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4.
* 본 문 : 신명기 24장 18-22절 말씀
* 제 목 : 기억과 함께 울다. - 4. 기억에서 사명으로
한 1년 전쯤이었습니다. 억양이 좀 이상한 영어를 사용하는 분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멕시칸들의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어서 우리 교회당을 렌트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음 날 성도들을 데리고 와서 교회당 전체를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과도 의논했고, 당회도 진지하게 의논했습니다. 그때 저희 교회가 내린 결론은 비록 우리 상황도 어렵고 어려움도 많겠지만 그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이단이거나 지나치게 불안정한 교회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어떤 교회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자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어떤 교회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대답이 없었습니다. 연락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저는 성도들과 당회가 보여준 성숙한 반응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당은 은행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활동이 많은 교회다보니 공간이 모자라서 쩔쩔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다른 민족 교회들과 공간을 나누어 사용하겠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기쁜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성도들과 당회가 그런 결정을 하면서 한결같은 이유를 말했었습니다. “우리도 몇 년 전만 해도 미국 교회당을 빌려서 사용했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생각해 보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과정에서 참 서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기간 내에 적당한 예배처소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 문이 잠겨 있는 경험도 했습니다. 음식 먹는 문제, 예배당 청소하는 문제, 그들이 사용하던 예배실의 공간 배치와 우리가 사용하고 싶은 공간 배치가 달라서 매주일 예배하기 전에 의자와 강대상을 옮기고 방송기기를 다시 설치하던 일도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혹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자체 예배당이 없이 오후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는 아무리 전화를 드려도 받지 않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민족 교회에 대해 넉넉한 마음을 품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옛날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려웠던 때와 오늘의 우리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사랑과 은혜를 허락하셨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1. 이스라엘의 두 가지 기억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을 갱신하고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에 대한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 두 가지 기억이 가장 잘 요약된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신 5:6) 어떤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십계명의 서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요약해서 십계명 서문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웨스터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도 제 101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 교회는 이 선언을 중요하게 다루었을까요? 말씀 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주제 -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이며,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에 대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하고 간단한 두 가지를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 두 가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기억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의 기억의 조작은 이렇습니다. 먼저 그들 자신에 대한 기억의 조작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에게 매일 만나가 내립니다. 그런데 매일 주어지다 보니 감사가 사라집니다. 지겹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그들을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 11:5) 사실입니까? 거짓입니까? 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조작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출 32:4)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도 왜곡했습니다. 그들이 지금도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분명한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은 누구였는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십계명의 서문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의 고백
이 두 가지 기억을 신약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기억과 고백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한 사람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사도 바울의 영적인 자기 인식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이던 AD 55년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 15:9)
그런데 AD 62년에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편지합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엡 3:8)
마지막으로 로마의 감옥에서 잠시 석방되었을 때, AD 63~65년 경에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를 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는 처음에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음에는 모든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죄인 중에서 괴수와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더 깊은 사람이 될수록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고백 속에서 그에 대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핍박하던 그에게, 가장 작고 연약했던 그에게 은혜를 허락하신 분입니다. 자신에게는 구원을 받을만한 어떤 가능성도 없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만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 중에 죄인인 자신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3. 사명을 발견하다.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고백했을 때... 그의 삶에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명입니다. 바울은 이 고백에 근거해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삶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고전 15:9에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던 바울은 이어서 자신이 받은 사명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엡 3:8에서는 고백과 사명을 함께 전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그리고 딤전 1:15에서 자신을 고백한 바울은 이어 16절에서는 받은 사명을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방황하고 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왜 우리가 우울해지고 왜 우리가 40평생, 50평생, 60평생....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왜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남은 인생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신다면 한번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심각하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나에 대해 어떤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4. “그들을 위하여 남겨두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기억과 함께 분명한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기억입니까?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또 어떤 기억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언약의 땅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자격과 능력에 근거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입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도 당연하게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령하십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22)
본문은 “기억하노라!”와 “명령하노라!”로 되어 있는 문장입니다. 무엇을 기억합니까? 그들이 누구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이 일은 어떤 일입니까? 신명기 24장 본문에서는 주로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그들은 그 은혜를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롭게 건설되는 하나나님의 백성의 나라 이스라엘에서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면 안됩니다. 가난한 과부의 옷을 전당 잡아도 안됩니다. 18절과 22절의 이러한 명령 사이에 19-21절을 봅시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 24:19-21)
이 구절에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라는 말과 ‘남겨두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땅에서 새롭게 건설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강물처럼 흐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나님께 대단한 업적과 성과로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실천되고 실현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하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거룩한 삶의 사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자신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왜곡될 때 그들의 삶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기억을 분명히 할 것을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억이 왜곡될 때 성도로서의 삶이 흔들립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 않으셨다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죄와 세상의 노예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아들을 나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 아들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와 하나님에 대한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백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분노의 기억으로 살 것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기억과 사명으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살다보니 사람에 대해 깨닫는 보편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기억의 왜곡은 그런 보편적인 진리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합니다. 여전히 갈등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은 저 멀리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무너집니다. 질서가 사라집니다. 가치가 흔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강력하게 명령하십니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는 성도와 교회가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 반드시 고백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로소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비로소 사명으로 살게 됩니다. 비로소 성도와 성도, 교회와 성도, 교회와 지역 사회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는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가치와 지향을 허락하십니다. 거룩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으로 사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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