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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두신 기쁨 na kim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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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5.

 

* : 시편 4

* : 기억과 함께 울다. - 6. 마음에 두신 기쁨     

 

              얼마 전에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사람인 김세윤 박사의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기자가 타이틀을 뽑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해도 아프고 가난한 왜일까?”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단에서 기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몇 교회에 나가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지는 ‘상’을 받는 것일까? 

 

              여러분에게 만일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김세윤 박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대답합니다.  신앙과 , 죄와 고난 등을 인과관계(因果關係) 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제자 중에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사람을 앞에 두고 “이 사람이 소경이 것이 누구의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를 물었을 예수님께서 “그 누구의 때문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다가온 불행과 행복을 사람의 삶에 있었던 어떤 행위의 결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인과관계를 설명할 없는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고, 우리의 신앙은 모든 일들의 원인을 설명해야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성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은 이미 세상을 통해 하나님의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에 돌이 예음이를 앞에 두고 엄마, 아빠가 탄생의 비밀을 설명한다고 합시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만나게 되어서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이 터서 어떻게 결혼을 했고, 그래서 네가 태어난 거란다.... 얼마나 알아들을 있을까요?  하지만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예음이가 엄마, 아빠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을 받고 알고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음이와 부모의 차이, 그리고 우리들과 하나님의 차이... 어느 차이가 클까요?  예음이가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빠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빠를까요?  저는 예음이에게 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식보다는 믿음이요, 이해보다는 순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합리성이나 이성의 필요성을 무시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꾸만 설명하려 하고 이해하려 하다 보니 억지로 말씀을 해석하고 풀어가려는 어리석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또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1. 곤란한 인생

 

              시편에는 이런 고민이 자주 등장합니다.  인생의 희노애락이 녹아 있는 것이 시편이다 보니 자신의 삶에 다가온 어이없는 불행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하도다 내가 마음을 정히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73:12-16)  시인의 고민이 이해되십니까?  시인은 악한 자들이 잘되고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내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고민합니다.  심히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상식과 믿음을 사용해 봅니다.  그래도 제대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도는 “응답하소서!”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27:7)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02:2)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143:7)  그런데도 하나님의 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떼를 쓰기도 합니다.   안보이냐고, 안들리냐고 외칩니다.  재미있게도 시편에는 “보옵소서”와 “들으소서”라는 기도의 제목도 많이 등장합니다.  인생의 곤란함에 대해 하나님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에서도 시인의 삶은 곤란하고 피곤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곤란하게 하며(1) 욕되게 하며 그에게 헛된 일을 하며 거짓을 행합니다.(2)  그에 대해 범죄합니다.(4)  그의 믿음을 조롱하기도 합니다.(6)  하나님을 믿고 바라며 말씀대로 사는 일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하나님은 그의 마음과 귀에 들리게 응답하셨을까요?  대답을 시원하게 주실까요?

 

2. 하나님과의 소통에 대한 가지 유혹

 

               이런 때에 우리가 쉽게 당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첫째는 답을 너무 쉽게 찾으려는 유혹입니다.  사람들의 상식과 지식의 범위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답을 포기하려는 유혹입니다.  주변의 상식과 지식의 범주에서 답을 찾으려 하다 보니 쉽게 벽을 만납니다.  좌충우돌하고 그리고 포기합니다. 

 

              번째 유혹의 좋은 예가 바로 욥기입니다.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던 욥이 이유를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고난에 인내하던 욥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던 친구들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들이 찾은 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정론’(神正論)입니다.  신정론이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도대체 세상이 이렇게 악할 있는가?”하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현실적으로 질문한다면, 제가 가장 최근에 신정론에 관계된 질문을 받은 것은 작년 4,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이었습니다.  탑승인원 476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안산이라는 도시가 기독교인들이 많은 도시이고 사망자 중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목회자의 자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라는 질문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가지 유혹에 빠집니다.  하나는 너무 쉽게 답을 주려는 유혹이며 다른 하나는 답을 포기하려는 유혹입니다.  쉽게 답을 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다.  ‘더 좋은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다’  ‘한국 사회가 범죄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만연해서 경종을 주려는 것이다’ 등등의 대답을 합니다.  반대로 모든 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얻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악에 불과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악에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길은 어쩌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악이 되든지 악보다 강해야 합니다.  있을까요?  결국 절망할 밖에 없습니다.

 

              시편의 시인도 고민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1-3)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73:13-15)  답을 찾으려했고, 찾지 못했고, 악인의 번영을 질투하고, 오히려 악인이 되어볼까... 유혹 당하고... 그리고 절망합니다.  사람의 이성과 상식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스스로를 속이든지, 포기하든지 해야 합니다.

 

3. 시인의 선택

 

              그러나 시편 4편에서 다윗은 거짓된 답을 찾거나 찾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건강한 답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4편에서 우리들이 만나는 고난의 삶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이해하기보다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극심한 고난과 고통의 , 하나님의 대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도와 예배를 선택합니다. 1, 3, 5, 7절에서 그는 기도하며 예배하는 중에 자신을 지킵니다. 

 

              번째 그는 평안을 선택합니다.  8절을 보시면,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믿음을 비웃으면서 그의 평안을 흔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평안을 선택합니다.  평안함은 하나님과 성도와 관계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거친 바람과 높은 파도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안에 있을 평안을 누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위를 걸었습니다.  평안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졌을 , 그는 바다 속으로 빠져듭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옵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신뢰하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번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4-5절을 봅시다.  세상의 악함과 강함에 대해 비겁해지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의로운 삶의 원칙을 지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요즘 역사 문제로 한국이 시끄럽지요.  실은 일제시대 한국 교회의 97% 친일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에 일제의 신사를 걸어놓고 먼저 절하게 하고, 목회자들을 ‘미소기바라이’라는 일본의 앞에 세례를 받는 의식에 참여하게 했을 97% 교회가 그것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오늘날 이것은 우리들에게 비상식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상식일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거대악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왜곡할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4)라는 말씀을 지킬 있을까요?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5)라는 말씀을 지킬 있을까요? 

 

              그리고 시인은 마지막으로 기쁨의 삶을 선택합니다.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그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기쁨은 그의 마음에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주신 것이고,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있고, 이익이 되지 않을 있고,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과 번영의 삶과는 다를 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세상의 기쁨을 비교하기를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4: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가운데 추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중심의 삶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성공이나 성취, 번영과 영광보다 감사하고 기쁜 삶이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인생들아!

 

              시편 4편에서는 2절과 4절에 ‘셀라’라는 말을 붙여놓았습니다.  셀라는 말은 음악적, 혹은 시적인 용어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들어 올리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다른 구절과는 다르게 구절을 소리를 높여 부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적으로는 강조된 구절을 읽고 잠시 멈추어 서서 깊이 묵상하라는 뜻입니다.  시편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격동되었을 , 가장 중요한 것을 표현할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 그러면 시편 4편의 셀라를 보실까요?  2절은 자신을 괴롭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강조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4:2)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면서 세상이 주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습니다.  3절에서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3)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다시 한번 ‘셀라’라고 강조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경건한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4:4)  두려워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을 , 혼자 있을 ... 자리에 누워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지 않으시는지 불평과 불만하지 말고 침묵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것이고, 때와 뜻은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려볼까요?  “기도해도 아프고 가난한 왜일까요? “몇 교회에 나가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요?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지는 ‘상’을 받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잘못된 질문들입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고, 질문의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질문은 우리의 신앙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의 전제는 기도하면 병이 나아야 하고, 믿음이 있으면 부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 믿으면 돈도, 건강도, 소원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만사형통, 만병통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이단 혹은 삼단입니다.  이단일 가능성은 정말 여러분을 잘못된 교리로 유혹하려는 시도일 있고, 삼단인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쳐온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번영하고 잘되는 것으로 믿음을 증명하라는 논리는 사탄의 논리입니다.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했던 논립니다.  오늘 시편은 사탄의 논리 앞에 담대하게 소리 높여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두신 참된 기쁨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 성공과 번영과 비교할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복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영광을 하늘의 가치가 땅을 사는 삶에 임한 것입니다.  나는 기쁨으로 오늘도 살아갑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늘의 가치로 땅을 살아가는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영광과 기쁨에 날마다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토론을 위한 질문

 

1. “몇 교회에 나가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지는 ‘상’을 받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 시편 4편의 시인이 선택한 삶의 태도를 4가지로 요약해 봅시다. 

 

1)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이해하기보다 믿는 사람입니다. 

2) 그는 평안을 선택합니다.  

3) 그는 의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4) 시인은 마지막으로 기쁨의 삶을 선택합니다.   

 

 

3. 우리가 믿음 안에서 반드시 지켜야 영적인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믿음이 없이는 찾을 없었던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4. 무엇이 우리를 슬프고 근심하게 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기쁘고 감사하게 합니까?  최근에 있었던 슬픔과 근심, 기쁨과 감사를 통해서 안에 있는 가치들을 점검해 봅시다.

 

함께 기도할 제목

 

1. 땅에 속한 가치들로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않게 하소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으로 살게 하소서.

 

2. 세상 속에 사는 교회와 성도로서 의롭고 평안한 삶을 선택할 있도록 믿음과 지혜를 주소서.

 

 

찬송가 : 9(53)  54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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