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39. 성도 보통씨가 당한 재난 | na kim | 2018-10-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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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4. * 본 문 : 누가복음 13장 1-5절 * 제 목 : 선교적 교회 - 39. 성도 보통씨가 당한 재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가까운 교회에 청년부를 담당하는 부교역자 생활을 했었습니다. 하루는 저와 나이가 비슷한 한 여자 집사님에 제게 와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사과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한테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하고 물었더니 자신은 분명히 제게 잘못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 힘들던 시절이고 교회까지 거리도 멀어서 새벽기도에 잘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적어도 주일에는 반드시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전 주일에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집사님은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챙겨 보시는 분이었습니다. “목사님, 지난 주일 새벽기도에 안오셨죠? 그래서 제가 무슨 목사가 주일에 새벽기도도 안나오냐고 막 욕을 했어요. 다른 성도들에게도 이목사가 주일 새벽기도도 안나오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어요.” 좀 어리둥절했지만... 제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뭐라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주일 새벽기도회에 빠진 것으로 비난을 받아야 하면... 받는 거지 뭐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 집사님의 일들이 그날부터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기분이 안좋고, 사람들과 다투게 되고, 가정불화도 있고....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다가... 내가 요즘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리고 무릎을 쳤습니다. 아.... 내가 감히 주의 종을 비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려나보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저를 찾아와서 일단 사과를 하고 본 것입니다. 어이가 없었고, 우스웠고... 그리고 뭐 어찌 드릴만한 말이나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알겠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무슨 그런 일로 벌을 주시겠냐고 위로하고, 다음부터는 주일 새벽기도에 안빠질테니까... 저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줄여주시면...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날 일은 그렇게 끝났지만 저는 그 집사님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1. 보통씨들이 받는 재난 지난달 말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섬을 강타한 규모 7.5의 강진과 쓰나미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이 무너졌습니다. 심지어 그곳에 거주하거나 여행 중인 한인들 또한 실종된 사람을 포함한 많은 피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최근 들어서 자주 발생하는 태풍과 쓰나미는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쓰나미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많은 목회자들이 이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세월호에서 수많은 자녀들이 희생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반복되는 지진을 그들의 과거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우리가 가진 신앙으로 해석하려 하고 믿으려 하고 또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의 개인의 삶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은데 여전히 불행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질병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통사고가 생기고, 부부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기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큰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보고 사업에 실패하고 자녀들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신앙과 관련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런 문제들을 좀 조절하면 좋겠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빌라도의 제사와 실로암 망대 사건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당시 유대사회가 고민하던 두 사건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반로마운동을 벌이던 갈릴리 사람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서 제사를 드린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예루살렘 성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망대 중 하나인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18명이 죽었습니다. 유대사회는 당황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물에 동족의 피가 섞인 일과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세운 망대에 동족이 깔려 죽은 일 -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13장 1절에 대하서 잠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빌라도가 악한 총독이라고 해도 어떻게 유대인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에 유대인의 피를 섞을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번역한 다른 성경들을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공동번역) 2)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새번역) 3)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천주교 성경) 4) About this time Jesus was informed that Pilate had murdered some people from Galilee as they were sacrificing at the Temple in Jerusalem(NLT) 이 번역들을 보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반 로마항쟁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로마군대가 상주하던 예루살렘이나 이미 앗수르의 혼혈 정책에 의해서 순수성이 사라진 사마리아에 비해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들은 지속적이고 극렬하게 로마에 저항했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오늘 본문이 기록되던 상황 직전에 반로마 유대독립 운동을 하던 일련의 갈릴리 사람들을 추적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을 죽였습니다. 제물과 제단에 피가 흘렀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반란군에 해당하는 갈릴리 인들을 죽이고 떠났을 것이고, 남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 사건 또한 그 상황과 배경을 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로암은 기혼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이고, 망대는 모인 물을 관리하기 위한 시설물입니다. 당시 망대는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건축되었습니다. 하나는 군사적 목적이요, 다른 하나는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적들의 침범을 막기 위해 전망대를 설치하고 군사적인 움직임을 파악했고, 생명만큼이나 귀했던 물을 훼손함으로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망대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하지 않고 있는 어떤 이유로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이 두 사건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3. 그들만의 문제, 당신의 문제, 그리고 우리의 문제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실로암의 망대 사건까지 함께 언급하십니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삶에 닥치는 고난에 대한 유대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원인이 있다는 견해였습니다. 그들은 죄와 벌에 대해서, 혹은 선과 상에 대해서 동양적 사고와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그것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어디에 나온 이야기일까요? 바로 욥기의 이야기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 논리를 사용해서 공격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자녀들을 잃고 아내까지 떠나고 병에 걸려서 허덕이는 것을 보니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먼저 회개부터 하고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소경을 만났을 때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조상의 죄입니까?”를 묻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볼 때도 불쌍히 여기기보다 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강도를 만난 이웃을 바로 이런 논리로 충분히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비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저렇게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보니.... 그들에게 아마도 어떤 문제가 있었겠지....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2) 예수님의 논리 전개를 잘 보십시오. 먼저 불행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다른 갈릴리 사람들을 연결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야기로 옮겨오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문제는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이것은 유대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함께 안고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민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함께 부흥하고 회복되어 넘어서야 할 문제입니다. 로마의 권력에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개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묻는 비겁함에서 우리들 모두의 문제임을 알고 함께 회개하며 기도하며 일어서야 할 문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숨기고 싶은, 언급하지 않은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난 일을 말씀하십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4) 그러고 보니 갈릴리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의 재난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더 악했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보다 의로워서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감당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4. 함께 울고 함께 일어서라. 저는 가끔 어떤 가정에 슬픈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불행은 왜 파도처럼 반복해서 밀려오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한 가정에 큰 불행이 닥쳤을 때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크고 누구의 책임이 더 많은지를 놓고 손가락질하고 다툴 때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업을 실패했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가족 중 누구를 잃거나 큰 병에 걸렸는데... 가족이 해체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한 원망은 아무도 들어주지도 않고 봐주지도 않으니까...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분노를 받아주는 가족들에게 쏟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유대인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은 왜 원인과 결과를 짝 맞추려고 할까요? 그들이 당한 역사적 불행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수백년간 식민지로 사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인가?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인가? 내가 잘못해서 이런 결과가 왔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손가락질합니다. 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작은 일이 생겨도 책망하고 정죄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자신만의 논리로 해석하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우리가 모르는 악한 죄를 지었을거야....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은밀한 죄를 지었겠지....큰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그러게 좀 착하게 살지.... 자신이 고난을 당하기 까지 그들은 타인을 정죄했고,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 분노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문제가 공동체의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공동체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고 기도하고 회개하며 새롭게 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함께 눈물 흘리며 함께 고민하며 함께 일어설 문제입니다. 나라와 민족은 로마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심지어 동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에서 살상을 당하고, 사회 안전시설이 무너져서 안전시설이 오히려 목숨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 우리 사회의 근간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세운 이 나라,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세운 이 나라가 짓밟히고 무너지고 쓰러져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합니다. 그들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고, 그들의 눈물은 나의 눈물이며, 그들의 고통 또한 나의 책임입니다. 내가 변화되고 우리가 변화되고 관계가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하소서....
험한 세상을 동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에게 이웃이 되고 가슴이 되고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손가락질하던 모든 손가락을 펴서 슬픔을 어루만지며 고통을 다독여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끼리, 우리 교회만, 혹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교회끼리만 말입니까? 아닙니다.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재난 당한 수많은 보통씨들이 바로 나임을 함께 고백합니다. 우리가 함께 책임지고 살아가는 21세기, 이 땅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기가 막힌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그 슬픔을 품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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