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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서로의 짐을 지다.’ 김나래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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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갈라디아서 2장 11-21절 말씀

* 제 목 : ‘각자, 서로의 짐을 지다.’

 

제가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숫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리를 하면서 칼이 잘 들지 않아서 힘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옛날 방식의 숫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 유투브 동영상에서 ‘다이소’라는 곳에 가면 옛날 숫돌을 판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가봤더니 정말 어릴 적 봤던 숫돌을 좀 작은 크기로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요리를 할 때마다 부엌칼을 스윽~슥 갈아서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부엌칼의 날은 꽤 쉽게 무뎌집니다.  그냥 사용할 때는 종이장 하나도 쉽게 자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사온 숫돌에 한 1-2분 정도 칼날을 갈고 나면 페이퍼 타올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스윽~ 칼로 자를 수 있습니다.  저희 집의 부엌칼은 요즘 아주 날이 잘 서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 아내가 설거지를 요청했습니다.  한쪽에 유투브로 뉴스를 틀어놓고는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설거지를 시작했습니다.  한참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무엇인가 따끔...보다는 좀 더 심한 통증이 왼쪽 검지에 있었습니다.  뭐지...? 하고 봤더니 이미 설거지통에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설거지통에 있는 칼의 날이 위쪽을 향하고 있었고, 세제를 묻힌 그릇을 잡는다고 손을 내밀다가 날카로운 부엌칼날에 베이고 말았습니다.

 

한참 지혈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밴디지를 붙였습니다.  여기저기 떨어진 핏방울도 정리했습니다.  설거지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짧은 시간 저희 집 부엌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는 제게 일어난 일이 꼭 교회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 교회는 주방입니다.

 

저희 집 식구 4명, 가일이가 오면 5명입니다.  이 작은 식구들이 먹고 사는 일에도 다양한 주방도구가 필요합니다.  주방 도구 중에서는 날카로운 칼이나 가위가 있고, 끓이는 냄비와 솥도 있고, 떠먹는 국자도 있습니다.  튀기고 굽는 팬이 있고, 집어서 옮기는 집게도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함께 사용해서 우리가 음식을 만들고 먹고 즐깁니다.  그런데 제가 사용하는 주방 도구들은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직접 요리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들이 있고, 직접 쓰지는 않지만 주방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쓰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숫돌같은 것이고, 또 세제나 수세미 같은 것들입니다.  제가 사온 숫돌은 칼을 날카롭게 하고 잘 쓸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손을 다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손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칼을 쓰지 않거나, 숫돌을 사용해서 갈지 않아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뜨거운 기름이 튀는 것이 싫어서 튀김요리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국물이 끓어 넘치고 냄새가 난다고 국을 끓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방이란 끓이고, 볶고, 자르고, 썰며, 씻고, 갈고, 양념해서 간을 맞추는 곳입니다.  스윽~슥 소리가 나기도 하고, 달그락 거리기도 하고, 끓던 국을 쏟기도 하고, 자르던 고기가 도마에서 튀기도 합니다.  좋은 식탁을 만들기 위해서, 가족들이 함께 즐기기 위해서,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준비하는 곳입니다.   

 

저는 교회가 꼭 주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라는 주방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식탁을 준비합니다.  세상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만찬을 준비합니다.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여 식탁을 준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로가 도구가 되고 서로가 재료가 되고 서로가 요리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식탁을 준비하는 일이 늘 잘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칼이 무뎌서 문제가 생기고, 때로 있어야 할 자리에 주방도구가 없어서 문제가 생기고, 필요한 양념이 없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경험한 것처럼 날카롭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좋은 식탁을 준비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목적이지만..... 사람 사는 일, 사람이 함께 협력하는 일의 과정은 늘 어렵고 힘이 듭니다.   

  

2. 갈라디아교회라는 주방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들은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 두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신학적인 문제로서 구원론에 관한 이견이 있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쉬운 주제인데 1세기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신학과 성경으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교회론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교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예배합니다.  어떤 형식으로 예배할까?  누가 가르칠까?  어떻게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양육할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믿고 지키던 모든 종교적 절차와는 다르다는 것이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디로, 어떻게, 누가 지도하고 따르며 협력해야 하는지가 참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신학적인 문제부터 생각해볼까요?   당시 갈리디아 교회는 유대인들의 분포가 많았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이 보편적으로 만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할례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성장의 한 절차였습니다.  몸으로 기억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징표가 할례였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유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 논리를 주장했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대립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일지라도’라는 말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주님께로 와서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는 혈통과 민족과 국가와 인종의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인 할례와 종교적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데 대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3. 게바를 면책하다.

 

문제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주장 앞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의 반응에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나 베드로의 입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학적 입장이 있습니다.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주제가 바로 구원론에 관한 것이었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의 의견을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베드로와 바울의 신학적 입장은 같았지만 그들과 다른 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지중해 근방의 많은 도시와 교회를 다니며 직접 유대주의자들과 부딪혔습니다.  그들에게 매를 맞기도 했고, 모함을 당했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견고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와 구원에 대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베드로는 신앙의 고백은 동일하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주의자들과 직접 부딪히는 일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바른 결정을 선포했지만 유대주의자들의 집요한 추적과 추궁 앞에서 베드로는 바울처럼 견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했다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대표적인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교회에 초대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가 방문합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기뻐하며 그를 영접합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이방인 성도들을 만나는 것을 방해해기 위해 유대주의자들이 닥쳤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대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망칩니다.  성경은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 3:12)라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본 많은 성도들이 베드로를 따라하게 되었고, 심지어 바나바까지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이방인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고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에 대해 엄중하게 베드로를 책망했으며 그것을 편지에,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라는 주방이 보이십니까?  날카롭고 정확한 사도 바울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성도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유대인들도 있고, 유혹당한 이방인들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도 보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베드로가 다녀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도망쳤던 그 일의 영향은 갈라디아 교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라는 주방이 보이십니까?  여러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주방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복음의 식탁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4. 갈라디아 주방 경영의 원칙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가장 적절하고 중요한 원칙을 가르치십니다.  6장을 보시면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입니다.  바울은 서로의 짐을 지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먼저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 복음의 원칙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과를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짐을 먼저 지신 것처럼 성도와 교회와 이웃의 짐을 먼저 지고 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로소 교회가 복음의 좋은 식탁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 원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4-5)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살피고 자기 짐을 지라고 권면합니다.  바로 앞 2절에서 서로 짐을 지라고 권면하고 4-5절에서는 자기 일을 살피고 자기 짐을 지라고 권면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6장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관계적 책임이며, 6장 4-5절에서 “각자 자기 짐을 지라”는 말씀은 개인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다만 이 말씀이 좀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이렇게 질문해볼까요?  교회는 각자 자기 짐을 지는 성도들의 모임입니까?  아니면 서로의 짐을 나눠지는 성도들의 모임입니까?  이 두 질문은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를 주방에 비유하면 우리는 이 두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과 숫돌의 관계를 보실까요?  칼은 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숫돌 역시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사용한 숫돌은 저의 손을 다치게 한 칼 외에도 많은 칼들을 날카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숫돌이 받은 은사와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칼을 날카롭게 하는데 있고, 그것은 숫돌이 자신의 짐을 지는 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숫돌이 갈았던 칼이 요리하는 사람의 손을 다치게 했다는 나는 이제 숫돌이 아닌 수세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각자 자기 짐을 최선을 다해서 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짐, 즉 무뎌진 칼의 날을 바로 세우는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칼은 날카로워야 하고 잘라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손을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칼이 져야 하는 짐을 포기하고 젓가락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방에는 칼의 책임이 필요하고 그 책임을 대했을 때 요리의 재료들에 대한 짐을 서로 지게 되는 것이고, 요리하는 역할을 맡은 성도의 짐도 함께 나눠지게 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주방의 도구들이 각자의 역할로 식탁을 준비하는 일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초대교회 전체의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베드로와 그와 다른 사명으로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서로를 책망하는 격렬한 시간이 지난 다음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각각 자신의 짐을 지는 일과 서로를 섬겨 서로의 짐을 지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이 각각 자신의 섬김을 계속하고 서로에 대한 섬김을 계속한 결과는 오늘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이며 성도의 관계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성도와 교회를 향한 부르심에 우리가 함께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각각 자신의 짐을 지는 성도들이 서로의 짐을 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향기나는 식탁을 준비하는 부엌과 같습니다.  우리가 좋은 식탁을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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