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함께 울다 (3)- 두가지 기도 | na kim | 2015-09-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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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0. * 본 문 : 시편 25:6-7 * 제 목 : 기억과 함께 울다.(3)
‘박철민’(사진1)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맛깔나게 역할을 잘 소화하는 배우이면서 소위 개념이 있는 배우입니다. 한번은 토크쇼에 나와서 음식과 관련한 추억에 대해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짜장면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고 했습니다. 밝고 명랑할 뿐만 아니라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배우인데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명배우시절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만화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2000원으로 6시간을 뭉개고 있어야 하는 날이 있었답니다. 아무리 천천히 만화를 읽어도 2000원어치로 6시간을 버티기 힘들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마침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짜장면 배달이 왔습니다. 카... 냄새가 장난이 아닙니다. 군침이 수도꼭지 물 틀어 놓은 것처럼 흘렀습니다. 후루룩... 후루룩 그 손님이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님에게 삐삐가 왔습니다. 급한 듯이 후다닥 뛰어나갔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 후에 1분 정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그 짜장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조금 전까지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았었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남긴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사회자도, 패널도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곧 조용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박철민이라는 배우가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무 수치스러웠어요. 요즘도 짜장면 냄새만 나도 그때 생각이 나요. 사내자식이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그러면 안되는 건데... 혹시 누가 볼까봐... 혹시 주인 아줌마가 치워버릴까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남이 먹다가 남긴 짜장면을 허겁지겁... 눈물을 흘리면서 먹었어요... 아.... 나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생각할 때마다... 정말 수치스러운 기억이예요. 잊을 수가 않아요.” 1. 각인(刻印)되다. ‘각인 된다’ 혹은 ‘각인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사용하나요? 네.. 잊을 수 없도록 분명한 기억으로 남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각인된 기억,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몸으로 기억하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있습니까?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까? 몇 년 전에 제가 상담을 했던 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11학년이었고, 참 예뻤고 착했습니다. 그런데 상담하기 1년 전에 여학생으로서 어린 나이에 결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일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너무 싫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부끄러웠고, 세상이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고... 그리고 자신이 한 없이 미웠습니다. 마약을 하게 되었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삶을 계속 선택했습니다. 제가 만났을 때는 이미 학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으면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없도록 조치를 한 후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더 없이 착하고 예쁜데,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의 삶에 각인된 선명한 기억, 그것은 수치와 분노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 즉 자존감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여학생의 인생의 시간은 1년 전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모든 생각과 기억은 그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그때부터 자신의 삶은 무너지고 부숴지고 쓰러졌습니다. 그 소녀는 치명적 기억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용서와 기억 성경에는 하나님을 우리의 인격에 비추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서에 대한 표현이 있습 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4하)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죄와 악을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에 대한 것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과연 기억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삶의 결과를 보실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우리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가끔 저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대단한 결단을 하고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끄럽고 원망스러운 한 때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니니까 나를 용서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나니까... 그 상처와 고통의 기억의 주인이 바로 나니까... 잊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 여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그 기억으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은 벗어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일을 당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한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을 벌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미 무너진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다른 한편 그 삶을 즐기고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5편의 주제는 ‘죄책감’입니다. 시인은 아마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 25:11)라고 기도하고 있고,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시 25:18)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마치 그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고(15절), 괴롭고 외로우며(16절), 근심과 곤란함 중에 있습니다.(17절)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한 때 잘못된 생각과 욕심으로 그릇된 길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기억할 때마다 괴롭습니다. 3. 기억에 대한 두 가지 기도 제목 그래서 다윗은 기억에 대한 두 가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기를 원하는 것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기를 원하는 것들에 대해서입니다. 시편 25편 6-7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시 25:6-7) 그가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그의 연약했던 모습들, 어두웠던 과거들입니다.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는 ‘용서에 대한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자유’와 함께 합니다. 의지로는 용서했지만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억나고, 기억할 때마다 분노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정말 용서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용서했다면 용서의 대상에 대한 분노를 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해야 할 일, 혹은 대상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했던 일과 그에 대한 분노를 잊는 것입니다. 그의 죄와 허물에 대한 나의 기억과 감정을 멀리 떠내려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또 하나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기억을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사랑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이 아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 그리고 계획과 뜻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참된 가치는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가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기도는 실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향한 기도입니다. 내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자신도 잊고 싶습니다. 자신도 벗어나고 싶습니다. 과거의 추하고 아픈 모습, 상처와 고통의 기억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발버둥 쳐 봅시다.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죄책감의 선명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더 깊이 각인되어 내 삶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다윗이 기억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했던 한 때, 허물과 죄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를 결정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대신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을 기억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자신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인자로 자신을 만나시는 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서 멀어진 죄과(罪科)와 우리 사이에 한없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악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의 먼 곳으로 옮기시고 그 거리만큼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4. 또 하나의 각인(刻印) 요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 안에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들에 대해 말씀을 통해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각인되다’는 말은 참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각인이 우리들에게 악하거나 해롭지는 않은 것입니다. 죄와 허물에 대한 기억, 그리고 기억으로 말미암는 분노와 절망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저 멀리 밀어내어야 할 각인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판에 철필로 새겨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0에서 바울은 교회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바울이 지금 자신의 몸에, 삶에 새기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죄책감에 몸부림칠까요? 자신을 학대하고 망가뜨릴까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천하의 대역죄인이 될까요? 메시야를 외면하고 버린 몸쓸 놈으로 살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새기는 이유는 예수의 상명이 우리의 몸에서, 삶에서 증거로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워지지 않는 철필로 우리의 마음과 삶에 새겨야 할 참된 각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안에 새겼을 때, 주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며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이며 주님의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확인했을 때.... 우리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상처와 고통의 기억도, 죄와 허물에 대한 분노도, 잊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괴감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죄와 허물에 대한 모든 분노와 절망을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저 멀리 옮겨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넒은 거리만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빽빽하게 우리를 위해 채워놓으셨습니다. 따라 해보시겠습니까? “빽빽하게~~~” 사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눈물의 짜장면’으로 할까...? 뭐... 이런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박철민이라는 배우가 기억하고 있는 짜장면과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잊으려 해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되살아나고, 생각할 때마다 분노와 좌절로 눈물 짖게 되는 짜장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 짜장면들에 대한 대답을 주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와 연약과 부족과 상처와 분노와.... 이 모든 것을 기억의 저 먼 곳으로 밀어놓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어떤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주셨을까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참 아름다운 계획,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들을 저기 동편 끝에서 지금 여기 서편 끝까지 빼곡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기억의 노예로 살아갈 때.... 우리는 날마다 분노하며 절망하고 울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의 은혜로 살아갈 때....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며 찬양하며 또한 울며 살게 됩니다. 두 울음은 정확하게 반대되는 울음입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하나님과 더욱 친근한 삶을 사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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