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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함께 울다(2). na kim 201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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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시편 137

* 제 목 : 기억과 함께 울다.(2)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 아시지요?(음악 1) 1970년 대 말 Boney M 이라는 독일의 흑인 그룹이 불러서 크게 히트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재미있게도 시편 137편을 레게 리듬에 맞게 만든 CCM입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유다 백성들이 부르는 슬픈 노래입니다. 거대한 제국 바벨론의 중심을 흐르던 유프라데강은 바벨론에게는 축복의 강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멸망을 목격하고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강은 눈물의 강이요 그리움의 강입니다. 시편 137편을 보면 바벨론의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와 승전을 축하하며 강변에 크게 잔치를 열었습니다. 노래와 춤에 재능이 있었던 유대의 포도들에게 고향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거역할 수가 없어서, 살아남기 위해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악기를 강물처럼 출렁이는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립니다. 그들의 운명도, 조국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가에서 부르던 노래는 원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훈련했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로 정복자들이 조롱하며 즐거워합니다. 조국 유대땅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무너뜨리고, 유대 왕의 눈을 뽑고, 어머니와 누이들을 겁탈하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왔던 원수들의 잔치를 위해 그들은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벨론의 강가에 모여 함께 노래하는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억과 함께 울고 또 웁니다. 성도 여러분! 그들의 기억, 그들의 눈물...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1. 나실인 삼손

 

저는 시편 137편과 비슷한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용사였던 삼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후 왕이 생기기까지 약 350년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사사시대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사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한 시대를 섬겼습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강력하며 가장 잘 준비된 사사가 있다면 바로 삼손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나실인의 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명을 위해서 구별된 사람을 뜻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13:5) 바로 삼손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과연 삼손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대로 대단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삼손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함부로 넘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질을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으로 단련시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는 나실인의 상징이었던 머리털이 잘리고 블레셋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삼손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그는 소위 장사쇼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블레셋 사람들이 잔치를 할 때 이미 힘을 잃었고 눈까지 뽑힌 삼손은 자신이 장사일 때 했던 일을 쇼처럼 보여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술잔을 높이 들고 삼손의 쇼를 안주 삼아 즐깁니다. 초췌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는 삼손.... 힘을 쓰는 척, 용기 있는 척... 살아남기 위해 온갖 모욕을 받으며 장사쇼를 합니다. 여러분,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한 때 이런 힘을 가졌던 용사였는데... 이렇게 원수 블레셋을 물리쳤고, 이렇게 이스라엘을 지켰었는데...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었고, 이스라엘의 자랑이었고, 블레셋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나는 참으로 대단한 용사였는데.... ...들릴라만 아니었다면.... 머리털만 잘리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여전히 그런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있다면.... 그는 한 때는 용사였던, 그러나 지금은 광대에 불과했습니다. 그 기억들은 그를 슬프게 할 뿐 아무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블레셋의 조롱은 더 커지고 웃음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가 다른 것을 기억합니다. 자신의 영광의 때나 치욕의 순간,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이나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사람들... 자신을 몇 번이나 팔아먹고 배반한 여인 들릴라.... 그런 기억들에서 헤매던 삼손이 어느 순간... 아니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에게 힘을 주시고 그에게 능력을 부으시고 그를 구별하셨던 하나님... 생각해보면 머리털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머리털이 능력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머리털을 잃어서 기운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능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머리털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상징, 은혜의 상징, 구별됨의 상징일 뿐입니다. ... 내가 머리털을 잘려서...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는구나... 가 아니라 아.... 그렇지... 내가 하나님을 잊고 외면하고 거역하고 살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16:28) 그는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는 나실인, 그는 하나님이 구별하신 사람, 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보호하고 지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잔치가 열리는 건물의 두 기둥 사이에 세워달라고 부탁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면서 더 크게 웃으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기운을 잃은 삼손이 또 무슨 재밌는 쇼를 보여줄까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제 다른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기질과 욕심을 따라 살았다면.... 이제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신의 인생의 가치와 사명을 따라 삽니다. 그는 힘을 씁니다. 건물의 두 기둥을 뿌리 뽑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그들과 함께 죽으면서 죽인 블레셋 사람이 살았을 때 죽인 수보다 많았다고 했습니다. 삼손이 마지막까지 결국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사사였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때는 그랬었지... 가 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지...라는 것을 기억했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탕자, 아버지를 기억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비유로 풀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기 몫의 재산을 상속받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오직 풍성한 재물을 사용하여 즐기는 삶에 꽂혀 있었습니다. 15:13에서 허랑방탕하였다고 했습니다. 삶의 원칙 없기, 기준 없이, 가치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재물의 주인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인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난의 때가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이 철저하게 재물의 노예였음을 알게 됩니다. 재물을 탕진하고 돼지와 함께 살면서 돼지가 먹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모욕하고 수치를 주었을 것입니다. “... , 어디 부자인 척 해봐.... 거기... 니 앞에 놓인 돼지밥 있잖아... 그것들을 앞에 펼쳐 놓고... 전에 니가 즐기던 잔치라고 생각해...한 번 놀아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비참합니다. ‘... 내가 전에는 잔치의 주인공이었는데... 내가 한 때는 잘 나갔는데.... 내가 한 때는 나를 손가락질하는 저 사람들보다 나았었는데.... 내가 한 때는... ... 한 때는....’ 이런 생각과 기억으로 살아가는 작은 아들에게 그 어떤 변화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물질의 노예요 세상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가 다른 것을 기억합니다. 그가 기억해 낸 것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재물을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아버지의 분노가 아닙니다.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기억한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했었는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에 집중하면 비로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범죄하고 허랑방탕 못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나를 따뜻한 품으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가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깁니다.

 

4. 세상의 강변을 서성이며

 

요즘 여러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십니까? 원래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특히 T.V.라는 방송 매체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서 보게 됩니다. 최근 몇 주간 무한도전에서는 타국에 있는 한인들에게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직접 음식을 배달하는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장면마다 감동이 있었지만 특히 저는 일본 우토로 마을에 사는 한인들에게 음식을 배달하고 사연을 전달했던 방송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토로(일본어: ウトロ うとろ) 마을은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동원된 노동자들에 의해 형성된 재일 조선인 마을입니다. 광복 직후집에 돌아갈 능력이 없는 일부 조선사람이 잔류하면서 현재의 우토로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현재 우토로에 사는 조선인들은 65세대 150여 명이며, 일본 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2017년 재개발 예정이기 때문에 퇴거를 준비 중입니다.

 

무한도전이 우토로 마을을 방문하면서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이 있습니다. 91세의 강경남 할머니(사진 1)8살 때 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찾아서 어머니와 함께 우토로 섬에 들어가서 83년 동안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고향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그 고향에 돌아가 봐야 이제 아무도 기다려주고 반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국땅에서 그렇게 죽어 묻힐 것입니다. 우토로 마을과 관련해서 방송은 하시마섬을 방문합니다. 하시마섬은 작년에 일본의 근대화의 상징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한 소위 군함도’(사진 2)라고 불리는 섬입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이 섬을 세계 문화유산에 등제하는 것에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유네스코 대사는 반대를 찬성으로 돌리기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harsh condition에서 forced to work'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한 후 일본 외무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그 표현이 강제 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발표했습니다. 여전히 강제노역의 역사를 가진 조선인들이 일본의 외진 마을에서 역사의 아픔을 곱씹으며 살고 있고, 그들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되지 않았는데, 일본은 그들의 잘못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무한도전이라는 방송이 우토로 마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그들이 무엇을 기억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송에서 우리들에게 전지는 질문은 우리가, 방송을 보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묵상한 성경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손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을 잊고 살았을 때 그는 블레셋의 포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과 그들을 향한 사명을 잊었을 때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울음 우는 삶을 살았어야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잊고 외면했을 때 돼지와 함께 삽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 땅에서 아픈 역사와 함께 조국을 그리워하는 형제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은 아직도 바벨론의 강가를 서성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바벨론의 강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37:1)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사쇼를 하던 삼손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이자 아버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자신들이 그 아버지 앞에서 누구였으며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를 기억할 때 그들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더니, 우리가 말씀을 잊었더니, 우리가 사명을 잊었더니 이렇게 쓸모없이 발에 밟히고 채이는 소금이 되고 말았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하는구나...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이후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만에 하나님은 이 노래를 부르며 시온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했을 때, 삼손은 사사로 죽을 수 있었고,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로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강변을 거닙니다. 세상의 강변에서 하늘거리는 기억의 버드나무 가지를 어루만집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좀 못났을 수 있습니다. 참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삶의 가지가지마다 고통스런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살아온 만큼 상처 받았고, 지나온 만큼 아픈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내 마음의 치유라는 책을 쓴 댄 알렌더라는 기독교 상담자는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겪게 되는 아픔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쉴 때도 우리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수십 년 후 세상을 떠날 때도 신음하거나 울먹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호흡까지 첫 울음을 닮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힘 센 줄 알고 자랑하며 살기도 하고,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줄 알고 큰소리 뻥뻥 치며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늘 상처였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그 눈물과 한숨이었습니다. 참 못난 인생입니다. 세상에 흩날리는 기억의 가지마다 눈물겹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살아서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기억을 붙들고 씨름하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입니다.

 

바벨론의 강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건물의 두 기둥을 잡고 우리들에게 외칩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이 우리들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거친 세상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 상처 받는 것이 일상이 되고, 눈물과 씨름하며 분노의 기억을 더듬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들이 우렁차게 외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이며,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나의 오늘과 우리의 오늘과 교회의 오늘과 우리 조국의 오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교회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있습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는 우리의 인생, 오직 견고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두고 날마다 허락하신 뜻과 말씀으로 사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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