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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함께 울다 (5)- 벌레같은 인생 na kim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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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8.

 

* : 이사야 41 8-16 말씀

* : 기억과 함께 울다. - 5. 벌레 같은 인생

 

              제가 대학에 들어갈 노래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들의 꿈은 ‘대학 가요제’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입학했던 부산대학교에는 ‘썰물’이라는 팀이 있었는데, 2 대학가요제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라는 노래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썰물’은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대학 1학년 봄에...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오를 , 대학 박물관 앞에서 썰물 단원 모집 공개 오디션이 있었습니다.  기수에 2명을 뽑는데,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했습니다.  역시 한명이었습니다.  10여명의 선배들이 강의실 의자를 빼와서 앉아 있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가 불렀던 노래는 'Why Me Lord'라는 노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e3dpfDuZew (노래만...)

 

Why me Lord, what have I ever done

To deserve even one

Of the pleasures I've known

Tell me Lord, what did I ever do

That was worth loving you

Or the kindness you've shown.

 

Lord help me Jesus, I've wasted it so

Help me Jesus I know what I am

Now that I know that I've need you so

Help me Jesus, my soul's in your hand.

 

              그런데 노래를 한국의 선교 단체에서 보급할 애매하게도 1절은 한글로 번역해서 부르고 뒷부분은 영어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배우고 불렀었습니다.  노래의 1절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아십니까? 

 

“벌레 같은 내게 축복 주시는지 없습니다.  무엇 하나라도 무슨 하나도 자격 있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벌레’일까요? 노래가 좋기는 한데... 원래 가사를 보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부족한 우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 이정도면 좋을텐데, 하필이면 벌레 같은 내게... 라고 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그리고 궁금증은 나중에 풀렸습니다.    

 

1. “버러지 같은 야곱아....

 

              이사야 41장은 많은 사랑을 받는 말씀입니다.  10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0)  많이 암송되고 많은 위로를 받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41장에는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면서 지금 “버러지 같은 야곱아!( 4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함께 나온다고 해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죄와 악의 노예의 상태에서 불러내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버러지 같다’라고 말씀하실 있을까요? 

 

              지금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의 상황이 많이 안좋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이미 멸망당했고, 남유다 또한 우상 숭배와 사회적 죄악으로 멸망 직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전이 무너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삶을 살게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라고 해버리시면 그들이 곳은 어디일까요?  이럴 일수록 위로하고 격려하셔야 하는 아닐까요?

 

2. 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하여

 

              그런데 실은 그들이 버러지와 같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먼저 쓰신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던 사건을 압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지파의 젊은 지도자들이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말합니다.  땅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12명의 정탐꾼이 모두 동의합니다.  진격하면 됩니다.  했을까요?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랬을까요?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말합니다.  그곳에는 우리와는 비교할 없이 아낙 자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 앞에 마치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니라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저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아무리 외치고 설득해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명의 정탐꾼들에게 이미 설득 당해버렸습니다.  그들 자신을 마치 메뚜기와 같이 비참하고 작고 못난 존재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복된 , 복된 삶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 자유라는 , 삶의 기쁨과 보람이라는 ... 모든 말들은 메뚜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메뚜기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여길 때까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시키십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밖에 없었을까요?  그들 자신을 향한 시선이 그렇게 차갑고 비관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방식은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서 학습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예수님을 만나듯 존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녀들이 처음 만나는 세상이 바로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자신을 향한 가치, 자존감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표현했을까요?  , 그들이 사백 년간 애굽에서 그렇게 취급당했기 때문이고, 그들의 부모가 스스로를, 그들의 자녀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 그런 취급에 익숙해져야 했을까요?   시편 1편에 답이 있습니다.  4절을 보실까요?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4)라고 했습니다.  메뚜기나 벌레는 생명이라도 있지만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겨는 생명도 쓸모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악인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악인입니까?   하나님을 몰라서입니까?  아닙니다.  시편의 청중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데, 어떤 사람은 악이 되었을까요? 

 

              시편 전체의 주제를 찾으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의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악한 사람, 혹은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따라, 그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을 시편에서는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시선과 설명,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치가 아닌 / 세상이 우리를 보는 시선과 대하는 방식과 가치에 길들여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벌레처럼, 메뚜기처럼,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나의 사랑하는 백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기를 원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버러지같은 야곱아!”라고 부르시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질서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생각과 시선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가진 생각과 가치로 자신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눈과 논리와 생각으로 그들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즐거움을 찾으려 했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진 그들을 세상에 의해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세상의 밥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감히 항거할 없는 강대국의 폭력은 어느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바람에 휘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거인 앞에 메뚜기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사랑을 떠나서 세상을 따라간 그들.... 세상은 그들의 가치와 시선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해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먼지와 같았고, 메뚜기와 같았고, 버러지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말씀하십니다.  “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아, 너희는 나의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어찌 너희가 세상에서 버러지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느냐! 

 

4. 하나님 앞에 서다.

 

              여러분!  스스로를 메뚜기처럼, 벌레처럼, 먼지처럼 만들어버리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아무리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해도 스스로를 죄와 악으로, 세상으로 자꾸만 몰고 가는 그들에게 회복의 길은 있는 것일까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참으로 존귀하고 가치있는 삶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나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제대로 만나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이 나를 멸시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를 벌레처럼, 메뚜기처럼, 먼지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메시야 고난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18절을 보실까요?  “나는 같이 쏟아졌으며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마음은 밀랍 같아서 속에서 녹았으며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모든 뼈를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22:14-18)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과 수치를 바로 우리를 위해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고통과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6절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22:6) 

 

              원래 누가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까?  ,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했고, 우리가 세상에 멸시를 당하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수치를 당해야 했고, 우리가 세상 앞에 벌레와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편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백을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고백을 다윗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백으로 남기신 것입니다.  “나는 벌레가 되겠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자신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저들을 위해, 세상에서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저들을 위해 내가 벌레가 되겠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겠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벌레처럼 죽겠습니다.    

 

              저는 Why Me Lord라는 찬양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의 노예입니다.  세상은 우리는 메뚜기보다, 벌레보다,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수치와 고통을 자신이 책임지십니다.  우리를 다시 존귀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벌레와 같이 되셨습니다.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벗이 되고 자녀가 되고 나라가 되고 백성이 됩니다.  다시는 세상이 보는 시선으로 우리는 보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는 세상의 가치로 우리의 귀한 인생을 평가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휘둘리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스스로를 십자가에 벌레로, 수치로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우리를 대하십니까?  우리를 범죄케 하고 타락하게 하는 세상의 마음과 시선으로 자신을 대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말씀 읽으시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0)  하나님은 'I am your Go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I am your son!"  "I am your daughter!"라고 담대히 고백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같은 삶을 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묵상을 위한 질문

 

1)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0)  말씀을 읽을 느낀 점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러지 같은 야곱아!”라고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결과일까요? 

 

3)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의 정탐꾼들은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시편 1:4절과 연관지어 묵상해 봅시다.

 

 

4)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22:6) 말씀이 주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눠 봅시다.  

 

2. 기도

 

1)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이웃을 바라보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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