:18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초대교회를 세우는 굳건한 반석이 됩니다. 그는 어떻게 그 깊은 상처와 수치를,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부인 이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를 찾습니다. 베드로 있는 곳으로 가시고 베드로를 안으시고 격려하십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할 때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시 갈릴리로 내려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베드로가 그렇게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는 곧 형제들과 친구들을 모아서 갈릴리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요? 예.... 다시 어부 생활을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끄럽고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부활하셨고, 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잘 알겠는데, 이제 다시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기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부끄럽고, 사람들이 조롱할 것 같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낙향합니다. 가장 익숙하고 편하고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 갈릴리라는 동굴로 숨습니다.
많은 경우 베드로가 선택한 이 방법이 우리가 수치심과 죄책감을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가룟 유다의 극단적인 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선택과 결정을 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미안하고 부끄러우니까.... 숨고 피하고 끊고 혼자만의 동굴로 사라져 본 일은 없습니까? 자신에게 부끄럽고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나를 축소하고 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신 적은 없습니까?
4. 나를 아시는 주님
이런 베드로에 대해 답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실까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여러분은 이 말씀 중에 어느 구절이 제일 은혜가 되십니까? 저는 14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는 말씀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하시는 일이 있고, 하지 않으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자비와 은혜와 인자하심입니다.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지 않으시는 일이 있습니다. 노하지 않으십니다.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십니다. 죄를 따라 우리를 처지하지 않습니다. 죄악을 따라 갚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잘 배반하고, 이렇게 제 멋대로 살고, 이렇게 비겁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왜 사랑하시고 왜 책망하지 않으실까요? 1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다시 읽을까요?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나를 잘 아시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지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충성을 맹세할 때 그의 연약함을 미리 경고하셨고, 그가 연약함을 드러내어 배신했을 때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마 26:32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배반하고 돌아서고 부끄러워하고 숨기 전에 먼저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 예수님은 베드로가 낙향했을 때 분노하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 바다로 먼저 가셔서 그를 기다리셨습니다. 그의 체질을, 연약함을, 어리석음을, 그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의 가장 연약한 곳에 먼저 가셔서.... 고기와 떡을 구워 그들을 먹이시고 다시 사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나의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과거에 얽매여서 오늘도 패배하고 질척이는 삶을 사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 죄를 이기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의 과거가 얼마나 어두웠던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그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너의 연약했던 과거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내가 너를 이미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불렀으니 이제 너는 나와 함께 내 양을 먹이는 삶을 살자!”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 번 쓰러지고 넘어지며 수치와 눈물의 삶을 살았던 다윗...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들을 권면하십니다. 내가 다윗의 연약함을 알았던 것처럼, 내가 베드로의 연약함을 알았던 것처럼, 내가 바울의 연약함을 알았던 것처럼... 내가 너희들을 안다. 잘 안다. 내가 너희들을 이해한다. 사랑한다...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고통당하십니까? 살아온 삶이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우십니까? 여러분의 오늘이 하나님 앞에서 숨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알고 이해하고 품으시는 분입니다. 연약할수록, 부끄러울수록, 아플수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더욱 깊이 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찬양 한곡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 내 눈에 흐른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 내가 어딜 가든지 늘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가 들으시죠. / 그가 들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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