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홈 >
  • 예배와 말씀 >
  • 주일 예배
주일 예배
‘마지막 한 걸음까지’ 김나래 2023-12-24
  • 추천 1
  • 댓글 0
  • 조회 137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6335023

 

 

* 본 문 : 갈라디아서 2장 15-16절 말씀

* 제 목 : ‘마지막 한 걸음까지’

 

세계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의 정비장교로 복무하던 포렐은 소련군이 남긴 탱크를 고치는 일을 하기 위해 소련으로 넘어갑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크리스마스 전에는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패망하고 말았고, 그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25년의 강제노역형을 당하게 됩니다.  나치로 불리던 독일군 포로들은 인권이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수용소로 가는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살아남은 포로들은 시베리아 끝에 있는 데즈네프 수용소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 수용소는 담장이나 감시탑이 없었습니다.  주변 모두가 얼어붙은 허허벌판이어서 살아서 탈출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포로들은 그곳에서 석탄을 채굴하면서 천천히 죽어가기를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납니다.  포렐은 빛이 바랜 가족들의 사진을 보면서 절망을 이기고 있었고, 독일에 있는 가족들은 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포렐은 그곳에서 기계정비사로 그럭저럭 견딜만한 삶을 삽니다.  하지만 그는 탈출을 결심하고 의사로 일하던 또 다른 포로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에 감행합니다.  북극을 걸어서 넘어가는 길고 어려운 여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극한의 자연환경을 경험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걷고 또 걸어서 중앙아시아의 작은 마을에 도달했을 때 한 종교사원에 몸을 숨깁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기도할 때 사제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꺼이 포렐을 도와줍니다.  알고 보니 그 사원은 유대교의 회당이었고, 사제는 랍비였습니다.  포렐은 왜 나치의 장교였던 나를 돕는지 묻습니다.  랍비는 당신도 그 때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일을 했을 것이고, 나도 지금 내가 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말씀을 따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는 12월 24일 성탄절 전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10년만에 지킵니다.  3년의 포로수용소 생활과 7년의 걷고 또 걸었던 길이 11,491km였습니다.  눈과 얼음으로 덮힌 길이었고, 야생동물과 소련의 군대와 경찰의 눈을 피해야 하는 길이었고,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인지 나쁜 사람들인지를 알 수 없이 그저 자비와 긍휼을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실존인물인 ‘코넬리우스 로스트’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제목은 ‘마지막 한 걸음까지’(As far as my feet will carry me)입니다.  그의 이아기는 책으로 먼저 출판되었고,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며 그가 죽고 난 다음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1. 거리를 넘어서는 사랑

 

   11,491km 라면 얼마나 되는 거리일까요?  미국에서 사용하는 마일로 계산하면 7140마일입니다.  여러분, 필라델피아와 LA는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3800km에 2700마일입니다.  실존인물인 코넬리우스 로스트는 필라델피아와 LA를 왕복 한 번에 편도 한번을 걸어서 했던 것이고, 그것도 극한의 추위와 위험과 공포를 온 몸으로 이기며 걸었습니다.  단순히 생존의 욕구였을까요?  생존 차체가 목표였다면 아마도 그 가능성은 포로수용소에 남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과의 약속은 성탄절 전까지 돌아온다는 것이었고, 그는 3년의 포로 생활과 7년의 여정을 지나서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넘어서야 했던 먼 거리입니다.  그 거리 안에 존재했던 수많은 위협과 두려움입니다.  그 거리는 시베리아와 독일의 거리이면서 그가 넘어서야 했던 절망의 깊이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났던 실존했던 위협보다 더 큰 적은 그와 함께 수용소에 있던 수많은 포로들이 극복하지 못했던 절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그 절망의 수렁과 두려움의 장벽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약속을 지켜낸 사람이었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의 끝을 넘어서고 사람이 측량할 수 있는 거리의 끝을 넘어서서 오직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한 분이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으나 배반당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셨으나 외면당하셨으며, 우리를 부르셨으나 응답받지 못하신 분이셨습니다.  그가 시간의 장벽을 넘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서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를 회복시키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예수’라고 이름하셨고, 우리는 그를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절에 측량할 수 없는 거리와 시간을 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한 걸음까지’ 우리를 위한 걸음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그의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2.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배경은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나눴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또한 자신이 유대인이며 벤냐민 지파이며 바리새인이며 랍비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이방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계시의 말씀이 유대인의 혈통적 한계 안에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정하신 기한과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혈통적으로 계승되었고 이방인들은 그 은혜를 넘볼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 그들이 유대인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대상이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임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역사가 되고 나와 같이 되고 나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혈통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인류에게 다가왔을 때.... 어리석게도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혈통의 장벽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장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이전에 그 혈통과 전통은 그들을 보호하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역사 가운데 임하셨고,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으며,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을 붙들지 못하고 여전히 이미 예수님이 넘어서신 혈통과 전통의 장벽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면 그들은 복음의 반대편에 자신의 삶의 자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3. 나의 거리와 하나님의 거리

 

유대인들은 왜 전통과 율법의 장벽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노력하는 정도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의롭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두 가지 착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거리, 감히 사람이 스스로 다가설 수 없는 거리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문을 여시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성막을 허락하시고 지성소의 엄격한 거룩함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성소라는 공간에 짐승의 피를 힘입고 제한된 사람이 제한된 시간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정하신 이유를 그들이 알았어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대해서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행위가 하나님을 알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셔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생각을 알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오셔서 그 뜻으로 십자가를 지실 때.....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거절했습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대해 자각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거리와 자신들의 거리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 내가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넘어섭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거리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율법의 의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의 그림자일 수는 있으나 실체는 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실천하신 바로 그 방법으로 그 멀고 길고 깊은 절망의 거리를 넘어서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4. 예수님의 마지막 한 걸음

 

나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그 길고 험한 거리를 우리 주님이 건너오셨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발걸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요한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만찬을 나누었던 기억을 요한복음에 기록했습니다.  13:1에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에 근거해서 우리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그 발걸음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발걸음의 끝은 어디일까요?  예수님의 발걸음은 십자가 위에 못박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은 십자가에 머물렀고 못박혔습니다.  더 이상 다른 걸음이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셨고, 십자가에 오르셨고, 십자가를 자신의 마지막 발걸음으로 결정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만찬을 기억했습니다.  만찬에서 주셨던 말씀과 떡과 잔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이해했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아... 주님은 자신의 마지막 발걸음을 십자가에 두셨는데 이것은 주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완전히 사랑하신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알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13:1에서 이것을 기록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우리를, 교회를 사랑하시되 십자가 위에서 결코 내려오지 않으시는,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사랑하시는구나....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한 걸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고정된 마음, 변함없는 사랑이 못박힌 발걸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거룩한 마음이 못박힌 발걸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거룩하고 굳은 마음을 성탄절에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한걸음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못박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 마지막 발걸음에 우리의 마음을 함께 못박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에 우리의 믿음과 삶의 새로운 발걸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초대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23. 12, 25. 성탄 감사예배 김나래 2023.12.24 1 148
다음글 ‘각자, 서로의 짐을 지다.’ 김나래 2023.12.17 1 141